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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와 파우스트, 그리고 고현정과 이효리
2003년 단상-절망과 증오에서 벗어나 이제 희망으로
 
편집부   기사입력  2004/01/04 [00:24]

본문은 '미둥'이란 필명으로 활동하시는 네티즌 논객의 기고입니다. 본지는 네티즌의 발언을 소중히 여깁니다. 단, 본문과 본지의 편집방침은 다를 수 있으며, 네티즌 여러분들의 다양한 반론을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3년이 저물었다. 이제 2003년은 추억 혹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사회는 수많은 이슈를 만들어냈으며,  정치부터 사회전반까지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다양한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정치적으로는 노무현이라는 기존의 대통령관념에는 맞지 않는 대통령이 탄생했고, 그는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선망의 자리였던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해서 세상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정부의 시녀’였던 검찰은 검찰과의 대화에서 속세말로 떡이 되더니, 이제는 대통령마저 파헤치는 파격적인 법집행으로 심지어 검찰을 사랑하는 모임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런 변화를 두고 상전벽해라 하는 것이리라.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이런 저런 변화가 있었다. 장기화된 경제 침체와 빈곤으로 인한 자살이 늘어나는 우울한 사회에서 ‘로또’는 모든 이의 또 다른 탈출구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하기도 했으며, 다른 곳에서는 그동안 금기로 여겨지던 누드가 유행을 했고, 심지어 헤어누드 공개 여부가 논쟁이 되기도 했다. 우리사회가 뭔가 다르게 변화고 있다고 보여지는 단서들이라 하겠다.

사회는 이처럼 전에는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일이 ‘특히’ 많아 정신없이 지난 한해를 보내야 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삶을 힘겹게 이끌어 가야만 했는데, 이런 한 해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고현정 - 신데렐라는 없다

▲고현정씨    
올해 고현정은 갑자기 사회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연예계 톱스타로 있다가 한국의 최고 갑부라는 ‘삼성가’에 시집을 가서 화려한 신데렐라의 꿈을 이루었던 장본인이었던 고현정의 이혼 발표는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수많은 여인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녀의 신데렐라의 꿈은 그렇게 깨졌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신데렐라는 없다’는 명제를 우리사회에 던져준 고현정의 이혼이 절망 혹은 좌절일지, 혹은 불행의 끝 혹은 새로운 탈출구일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를 것이다. 그녀가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아닌가 한다.

우리가 어려서 읽은 동화를 보면 교훈적인 사건 마지막에는 언제나 ‘행복하게 오랫동안 잘 살았다’는 말이 나온다. 신데렐라는 왕자와 결혼해서 잘 살았고, 흥부는 ‘고전적 로또복권’을 가져다준 제비 덕분에 잘 살았단다. 그들은 모두 고난을 이겨내고, 착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어떤 ‘횡재’ 때문에 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동화적 내용은 영화에도 이어져 ‘프리티 우먼’ 등에서 신데렐라는 화려하게 현대 사회에 일부로 복귀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잘 살아갔을까? 고현정도 ‘완벽한’ 신데렐라였는데....... 또한 매주 흥부가 한명씩 탄생하는 우리사회인데.......

옛날 책인 <장자>의 양생주편에 보면 “늪지에 사는 꿩은 먹이를 찾기 위해서는 열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한번 쪼아봐야 하며, 백 걸음을 옮겨서야 겨우 한번 먹을 수 있다. 그래도 꿩은 사람이 만든 우리 안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 안에서 꿩은 왕처럼 대접받아도, 좋아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우화가 나온다.

