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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7.2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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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처칠의 전쟁 : 2차 세계대전의 거짓말
[국제진단] 2차대전 종전 75주년, 대영제국의 해체와 유일강대국 미국의 등장
 
아레나

 이 글은 폴 크레이그 로버츠 박사가 데이비드 어빙의 책 <히틀러의 전쟁><처칠의 전쟁>에 관해 쓴 서평이다. 어빙은 금년 80세의 역사학자다. 그는 2차대전에 관한 세계에서 가장 폭넓은 자료와 증언을 섭렵한 연구자일 것이다. 어빙이 1977년에 발간한 1000페이지에 달하는 <히틀러의 전쟁>1987년에 발간한 전 4권의 <처칠의 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던 2차대전 설명과는 매우 다른 시각과 내용을 문서증거들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2019년은 2차대전 종전 75년이 되는 해이다. 2차 대전에 관한 데이비드 어빙의 책들이 독자들에게도 알려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로버츠 박사의 서평을 옮긴다.-편집자 주.

  

2차대전의 거짓말 / 폴 크레이그 로버츠

  번역: 아레나

  

1) 히틀러의 전쟁과 처칠의 전쟁

 

전쟁의 여파 속에서 역사란 제대로 쓰여질 수 없다. 패자의 입장을 말해 줄 이는 없다. 승전국의 역사가들은 정의로운 승자가 저지른 범죄들을 애매하게 흐려야 하고, 적을 악마로 묘사한 전쟁 선전 때문에 설명은 제약 당한다.

 

전쟁에 이긴 나라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승리를 즐기고 싶어하지, 자기 나라가 전쟁의 책임이 있고, 지도자의 숨겨진 이유만 아니었더라면 굳이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진실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가들은 접근 가능한 정보의 한계에 제약을 받는다.

 

실수, 부패 그리고 범죄를 숨기기 위해, 정부는 수십년 간 문서 창고에 자물쇠를 채워 둔다. 전쟁 참가자들의 회고록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일기는 분실됐거나, 보복의 두려움으로 감춰져 있다. 특히 패전국의 목격자들을 찾아내서 질문에 대답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이 든다. "행복한 이야기"에 도전하는 사실들은 공식 문서, 인터뷰, 서신, 일기 그리고 회고록 등을 통해 수많은 검증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확인 되었더라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지기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유럽에서 2 차 대전에 관련된 목격자들과 문서들은 뉴질랜드, 호주를 비롯해 캐나다와 미국 전역, 그리고 유럽, 영국과 러시아까지 흩어져 있다. 진실을 추적하는 역사가는 이런 문서와 목격자들을 찾아 오랜 세월의 어렵고도 힘이 드는 조사에 직면한다. 이 역사가는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발견한 증거를 판단해 진실이라는 퍼즐을 맞추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게 드러난 진실은 항상 승리자의 전쟁 선전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해리 엘머 반즈 (Harry Elmer Barnes)라는 역사학자가 있었다. 그는 최초로 일차 사료에 의거한 1차 대전의 역사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의 진실한 설명은 전쟁 선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이렇게 진실은 자주 환영 받지 못한다. 데이비드 어빙 (David Irving)은 확실히 유럽의 제 2차 세계대전에 관한 한 가장 뛰어난 역사가임에도, 신화에 도전하는 일은 처벌을 면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본보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빙은 이런 현실을 인내한다. 만약 여러분 중, 지금껏 세계를 재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2차 대전의 거짓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데이비드 어빙의 두 권의 책: <히틀러의 전쟁> 과 처칠의 전기인 <처칠의 전쟁>4권 중에서 제 1권을 보기 바란다.

         

▲ 히틀러의 전쟁, 1977, 데이비드 어빙     © 아레나

  

어빙은 역사학자로 일기를 찾아내고 생존자들을 추적하고, 정부에 문서 공개를 요구하는데 수십년을 보냈다. 그는 독일의 롬멜 장군과 괴벨스의 일기를 최초로 찾아냈으며 소련 기록 보관소를 들어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그 밖에 수많은 2차 대전에 관한 사실들을 찾아냈다. 그는 유럽의 2차 대전에 관한 한 전 세계의 모든 역사가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영국의 유명한 군사/전쟁 역사 학자인 존 키건 경 (Sir John Keegan)은 타임지 문학 해설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2차 대전에 관한 광대한 저술 중 두 권의 뛰어난 책들이 있다. 한권은 1952 년에 출판된 체스터 윌 모트 (Chester Wilmot) <유럽을 위한 투쟁>( The Struggle for Europe)이며, 다른 한권은 데이비드 어빙의 <히틀러의 전쟁> (Hitler’s War )이다.”

