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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있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두부독감 11] 이옥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두부   기사입력  2003/02/06 [15:48]
인도는 가난해도 행복하다?

▲ 인도인들의 모습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인도기행』(강석경), 『안으로의 여행』·『또 하나의 나』·「인도로 간 예수」(송기원), 『인도기행: 삶과 죽음의 언저리』(법정 스님), 『슬픈 인도』(이지상),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류시화), 『인도에 두고 온 눈물』(현몽 스님), 『은빛 설산』·『히말라야 있거나 혹은 없거나』·『텅빈 인도』(임현담),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한비야),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은희경),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영현).

이상 열거한 책들은 인도에 관한 혹은 인도에 관한 대목이 나오는 책들이다. 그리고 저자의 판단을 전제로 한다면 위의 책들은 19세기 영국이 만들어낸 인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을 유포한 혐의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다시 말해 인도는 더럽고 불결하며 빈곤과 가난이 반복되지만, '행복'한 인도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인도는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인가?

"이런 종류의 글들은 인도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작가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타자의 가난과 고단한 삶을 고통 없이 구경할 따름이다. 의무와 책임 없이 잠시 동화 같은, 그림 같은 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인도의 힘든 현실이나 복합적이고 갈등이 많은 사회는 미학적 이미지의 뒤로 사라지고 슬픔이나 고통은 우리와 무관한 아름다움이 된다."(149쪽)

저자는 강석경과 송기원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도는 '더러움과 빈곤이 가득할 뿐, 즐거운 일이나 사람다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인도는 있지만 인도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는 '야만인, 굶주린 아귀, 헐벗은 인간, 벌거숭이 아이'들이 사는 곳이며 '지독한 악취'가 나는 곳이다. 갠지스 강가에서 화장하는 장면을 통해 이들은 인도를 죽음의 땅으로 묘사하면서 타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망자에 대한 예의나 동정 따위'를 가지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한다.

저자는 인도가 깨달음을 준다고 믿는 우리의 신화도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류시화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류시화는 우리 나라에서 명상 서적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개척자이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의 가장 큰 죄목은 '인도를 시간 속에 박제'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를 성자의 나라로 만들었지만, '물질적인 현재의 인도'는 없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통해 그는 '정형화되고 박제된 이미지를 통해 인도를 더욱 신비하고 낯설게 만들었다.' 또한 깨달음이란 자동판매기에서 나오는 '인스턴트 커피'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비판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지여행가 한비야에게 '선과 악, 행과 불행이 인도에만 있고', '인도에서만 인생이 보인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자칫 다른 오지를 인생이 없는 생물학적 상태로 무화'할 수 있고, '오지여행가라는 이미지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인도기행: 삶과 죽음의 언저리』를 쓴 법정 스님에게도 '인도 음악을 소음으로 여기고, 익숙한 서양 음악을 진정한 음악으로 여긴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이런 작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본래 글을 쓰는 작가는 읽을 대상을 염두에 두고 정보를 모으고 관찰하며 기록한다. 독자와 시장의 기대에 부응하는 관점을 파악한 뒤, 거기에 부합되는 것을 취사선택하기 마련이다. 모든 글쓰기는 선택과 조정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인식을 형성하는 담론이다."(155-156쪽)

이처럼 인도는 우리에게는 있어야 할 나라이다. 인도는 우리에게 명상의 나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위안'과 행복을 위해서 인도는 존재해야 한다. 열등한 인도도 우리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있어야 한다. 마치 카레가 없는 인도지만, 우리의 머릿속에는 카레가 인도음식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저자는 '카레는 걸쭉한 소스가 들어 있는 모든 음식을 지칭한다며, 인도인들은 그런 음식을 커리(curry)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박제 오리엔탈리즘'과 '복제 오리엔탈리즘'

저자는 이러한 작가들의 시각을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명명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서양과 동양을 구분하기 위한 서양의 '이념적 관념'이며, 서양이 동양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날조된 동양'을 말한다.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서양의 공식인 셈이다. 여기에서 한발 앞서 영국은 인도에 '박제 오리엔탈리즘'을 선사한다.