우리는 혹시 그 꿩이 되고 싶어 안달을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화려한 무대만을 탐해, 자신이 사슬이 묶인 존재라는 사실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아니 오히려 그 사슬에 묶인다는 사실보다 그 화려함이나 찬란함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찰라와 영원을 바꾸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런 말이 있다. ‘연예가 여행이라면, 결혼은 현실이다’라는 멋진 말이다. 우리는 종종 현실보다 여행을 추구한다. 그렇게 무의미하고 반복되는 현실보다 자극적이고 신선한 여행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여행만으로 인생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불행이기도 하다. 여행은 자신의 삶을 이탈해 모험을 즐긴다. 그런 여행이나 모험에서는 007같은 바람둥이도 멋있고, 황진이도 멋있는 여인네다. 그러나 현실 속의 삶에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007과 결혼한 여성이 행복할까? 아니면 황진이와 함께 사는 남성이 행복할까?

언제나 여행보다는 현실이 어렵고, 모험보다는 삶이 문제다. 예측불허의 자극적인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갈 수 있는 아늑한 보금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답답하기만 하다. 반복적이고 변화 없는 그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우리를 자극한다. 그렇게 7일간의 여행을 하고 싶고, 10년만의 외출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삶을 꿈꿔보고 싶다.

그것이 신데렐라라도 좋고, 로또라도 좋고.......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린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꿈꾸는 자가 행복한 것이지 꿈을 이룬 자가 행복한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추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장자를 넘어 파우스트로 가는 사회

이 지구는 몇 십억의 인구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일부인 우리사회도 몇 천만 명이라는 인구가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렇게 모두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며,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살아갈 수도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장자>의 제물편에는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으로 반신불수가 되거나 죽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을 경우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무서워하던가?”라는 우화가 나온다. 無爲自然을 이야기하는 장자는 자연을 이루는 모든 객체가 다 자신에게 맞는 역할과 행복이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맞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가 자기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그렇게 홀로선 사회가 되어야 한다. 각자의 철학에 맞는 각자의 삶을 각자가 만들어가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있고, 그 선택은 존중되어야 하며,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모습은 과연 어떤가?

고현정의 신데렐라의 꿈에 자신을 투영하고, 혹은 이효리의 성공에 모두가 열광하고 있다.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리고, 로또에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가고 있으며, 청소년은 오로지 좋은 대학가기에 모든 인생을 걸고 있다. 사회는 이를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독일 문호 괴테의 작품인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대신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하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인 파우스트는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자신의 영혼을 판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다. 이러한 모습은 이역만리 독일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고, 살아가는 의의도 없다. 그저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무조건 그렇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는 대신, 명품이라고 불리는 좋은 물건이 혹은 자신을 나타내주는 좋은 간판이 자신을 대신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겉치장에만 모든 정렬을 쏟고 있는 사회인 것이다.

절망과 증오가 이루는 세상

지난 대선은 어느 때보다도 ‘희망’을 이야기 했으며, ‘감동’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희망과 감동이 승리했다. 그러나 지난 한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 힘은 희망과 감동이 아니라, 절망과 증오였다. 핵폐기장을 둘러싼 부안의 대립, 노동자와 농민의 시위, 국회의 한심한 모습 등 뭐하나 기쁜 일조차 없는 세상처럼 느껴지는 한해였다. 그렇게 사회는 혼란스러워보였고, 일부에서는 그 절망과 증오를 증폭시키기에 바빴다.

▲박정희 전 대통령    
그래서 그런지 요즘 “박정희 때가 좋았지.......”라고 회고하는 분들이 제법 있다. 그 때는 비록 가난했지만 그 만큼 희망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취감도 있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지금은 그런 꿈도 희망도 없다는 말일 것이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TV나 신문을 보면 짜증만 나는 세상이니 말이다.

