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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숲 우거진 수목원길과 3.1운동 앞장선 봉선사 승녀들
고모리저수지, 광릉숲, 봉선사의 기억들
 
김철관   기사입력  2022/08/07 [23:21]
▲ 고모리 저수지와 둘레길     © 김철관


포천 고모리 숙박 집의 아침, 유리창 앞에 펼쳐진 태양 빛에 반사된 호수와 산의 멋진 풍광이 그림처럼 다가왔다. 유리창 밑을 보니 아침 둘레길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걸었다.

 

잔잔한 호수의 한 모퉁이에 설치된 오리배가 떼 지어 손님을 기다리는 듯 애처로운 모습도 연출됐다. 숙박업소 레스토랑에서 뷔페로 조식을 하고, 다시 방으로 와 유리창 커튼을 활짝 걷으니 먼 산과 고모리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퇴실을 앞두고 이곳 멋진 뷰에 도취 되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여행의 기쁨이 이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천 영북면에 협곡을 가로지르는 ‘한탄강 하늘다리’가 있고, 그곳에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비둘기낭 폭포’ 그리고 국내관광지로 잘 알려진 산정호수도 있다. 이외 포천은 산사원이라는 전통 숲과 운악산 자연휴양림, 겨울 스키 매니아들이 자주 찾은 베어스타운, 아프리카 예술박물관도 존재한다. 이곳 고모리 저수지와 지근거리에 있는 국립수목원도 포천에 속한다.

 

퇴실과 함께 승용차로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 도로(차도)와 남양주 진접읍의 봉선사를 향했다. 포천 소흘면 고모리를 지나, 곧바로 금메달마을로 불린 직동리가 나오고, 이곳부터 시작해 국립수목원 산책로가 봉선사까지 이어지는데, 걸어 40분 정도 소요된다. 직동리부터 승용차의 앞뒤 문을 열고 천천히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수목원길인 유네스코 광릉숲 생물권 보존지역 입구로 들어섰다. 차도 옆에 조성된 산책로에는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산새 소리, 매미 소리,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잠시 본 산책로 바닥 표지석에 ‘포천 국립수목원, 생태문화탐방로, 둘레길’이라고 새겨져 이곳을 찾는 의미가 더했다. 포천에 속한 국립수목원 입구를 조금 지나자, 조선 7대 왕의 묘인 세조와 그의 비인 정희왕후를 모신 광릉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광릉부터는 지역적으로 경기도 포천시가 아니라 남양주시 진접읍에 속해있다.

 

좀 더 앞으로 전진을 하자, 화살표가 있는 청색 표지판이 보였는데 ‘사회복지 법인 평화원’라고 써 있었다. 이곳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에 의해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모여 살던 유적지로서 정부의 손길과 이웃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1950년대 자급 자족을 하며 고아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표지판이었다.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인 광릉숲 국립수목원 안에 그런 유적지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우거진 광릉숲을 지나 봉선사 입구에 도착하니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이 있고, 바로 옆 절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 광릉 수목원길     ©

  

‘운악산 봉선사’라고 쓴 일주문 앞 주차장 좌측 길목을 이용해 절 안으로 들어가니 연잎과 연꽃으로 가득한 가든이 마음을 사로잡았고, 관광객들은 연꽃을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곳 봉선사와 인근 진접 부평리는 3.1운동 만세 시위지로 역사에 기록된 곳이다. 당시 봉선사 승려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언문을 제작해 부평리 광릉천에서 독립시위를 했다.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산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칭했다.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죽창하고 봉선사라고 개칭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으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근대에 건립됐다.

 

봉선사에는 보물 397호인 대형 동종(대종)이 있다. 동종은 예종 원년(1469)에 주성됐으며 총 높이 229.4m, 입지름 156.0cm의 청동 대형 범종이다. 세조대왕의 치적을 그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됐다. 절이나 법회에서 불교의식을 행할 때 그림(불화)으로 그려 법당 앞들에 걸어 놓은 부처의 모습을 쾌불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조선 영조 11년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비로자나 삼신 쾌불도’가 있다.

 

또한 절 안에 높이 93cm, 너비 37cm, 두께 18cm 크기의 하마비(下馬碑)가 존재하는데, 이것도 세조가 죽은 이후 예종 원년(1469)에 세워졌고, 세조의 위패가 모셔진 어실각으로 갈 때, 정승이든 판서든 누구든지 내려 걸어야 했다는 것. 원래 하마비는 사원이나 종교, 궐문 또는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은 석비로 노소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존경을 표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500여 년 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절을 중창할 때 심었던 느티나무가 있는데, 우거진 잎을 뽐내며 양팔을 활짝 벌인 모양인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위엄 또한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한 이곳 경내에는 지난 7월 연꽃 축제 때 설치한 ‘행복바라미, 소원성취 바람개비’가 윙윙 도는 모습이, 이곳을 찾는 어린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한 듯했다.

 

특히 봉선사 큰법당은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운허 스님이 1970년 조성한 건물로 대웅전이라는 명칭 대신 큰법당이라는 한글편액이 달여 있다. 여기서 편액이란 종이, 비단, 널판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은 액자를 일컫는다.

 

대웅전을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표현한 것을 비롯해 법당 입구 문기둥에 한자가 아닌 ‘부처님공덕다말못하고’ ‘허공을재고바람얽어도’ ‘큰바다물을모두마시고’ ‘온누리티끌세어서알고’ 등 한글로 쓴 문구들이 곳곳에서 관찰된다.

 

이날 큰법당 인근에 디지털 불전함이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디지털 불전함은 복전함, 승보공양, 연탄나눔, 문화재 복원 불사 등 보시 항목으로 구성됐고, 신용카드나 현금을 넣고, 용도(보시 항목)에 맞게 클릭하면 영수증이 나온 구조로 돼 있다.

 

넓은 절을 관람하는데 날씨가 더워 목이 탔다. 그래서 곧바로 봉선사 다도원으로 가 실내에 비치된 에어콘 바람과 함께 의자에 앉아 보살들이 엿기름으로 직접 만든 식혜(3000원)를 마시며 더위를 달랬다.

▲ 봉선사 큰법당     ©
▲ 봉선사 연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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