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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에서 부랑하다
[두부독감 24]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두부   기사입력  2004/01/08 [08:55]

녹록지 않은 파리와 런던 생활

1928년 늦가을, 조지 오웰은 프랑스 파리의 트루아 무아노 여관에 묵고 있었다. 그의 수중에는 몇 프랑의 돈만이 있었다. 그는 영어 교습으로 일주일에 36프랑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그마저 할 수 없게 되어 오웰은 옷가지를 챙겨 들고 전당포로 향했다. 이제 그가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이라고는 "팔꿈치가 많이 나온 웃옷, 싼값에 잡힐 만한 외투 한 벌, 여분의 셔츠 한 벌"이 전부였다. 그의 생활은 궁색할 대로 궁색해졌다.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고, 담배도 피울 수 없었고, 우표 살 돈이 없어 편지도 쓰지 못했다. 더군다나 일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루 온종일 일자리를 찾아 걸어다녀야 했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다.

조지 오웰은 X호텔에 접시닦이로 취직을 했다. 그가 일하는 여덟 시부터 열 시 반까지는 "정신착란의 시간"이었다. 밀려드는 주문에 호텔식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숨도 쉴 수 없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그곳은 "지옥 같은 지하실로서, 천장은 낮고, 숨 막히고, 불빛으로 붉게 빛나고, 욕설에다 냄비와 프라이팬 부딪히는 소리로 귀가 멍멍"했다. 그들은 욕지거리로 자신들의 고통을 배설해야 했다. 이 더러운 식당과 양날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화려한 손님들이 고상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후 그는 오베르주 드 장 코타르라는 음식점에서 접시닦이로 일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고 식당은 불결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고, 집에 가지 못하는 날에는 식당의 바닥에서 자야 했다. 접시닦이를 그만둔 그는 선천성 정신 박약자를 돌보는 일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했다.

▲곡예사(드니 라방)와 미술가(줄리엣 비노쉬)의 사랑을 그린 영화 <퐁네프의 여인들>. 이들은 모두 파리의 부랑자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조지 오웰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입고 있던 옷을 팔아야 했고, 잠 잘 곳이 없어 부랑자가 되어야 했다. 부랑자 구호소에서 밥을 얻어 먹기도,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보고 다과를 얻어 먹기도 했다. 부랑자 구호소의 공동침실에는 60∼70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얼마나 조붓했는지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리면 옆사람의 얼굴에 맞닿았다. 어쩔 수 없이 칼잠을 자야 했다. 또한 오웰은 그곳에서 동성애자의 "고약한" 구애를 받기도 했다. 런던에서도 일자리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샌드위치맨을 하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몰려 들어 할 수 없었다. 그는 "궁상스럽고, 별 다른 일이 없고, 질리도록 권태로운 생활"을 이어 나가야 했다. 실직은 오웰에게 "무서운 고문"이었다. 조지 오웰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부랑자 생활을 접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히 탐구하고 싶다. ……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

낭비되는 노예와 비자발적 가난

"어떠한 책도 정치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이 정치와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태도이다." 조지 오웰의 말이다. 그는 인간의 삶과 문학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강조했다. 그가 살았던 당시의 세계는 그야말로 정치적인 격변의 장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스페인 내전, 제국주의의 식민지 전쟁, 전체주의의 확장 등의 사건들은 그를 정치적인 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자신의 조국 영국은 인도를 점령하여 수탈하고 있었다.

▲조지 오웰(에릭 아서 블레어)
조지 오웰(George Orwell,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이다)은 1903년 6월 25일 인도의 벵골에서 인도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의 명문 이튼스쿨을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영국의 식민지 버마(현재의 미얀마)에서 5년 동안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식민지인들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지 오웰의 마음속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싹텄던 것 같다. 그에게 피억압자와 억압자라는 이분법적인 관계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이후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에서 부랑자 생활을 경험했다. 이 경험을 온이로 드러낸 것이 이 자전소설(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3년)이다. 이 소설은 그의 처녀작이자,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작가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회 최하층 사람들을 자분자분 묘사하면서 "걸인이나 부랑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성적 편견에 일침을 가한다.

부랑자는 "건장한 걸인" 또는 "상당히 무해한 기생충"이며, 백만장자는 "새 양복을 입은 일반적인 접시닦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노예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일 자체가 노예에게 좋기 때문"이라는 편견의 소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인이 노예에게 베푸는 "적은 양의 편의"는 가증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또다른 착취를 위한 사탕발림이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이 파리에서 접시닦이를 하며 번 돈 중 일부는 부랑자들을 상대로 돈을 버는 부자(지배층)들의 손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부랑자들은 자발적인 것보다 비자발적인 가난으로 그러한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1929년 미국의 대공황으로 당시 파리의 실업자는 2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누구든 자신을 걸인이나 부랑자로 만들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노숙자가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보다는 비자발적인 가난으로 인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
걸인이나 부랑자는 단지 돈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가난은 자동차가 오른쪽으로 가는 것처럼 평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빈곤은 내일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들은 다른 세계에 속한 "괴상한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그들에게 구걸을 해주는 행동에 본질적으로는 만족해하지 않는다. 그들도 이전에는 일반인들처럼 구걸을 해주었으니까.

그러면서 조지 오웰은 국가의 직무유기도 빼놓지 않고 비판한다. 그들의 가난이 "인위적"이고 "순회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악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례로 당시 부랑자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나, 변변찮은 구호소 하나 제대로 운용되는 곳이 없었다. 옛말에 "가난은 국가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개인이 '비자발적 가난'을 극복한다는 것은 사마귀가 앞발을 들어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같다. 그런고로 현대의 국가는 '어찌할 수 없는 가난'을 짊어지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을 위해 나름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제 가난은 한 개인의 문제를 넘는 국가 제도적인 문제라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루하루 실직자와 현금거래불량자들이 늘어나는 한국에서는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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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1/08 [08:5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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