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의 우리말글사랑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정두언, 함께 한 한글운동 고마웠습니다.
[추모] 한글일꾼 좋은 사람, 하늘나라에서는 하고 싶은 일 하며 지내소서
 
리대로   기사입력  2019/07/18 [11:12]

 7월 16일 저녁 5시 쯤 운전하고 집으로 가는 중 한 벗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방금 정두언 전 의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속보가 떴다는 것이다. 내가 정두언 의원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알려준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뒷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띵하고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집에 가니 또 다른 이로부터 그런 문자가 왔다. 내가 하는 한글운동을 많이 도와준 사람이었기에 그 소식을 듣고 놀라서 내게 알려준 것이다. 지난해 이만 때에 노회찬 의원이 그렇게 세상을 떴다는 말을 들었는데 올 여름엔 정두언 전 의원이 그렇게 갔다니 기가 막혔다.

 

아직 젊은 사람이, 할 일이 많은데 그렇게 간다니 어이없었다. “아니 왜 죽어...”하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저녁도 먹기 싫었다. 다른 때 같으면 누리통신 소통망을 통해 글을 쓰고 읽다가 자는데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잘못된 소식이었으면 했는데 뉴스를 검색하니 참말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일이며, 그가 국회의원으로서 한글운동을 도와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그는 정치인 이전에 좋은 사람이었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며 바른 사람이었다. 그가 죽었다는 말에 마음을 잡을 수 없어서 할 수없이 막걸리를 한 병 사다가 혼자 마시고 잠을 잤다.

 

▲ 왼쪽은 1999년 한글단체가 정부가 공문서에 한자를 병기하겠다는 정책을 추진하는 김종필 총리와 신낙균 문화부장관 영정이 걸린 상여를 메게 광화문 네거리로 반대 시위 나갈 때 모습, 오른쪽 제1정부청사 뒤에서 내가 한글단체 대표들과 “한자병기 추진하는 김종필 총리는 일본으로 가라.”고 외치던 모습.     © 리대로

 

 

내가 정두언을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그가 국무총리실에 근무할 때다. 그 때 김종필 총리가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는 한글전용법이 있는데도 무시하고 일본 한자말을 한자로 병기하겠다는 정책을 추진해서 한글단체는 강력하게 반대 투쟁에 나섰다. 한글단체는 종합청사 뒤에 가서 “김종필 총리는 일본으로 가라!”고 외치고 김종필 총리 영정사진을 단 상여를 만들어 거리로 나가 한자병기 반대 시위를 할 때였다. 그 때 나는 한글단체 원로들을 모시고 김종필 국무총리를 만나자고 종합청사 총리실에 갔는데 만나주겠다는 김용채 비서실장이 없어서 기다리다가  나는 내 대학 후배가 총리실 민정수석으로 있어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그 때 이상보 교수님이 내가 대학 후배를 만난다고 하니 따라나섰다. 그 때 총리실 강태룡 민정수석은 내가 국어운동대학생회를 만들 때부터 나를 도와준 충청도 고향 후배로서 잘 아는 사이었다. 그런데 그는 김종필 총리의 오른팔이었는데 나를 보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이 사람들을 몰고 와서 어른보고 일본으로 가라고 외치면 어떻게 허유?”라고 충청도 사투리로 따졌다. 내 아저씨벌인 이희균 교수가 김 총리와 고교 선후배로서 친한 사이인 것을 아는 그는 내가 너무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른을 너보다 잘 모시는 것이다. 어른이 역사의 죄인이 안 되게 하려는 것임을 왜 모르느냐. 절대로 안 될 일이니 강력하게 말씀드려라. ”고 설득을 하는 것을 보고 있던 이상보 교수님이 당신도 동국대학에서 양주동 교수님으로부터 고전문학을 배운 우리 대학 선배임을 밝히고 내 말이 옳다고 거들었다.

 

그리고 당신의 사위(정두언)가 총리실에 있다고 말하니 강 수석비서관은 바로 정두언 비서를 불러와 인사를 시켰다. 그렇게 처음 만났는데 그가 17대 국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16대 국회 때 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위원회(회장 전택부)를 조직하고 내가 사무총장으로 신기남, 김근태 의원들과 열심히 활동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17대 국회에서는 신기남의원도 한글단체도 포기상태였는데 나는 “지금 8부 능선까지 왔는데 포기하면 안 된다. 지금까지 민주당 중심이라 안 되었다. 한나라당 의원이 참여하는 의원모임을 만들자. 조금만 머리를 쓰면 성공한다.”라고 말하고 “한글세계화추진의원모임(대표 신기남)”을 만들어 2005년 말에 한글날 국경일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을 한나라당 의원들이 반대를 많이 했기에 그 당 사람을 끌어 들여야 한다는 내 판단은 적중했고 새로 국회에 들어온 젊은 정두언의원이 열린우리당 우상호, 정청래의원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들과 함께 그 몫을 충실하게 해 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이상보 교수님 힘이 컸다. 17대 국회 초기 내가 모시던 이상보 교수(정두언 장인)는 나보다 열 살 아래인 정두언 의원을 동생처럼 생각하고 잘 써먹으라고 말했고, 정두언 의원도 자신이 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말하라고 했다. 참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많이 도와주었다. 18대 국회에 들어온 정두언 의원은 내게 “한글날 국경일 문제는 해결 되었으니 또 싸울 거리를 만들어야죠?”라고 먼저 할 일이 없느냐고 제안할 정도로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김종필 총리 때 한자병기를 막아내는 것을 봤고 나와 같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고 나니 힘이 나서 국회의원 이름패 한글로 바꾸기, 한글날 공휴일, 한글박물관 세우기 들을 도와주어 모두 해냈다. 그런데 19대 국회에 들어와 더 힘을 쓰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르게 살려다가 어려운 일을 겪고 20대 국회에 낙선하면서 매우 힘들었던 거 같다. 그런데 식당을 열었다고 문자도 보내고 방송에서 정청래의원과 같이 나와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크고 많은 일을 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어제 그런 슬픈 소식을 듣고 보니 놀랍고 기가 막혔다.

 

이제 세상은 바른 사람이 마음 놓고 힘을 쓰게 않고 그를 하늘나라로 가게 했다. 그리고 내가 정두언 의원과 함께 한 한글운동도 지난 역사가 되었다. 나는 이 땅을 떠나는 정 의원 빈소를 찾아 “하늘나라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고 지내소서!” 빌고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오니 눈물같은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다시는 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고통을 겪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버스를 타니 시원한 바람이 불고 꿈속을 헤매다가 정신이 번쩍 든 거 같았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니 다시 인생이 허무하다는 느낌이 들고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 세브란스 병원 정두언 빈소를 찾아 “함께 한 한글운동을 잊지 않겠다. 고맙다. 하늘나라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재미있게 지내시라”고 마지     ©리대로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한글이름짓기연구소 소장
세종대왕나신곳찾기모임 대표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9/07/18 [11:12]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