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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전용 반대, 한자혼용 뒤에는 일본이 있다
[한글 살리고 빛내기29] 김종필, 이희승이 한글을 못살게 군 까닭이 무었을까?
 
리대로   기사입력  2021/06/28 [00:26]

광복이 되고 미국 군정 때부터 한글로 교과서를 만들고 공문서를 썼다. 그리고 조선어학학회를 중심으로 겨레를 사랑하는 분들은 일본이 못쓰게 한 우리 터박이말을 살려서 쓰고 일본 한자말을 쓰지 말자고 했다. 최현배 장지영이 미국 군정청에 들어가 교과서를 한글로 만들자고 할 때에 경성제대 출신 이숭녕과 조윤제 교수, 고려대 현상윤 총장들이 반대했다. 그래도 우리말을 한글로 적자는 명분과 분위기가 강했기에 공문서와 교과서를 한글로 썼다. 그때만 해도 경성제대 나온 서울대 이희승 교수는 한글학회 이사로서 한글만 쓰자는 모임 간부로 참여했다. 그런데 1969년에 한국어문교육연구회(회장 이희승)’란 모임 대표를 맡고 한글과 한글학회에 등을 돌렸다. 왜 그랬을까?

 

▲ 이희승교수는 한글학회 제 40대로부터 제42대까지 이사였으며 한자혼용 주장자인 이숭녕 교수도 40대 한글학회 이사, 김형규 교수도 41대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다.     © 리대로

 

이희승은 일제 때 조선어학회(한글학회) 간사장까지 지내고 한글맞춤법을 만드는 데 앞장을 섰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까지 치렀고 대한민국 때에 한글학회 이사로 계속 활동했다. 그리고 1964년 문교부가 한자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한글학회가 반대 투쟁위원회를 조직했을 때에도 그는 학회 이사로서 반대 투쟁위원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1969년부터 한글만 쓰기를 반대하는 모임 대표까지 맡았다. 광복 뒤 미국 군정 때 교과서를 한글로 만드는 것을 반대하던 이숭녕교수도 대한민국 때에 한글학회 이사로 활동했으나 한글만 쓰기를 반대하는 모임까지 조직해서 가로막지는 않았었다. 이희승도 경성제대 나온 이로서 일본식 한자혼용을 좋아했지만 숨기고 있다가 한글전용을 강력하게 시행한다고 하니 본색을 드러낸 것인가?

 

원래 경성제국대학은 식민지 통치 앞잡이 양성소로서 일본을 위한 교육기관이지 우리 겨레를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그런 일본 앞잡이 교육을 받은 경성제대를 나온 이숭녕과 조윤제 들이 광복 뒤 한글로 교과서를 만든다고 할 때에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친일 정치인 김종필이 일본과 한일회담을 강행하고 앞으로 일본과 가깝게 지낼 거 같으니 독립협회에 가담했던 이완용이 일본 앞잡이가 되었듯이 이희승도 일본이 좋아하고 바라는 쪽으로 변절한 거로 보인다. 그런 마음이 한국어문교육연구회를 만든 취지 글에“1967년경부터 1970년까지의 갑작스런 한글전용 확대와 교과서 한자배제의 한글전용정책을 저지하고자 1969년 이희승(李熙昇이상은(李相殷오지호(吳之湖) 181명의 저명 인사 발기(發起)로 발족하고 이희승이 회장을 맡았다.”라고 잘 나타나있다.

 

▲ 이희승도 1964년 한글학회의 “교과서 한자 병기확대 반대투쟁위원회” 위원이었다.     © 리대로

 

이희승은 그렇지 않아도 최현배가 미국 군정 때부터 국어정책을 주도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지만 같은 경성제대 출신인 이숭녕, 김형규 들도 한글학회 이사였으며, 이희승은 정부가 1965년부터 한자교육을 강화하겠다고 했을 때에 한글학회가 그 반대투쟁위원을 조직했는데 그 투쟁위원 명단에도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1967년에 국어운동대학생회가 나타나 한글전용을 외치니 박정희 대통령이 한글전용을 강력하게 시행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경성제대 후신인 서울대를 다닌 군사정권 2인자 김종필과 손잡고 일본식 한자혼용에 나서서 최현배, 김윤경 들 한글전용 주장자들을 누를 기회로 본 거 같다. 그 당시만 해도 지식인, 정치인, 언론인이라는 이들이 거의 모두 일본 식민지 한자혼용 교육에 길든 이들이었으니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희승은 1968년에 일제 강점기 군수를 한 이항녕,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인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이병도와 신석호, 일제 때 진단학회를 조직한 김상기,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인 만주국 협화회의 위원을 지낸 이선근 들들 친일 성향 인사들과 현정회란 단군을 섬기는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그런데 국민정신 교육을 한다고 만든 이 단체는 이희승과 친일 인사들이 만든 단체여서인지 단군시대는 한자가 없었고 쓰지도 않았는데 한자단체보다도 더 한문을 섬기고 있다. 그리고 이 단체는 근래에 만든 사설단체이면서 조선시대 사직단 구역에 집을 짓고 단군정전이란 문패를 달아서인지 단군숭배단체 대표 단체 행세를 하고 있다. 저명인사인 이희승과 경성제대 출신들의 명성을 내세워 문화재청과 서울시 지원을 받아 행사를 하니 정치인들이 대표 민족운동단체로 여기고 이들 행사에 참여하는 거 같다.