영국은 1612년 인도에 닻을 내리고 19세기 초반 실질적인 인도의 지배자로 굴림하게 되었다. 저자는 신비의 나라, 미지의 나라라는 단순한 수사(修辭)는 영국의 인도에 대한 '권력 의지가 얼룩져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인도는 '더럽고 가난한 나라, 악몽과 같은 지옥, 어둠의 중심'이었다. 이것이 영국이 창조한 인도에 대한 '상반된 이미지'였다. 영국은 인도라는 피지배자들을 억압하고 자신과 경계를 짓기 위해 이러한 수사를 펼친다.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힘'만이 아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은 선의 나라, 인도는 악의 나라라는 날조된 공식을 만들며 인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양산하면서 영국의 우수성을 강화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도는 야만 상태, 원시적인 공간이며 문명화가 되지 않는 '과거'의 인도로만 남게 되었고, '박제 오리엔탈리즘'의 굴레를 쓰게 되었다.

영국의 이러한 '인식론적 폭력'은 1857년 일어난 반영(反英)운동이었던 사건을 인도인(人) 세포이의 하극상 폭동(세포이의 난, 인도의 일부 학자들은 제1차 독립전쟁이라고 명한다)이라고 축소 기술한다. 영국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관념을 확립하며 인도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 인도를 열등하고 부정적인 타자로 만든다.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네 사람의 서명』, 버넷의 『소공녀』·『비밀의 화원』등은 이러한 영국의 인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들 소설에서 인도는 더러운 냄새가 나는 비위생적인 곳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인도 사회와 문화는 영국보다 열등한 존재로 구성되고 박제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관찰하고 판단하는 영국 지배자의 희망을 달성하고, 통치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는 근거이자, 인도에 대한 이중적 억압의 출발점이었다.……이 박제된 이미지는 점차 인도의 본질로 여겨졌다."(106쪽)

영국이 만든 인도에 대한 이미지는 이제 박제가 되어 전세계에 유령처럼 떠돌게 되었고, 인도를 경험한 사람이나 경험하지 않은 사람 모두 이러한 환상과 악몽에 젖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이면에는 인도에 대한 지배자의 심리인 '두려움과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을 넘어

▲ 책표지  
우리는 이러한 영국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자신이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이분법도 결국은 오리엔탈리즘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 '감염'된 것이다.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국내 작가들에 대한 배려(?)로 다음과 같이 비판의 수위를 조절한다.

"다만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인도가 우수하다는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영국이 창출한 인도의 이미지가 본질적인 것이 되어 우리의 자기 표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오늘날의 문제이다."(212쪽)

영국이 만들어낸 인도에 대한 그릇된 신화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저자는 오리엔탈리즘도 역(逆)오리엔탈리즘도 아닌 서양이 만든 그들의 중심을 벗어나 '말할 수 없는 변방을 응시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고 명쾌하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동남아 이주 노동자, 연변 동포나 중국인들에게 대입하며, 그들을 열등하다고 더럽다고 여긴다. 이것은 과거 영국이 인도에, 혹은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했던 방식이다. 우리가 그들을 비하하는 것은 상대적인 우월성을 찾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처럼'이 아닌, 서양의 기준에 따라 그들을 따라잡지 말고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어쩌면 동양과 서양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일 수 있다. 우리는 결코 '황색 피부의 백인'이 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아니라 이들도 우리와 똑같다는 '평등'의 원칙이 아닐까? 저자는 타자에 대한 몰이해와 무시는 결국은 자신을 해(害)하는 '부메랑'임을 잊지 말자고 첨언한다.

저자는 또다른 인도를 원치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을 또다른 방법으로 유포시킬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있는 그대로의,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 현재의 살아 있는 인도를 저자는 원한다. 넓게는 이 글을 쓰는 필자와 인도를 알고 싶어하는 많은 독자들의 주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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