    

▲ 처칠의 전쟁, 1987 데이비드 어빙     © 아레나

이러한 많은 찬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데이비드 어빙은 악마로 비난받으며 자신의 책을 스스로 출판해야 한다왜 이렇게 되었나? 이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겠다. 하지만 그렇다. 여러분들이 짐작한 대로 시온주의자들 때문이다. 당신은 시온주의자의 선전 화보가 실린 저들의 역사 이외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독일 (NAZI)은 역사상 가장 악마적으로 묘사된 존재들이다. 그 뿐 아니라 누구든지 히틀러나 히틀러의 독일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좋게 말하면 그 역시 배척당할 것이다. 어빙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앞서 언급한 어빙의 두개의 문서화된 역사적 사실을 담은 책을 읽고 도달한 결론을 보고하겠다. 여러분도 이 책들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2) 누가 2차대전을 일으켰나?

 

2차대전은 히틀러가 아니라 처칠에 의한 전쟁이었다. 어빙은 독자들이 이러한 결론을 피할 수가 없도록 문서화된 사실을 제공한다.

 

2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이웃나라를 기습공격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전쟁 선포를 해서 일어난 전쟁이다. 전쟁 초기에 영국과 프랑스 군의 대패와 붕괴는 전투 준비가 안된 영국군과 이런 영국과 조약으로 묶인 어리석은 프랑스가 전쟁 선포를 함으로 발생한 결과인 것이다. 전쟁에서 참패를 거듭한 영국은 동맹국 프랑스를 신속히 버렸고 그로 인해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당한 채 히틀러의 자비심에 기대는 신세로 전락했다.

 

독일의 자비심은 충분했다. 히틀러는 대부분의 프랑스와 프랑스 식민지를 점령하지 않았다. 독일은 패탱( Henri Philippe Pétain)총리가 이끄는 반 독립상태의 프랑스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했다. 패팅 총리는 비록 이름 뿐이었지만 프랑스의 독립을 지키고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 협력한 죄로 드골 대통령에게 사형선고를 받는다.

 

한편 1930년대 영국에서의 처칠은 권력 밖에 있었다. 그는 전쟁을 이용하면 권력내부로 다시 들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영국인도 처칠의 웅변과 미사려구를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불굴의 투지를 지닌 영국인도 없을 것이다. 그 당시의 처칠은 가문의 저명한 선조인 말보로 공작의 전기를 쓰고 있었다. 말보로 공작은 수년간의 군사적 분투 끝에 프랑스의 강력한 태양왕이자 유럽의 통치자였던 루이 14세의 군대를 격퇴한 인물이다. 처칠은 공작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재현하고 싶어했고 무엇보다 권력을 원했다.

 