박정희 시절 사람들은 행복했다. 비록 인권이 탄압받고 경찰이 지배하는 숨막히는 사회였지만, 일반인은 TV에 비춰지는 ‘조작된 희망’을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수출 100만 불 시대라고 들떠야 했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새로운 고층빌딩이라도 들어서면 연일 자랑하기에 바빴던 시절이다. 그런데 국민은 그런 상징조작에 살아야 했기에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으며, 그렇게 조작된 희망이 진짜 희망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예전에는 만원가지고 데이트를 했는데, 요즘은 10만원 가지고 데이트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영화같이 보고, 같이 밥 먹어도 만원이 안나오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다. 그러나 그 시절 음침하고 묵은 냄새나는 극장과 지금의 깔끔한 시설을 비교할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또한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던 개봉관과 돌비시스템도 낡은 취급받는 지금의 ‘질의 격차’는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올해 수출액이 2000억불에 다가선다고 하나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고, 박정희 시절이면 난리 부렸을 용산 신역사가 들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마치 처음 ‘포니’ 자동차를 볼 때 가슴 부풀었던 마음이 지금 ‘신형 쏘나타’를 보고도 ‘흥’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본질보다는 외형만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절망과 증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효리 -  그 희망의 메시지

이효리는 올해 가수대상을 거의 휩쓸었다.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해 그녀의 안티세력은 음반 판매수나 가창실력 등을 내세워 이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 이런 비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효리는 가수대상을 휩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우리사회가 그녀의 형상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희망’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가수 이효리    
대중가요란 대중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가요이다. 때로는 멜로디가 때로는 가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나 때로는 가수 본인이 사람을 움직이기도 한다. 바로 이효리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사람들은 이효리가 부르는 노래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며, 그녀 자체에서 안위를 얻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효리라는 ‘존재’자체가 삶의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암울한 세상에 그녀의 존재자체가 그녀의 몸짓자체가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노래가 춤이 말이 좋은 것이다. 그녀가 노래하면 가수로, 그녀가 연기를 하면 연기자로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노래 잘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바로 ‘이효리’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노래 잘 부르는 가수들이 풀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마냥 길어질 수는 없으며, 다시 진지한 음악을 하는 프로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2003년 우리사회는 ‘프로’보다 ‘희망’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도, 정치인도, 지식인도, 그렇다고 스포츠인도 문화인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희망’을 오로지 이효리만 던져주고 있으니 열광해야 하지 않겠는가! 박찬호도 부진하고, 이천수도 부진한 세상에 누구를 보면 희망을 꿈꾸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이 사회는 희망을 던져줄 수 있는 이를 원한다. 바로 그렇게 영웅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이 될 줄 알았던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영웅되기를 거부하고 그 무대에서 내려야 버린 상황에서 그렇게 영웅이 없는 사회에 사람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누군가 현자 혹은 성인 그것도 아니면 영웅이 나와 사람들을 이끌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회고는 미래에 대한 검증이어야 한다. 2004년이 시작한지 며칠이 된 뒤에야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04년의 문화코드는 영웅과 희망이 되기 쉽다는 것을 2003년에 대한 회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효리같은 영웅이 다시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이유는 단지 그런 이미지 조작은 이미 한번 써먹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실력 있는 프로’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실력 있는 희망을 던져주는 영웅을 원하게 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박찬호나 김병현이 잘하면 그들에게 열광할 수도 있고, 이천수에게 모든 희망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스포츠 혹은 연예인이 영웅이 되는 것도 좋지만, 이 사회를 이끌고 나가는데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정치인 혹은 지식인 중에서도 그런 영웅이 나오기를 희망해본다. 그렇게 폭풍처럼 이 사회에 팽배해있는 파우스트적 암울함과 절망, 그리고 증오를 희망의 메시지로 바꿔낼 진정한 미래지향적 영웅이 탄생해보길 꿈꿔본다.

그러나 그런 외부적인 영웅이 던져주는 희망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며 홀로서는 세상으로 가길 바란다. 영웅은 그렇게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진정 희망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한다. 때로는 그렇게 외부적 상황에 안위도 얻지만 진정한 해방은 자신의 마음이 던져주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기에 이제는 절망과 증오보다 희망을 이야기할 때가 된 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며 만들어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초라하지만 떳떳한 자기 자신을 가꾸어가는 한해가...

* 본문은 스탠딩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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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1/04 [00: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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