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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을 통해서 본 개와 인간의 문화사
[두부독감 10] 개에게 바치는 헌사(獻詞)
 
두부   기사입력  2003/01/29 [15:58]
인간은 왜 개를 키우는가

"현대의 기술 중심적 노동 세계가 익명성을 지닌 채 생동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짜여진 계획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려는 욕망이 표현된 것이다."

저자는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동물을 기르는 이유를 위와 같은 말로 일갈(一喝)했다. 건조하고 딱딱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생명이 있는 동물을 길러 그러한 환경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 그 대상 중에 개는 단연 으뜸이다. 우리 나라의 애견 센터가 밤낮을 가릴 것 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듯이 현대를 살고 있는 개들은 과거의 어느 개들과도(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 왕의 개는 귀금속을 차고 다녔고, 루이 15세는 은으로 만든 개 목걸이를 달아 주었다고 한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강 아닌 호강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개가 호강만을 누려왔을까? 개를 애지중지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는 개일 뿐이라며 여타 동물과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중세시대에 개는 더러움과 불결함, 추악함의 상징이었다. 당시에는 귀족들과 기사들에게 개를 운반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형벌이었다고 한다. '개'라는 말은 욕이었고, 그 자체가 모욕을 상징했던 것이다. 그러한 형벌을 받은 귀족들이나 기사들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또한 개를 소홀히 하거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심한 벌을 받았는데, 이것은 상관의 소중한 재산이자 사냥개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염려가 되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한편 구약성서에는 개를 비천하고 경멸스러운 존재의 표상이었다고 한다.

반면, 개를 인간의 조상으로 섬기며 숭배하던 곳도 있었다. 에스키모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개가 새끼 두 마리(암컷과 수컷)를 낳고 다시 그 두 마리 개가 인간을 낳았다고 믿었다. 중국 사람들은 중국인의 조상을 개로 믿었다. 물론 이러한 신화나 전설은 현실성을 차치하고라도 개가 인간의 숭배 대상임을 말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놀랄 만하다. 인도게르만 민족의 신화에서 개는 죽은 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거나 죽은 자를 따라가거나 지옥을 지키는 동물로 그려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로아스터교 경전에는 '개 한 마리는 여덟 명의 사람과 비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에서 개만큼 극과 극의 대접을 받아왔던 동물이 있을까? 또, 유독 개에게만 베풀어진 이러한 양극의 대접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짐작건대, 그것은 개가 인간과 가장 가깝고 인간다운 동물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개가 회화와 문학 작품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에서 '개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고대의 암각화에서 개는 사냥개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오래전부터 개가 인류의 일상 생활 영역에 머물러 왔다는 반증이 된다. 중세시대까지 개는 사냥개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는 사냥에 필요한 동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의 모습은 17, 18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국왕과 귀족은 엄청난 비용, 잔인한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사냥에 몰두하고 있었다. 개의 특성인 복종과 인내는 사냥하기에 충분히 남음이 있었다. 18세기에 익명으로 작성된 항의 문서인 '군주의 사냥감으로 희생된 사슴의 항의문'은 당시 얼마나 사냥이 성행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또한 군주들에게 개는 인간의 대용품 역할을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의 자리 옆에 별도의 개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가 하면 애견 전용 묘지까지 마련했다. 또한 전쟁터에 함께 출전(?)하기도 했다. 결국 개는 장식물이나 대용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근대에는 '영혼이 없는 장식물'로 정물화나 풍속화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개는 인간을 풍자하는 만화에 등장하게 되는데, 철권과 전횡을 일삼는 정치인, 추악하거나 비참한 인간, 문명으로 인해 도태되는 인간 등 개는 인간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19세기에 들어와서 개는 기존의 지위에서 한층 격상된다. 영국에서는 1822년 7월 22일 최초의 동물 보호법을 공포하게 되어 이후 노르웨이, 프랑스, 오스트리아, 미국 등도 동물 보호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결국 현대에 와서 개는 '개'가 아닌 애'견'으로 인간과 동등한, 어쩜 인간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중세시대 '개'가 욕설이었지만, 현대는 애완견에게 '인간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욕'이 된다. 한편 모파상, 오 헨리, 루이제 린저, 하이네, 파블로 네루다 등은 개를 등장시킨 작품을 발표했다.

철학자들의 눈에 비친 '개'라는 존재

개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도 극과 극을 이룬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동물은 '기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데카르트에게 개는 '건반을 누르면 소리를 내는 오르간'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개에게는 정신 세계가 없기 때문이란다. 또한 존 로크는 오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게 우월성과 지배권을 부여하면서 인간의 동물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반면 칸트는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기 때문에 동물을 학대하지 말고 동물이 늙어버리면 그가 오랜 동안 가족들을 위해 봉사한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까지 말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장 자크 루소도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동물도 가지고 있다며 동물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급기야 몽테뉴는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는 현상에 대해 이렇게 비판의 목소리를 던진다.

"오만은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인간의 병이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연약하고 비참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오만한 존재이다. 이러한 망상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신적인 속성을 지녔다고 착각한다."

시종일관 저자는 개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인간의 개에 대한 박해와 박애는 결국 인간의 역사를 들추어보는 것 같아 아깝다는 시선도 거두지 못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동물, 그중에서 개를 제외하는 것은 거짓처럼 보인다. 사족 하나를 붙이자면, 저자는 개를 먹는 민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개를 위한 묘비명-마르틴 오피츠(1597-1639)

나는 도둑이 나타나면 뒤쫓고 주인의 애인이 찾아오면 얌전하게 굴어서 바깥주인과 안주인의 뜻을 받들었노라.

늑대와 개- 이솝우화

쇠사슬에 묶여 있는 힘센 개를 보고 늑대가 물었다.
"도대체 누가 널 그렇게 묶어놓고 키우는 거냐?"
그러자 개가 대답했다.
"사냥꾼이 그랬단다. 늑대야, 너는 이런 꼴을 당하지 마라. 무거운 쇠사슬은 굶주리는 것만큼 힘들단다!"
이 우화는 불행에 처한 사람에게는 음식 맛도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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