 

그런데 김종필은 국어학자도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 일본식 한자혼용에 앞장선 것일까? 그는 일본 식민지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일본식 한자혼용에 길든 세대로서 경성제대 후신인 서울대를 다녔고 그의 아버지 김상배는 일제 때 부여에서 면장을 지낸 친일 성향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굴욕스럽게 한일회담을 체결할 때에 우리가 모르는 일본과 무슨 밀약이 있거나 일본에 잘 보여서 제 이익을 챙기려고 한자혼용에 광분했던 것으로 의심이 간다. 아니면 서울대 다닐 때에 경성제대 나온 친일 교수에게 교육을 받아서 그렇거나... 그렇지 않고는 그가 왜 친일 성향 학자들과 함께 일본식 한자혼용에 나섰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본래 한자혼용은 조선 말기 일본 침략자들이 이 땅에 심어 놓은 것이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하고 오늘날 일본 1만 엔짜리 돈에 얼굴까지 담긴 정한론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인 이노우에 가쿠고로1883년 조선 외무아문협판 고문으로 왔을 때에 한성순보 창간에 참여했다가 1884년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도망갔는데 1886년에 다시 들어와 한성주보 편집주사가 되어 한자혼용으로 신문을 만들어서 이 땅에서 한자혼용이 시작했다. 그가 한자혼용으로 신문을 만든 것이 그의 스승인 후쿠자와가 조선이 중국처럼 한문전용이 아닌 일본처럼 한자혼용에 길들여야 한다고 꾸짖었고, 그는 장차 조선을 통치하기 좋게 하려고 한성주보를 한자혼용으로 만들었다고 털어놨다는 설이 있다.

 

▲ 왼쪽부터 후쿠자와와 그의 제자 이노우에, 유길준과 그가 쓴 한자혼용으로 쓴 서유견문 표지     © 리대로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제자인 유길준이 1895년에 한자혼용으로 서유견문이란 책을 낸 것도 일본 영향이며, 내가 동국대 국어운동학생회를 만들고 활동을 할 때에 이완용의 손자라고 자칭하던 국문과 이병주 교수가 국어운동학생회 활동을 방해한 일이 있는데 이 또한 일본 영향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재도(국어사전 전문가) 선생이 내가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로 있을 때 나와 한 방에서 국립국어원이 낸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일본말을 조사했는데 그 때 그 분이 내가 소년조선 편집을 하던 1970년대 일본에서 온 일본 관리가 우리나라 신문사 편집인들을 식당으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는데 신문이 한자혼용을 해서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자혼용하자는 어문회남광우 교수가 함께 있었다.”면서 한자혼용 뒤에는 일본이 있다고 강조한 일이 있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선생은 일제 때 광주사범을 나와서 전라도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했는데 광복 뒤 이은상 선생이 한글전용으로 호남신문을 만들면서 그 신문 편집 일을 해달라고 불러서 학교 선생을 그만두었고, 그 뒤 한글학회에서 사전 만드는 일도 했다. 정재도 선생은 1961년 이희승이 일본 사전을 보고 일본 한자말을 많이 넣어 만든 국어사전을 냈는데 그 사전을 근거로 남광우 교수들이 우리말은 70%가 한자말이라고 주장하며 한자혼용과 한자교육 확대를 주장했고 그때부터 이희승은 최현배 말본과 대항하고 김종필 5.16세력을 등에 업고 국어정책 패권을 잡으려고 나섰다는 이야기 들들 이희승과 남광우 교수와 있었던 증언을 내게 많이 해주셨다.

  

▲ 한글회관에서 함께 있었던 정재도(왼쪽)님과 나, 이희승이 만든 현정회의 서울 단군성전 모습.     © 리대로


아무튼 나는 한자혼용하자는 이들 중에는 중국과 유교 영향을 받은 사대주의자들도 있었지만 일본 강점기 식민지 교육으로 길든 이희승과 김종필 같은 일본식 한자혼용 주장자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고 그들 뒤에는 일본이 있다고 보았고 일본 강점기 잔재를 쓸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1992년 민족문제연구소 초창기 그 모임 후원회 조직위원장을 맡고 친일파 청산에 앞장을 선 일이 있었다. 이제 일반 국민들은 일제 식민지 교육 찌꺼기인 일본식 한자혼용을 주장하는 이들 말에 넘어가지 말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을 한글로 적는 말글살이를 해서 한글을 빛내자고 간절히 호소한다. 한글이 태어나고 570년이 넘었는데도 한글을 안 쓰는 것은 그 임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한글이름짓기연구소 소장
세종대왕나신곳찾기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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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6/28 [00: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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