귀족인 처칠과는 대조적으로 히틀러는 인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독일 인민을 대리했다. 1차 대전 후의 베르사유 조약(1919)은 독일에게 전쟁의 모든 책임을 씌우고 이 나라를 산산이 해체했다. 독일 영토의 일부가 몰수되어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에게 주어졌다. 독일은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기만적인 휴전 협정에 동의해주었으며, 그 결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된 지역에 사는 700만명의 독일인들은 졸지에 다른 나라 영토의 체류자로서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을 예전 같은 모습으로 통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폴란드와 상대하기 전만 해도 히틀러의 계획은 전쟁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히틀러의 요구는 공정하고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반 나치 압력단체인 포커스 그룹(Focus Group)에게 자금을 받는 처칠은 챔벌린 총리에게 압력을 가해 영국이 독일과 폴란드 협상에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처칠은 영국총리로 하여금 폴란드 군부독재가 독일인과 독일 영토를 반환하는 것을 거절해도 된다는 보증을 서도록 했다. 폴란드 군부정권은 영국이 이런 보증을 지킬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똑똑하지 못했다. 따라서 폴란드 독재정부는 영토를 돌려 달라는 독일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러한 챔벌린의 실수와 폴란드 군부 독재 정권의 아둔함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야기한 셈이다. 소련과 독일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1939)으로 알려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분단 시키기로 한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했을 때 영국과 영국에 메인 운도 없던 프랑스는 이 실행불가능한 보증 때문에 독일에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동부 쪽 절반을 점령한 소련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따라서 영국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책임이 있는 것인데, 처음에는 독일과 폴란드의 협상에 어리석게 관여했고, 두번째는 독일에 전쟁 선포를 한 당사자다. 처칠은 독일과의 전쟁에 중점을 두었다. 그 전쟁은 이전부터 처칠이 의도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그 어떤 전쟁도 원하지 않았으며 결코 영국을 침공할 의사가 없었다. 독일 침공의 위협은 처칠이 영국을 그를 중심으로 단결시키기 위해 꾸며낸 괴물이었다. 히틀러는 대영 제국이 세계 질서에 필수적이라는 견해를 표명했으며, 영국 제국이 사라진다면 유럽이 세계에서 우월적으로 차지하는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도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독일군은 프랑스와 영국 군을 격퇴시켰다. 그런 후 히틀러는 영국에게 특별하게 관대한 평화를 제안했다. 히틀러는 영국에게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독일의 식민지를 돌려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독일이 대영제국을 꺽는 것은 독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볼셰비키 러시아와 일본에게 이득을 안겨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평화 제안을 최대한 비밀로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평화를 막으려는 노력에 성공을 한다. 처칠은 대체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전쟁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아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Franklin D. Roosevelt)는 처칠을 교활하게 격려했다. 하지만 그는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이 전쟁이 영국이라는 나라를 파산시키고 제국은 붕괴될 것을 기대했다. 전쟁을 통해 이러한 루즈벨트의 목표가 달성되면 미국 달러가 세계의 준비화폐로서 영국 파운드화의 강력한 지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3) 처칠의 뒤늦은 후회

 

처칠이 영국을 전쟁의 덫으로 끌어 들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독자적으로 이길 수 없었다. 루즈벨트는 아주 비싼 대가를 받고 약간의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미국은 대서양에 있는 영국의 해군기지에 쓸모 없는 낡아빠진 전투함 60대를 제공했다.

 

루즈벨트는 필사적이 된 영국이 22십억 달러의 금괴와 남아프리카에 있는 영국 소유의 4200만 달러의 금을 넘겨주기 전까지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 Lease)법 제정을 지연시켰다. 그런 다음 영국이 해외자산을 헐값에 매각하도록 강요했다. 예를 들어 194012500만 달러 가치의 영국 소유 비스코스 컴파니(Viscose Company)는 부채도 없었고 국채만 해도 4천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런 회사를 모건상회(House Of Morgan)3700만 달러라는 헐값에 팔도록 했다. 영국은 전쟁을 위해 알짜배기 해외 자산들을 워싱턴과 월스트리트에 싸구려로 넘겨야만 했다.

 

미국의 원조는 또한 대영제국을 해체하도록 만드는 조건을 내걸었다. 영국은 1932년부터 세계 공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영국과 자치령 간의 관세 특혜 협정인 오타와 협정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보호막은 사라져야 했다. 루즈벨트 정부의 국무장관 코델 헐 (Cordell Hull)은 영국에게 미국의 원조는 "제국이라는 굴 껍질을 여는 칼이라고 말했다. 처칠은 이를 알아차렸으나 그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에 루즈벨트에게 호소하는 것 이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처칠은 미국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만약 대영제국이 팔릴만한 모든 자산을 팔아치우고, 우리의 피를 바쳐 전쟁에 이기고 세상의 문명을 구원하며, 미국이 그 어떤 사태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완전히 무장할 있는 시간을 벌게 해준다면 이는 부당한 일입니다. 우리는 뼈속까지 헐벗어야 하니까요.”

 

루스벨트가 영국의 자산과 세계 권력을 어떻게 박탈했는지만 가지고도 긴 글이 될 것이다. 어빙은 처칠이 갱스터 정치 시대에 루즈벨트 연맹의 인사이더가 아니었다고 적는다. 대영제국의 생존은 루즈벨트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는 처칠을 신뢰할 수 없고 술에 취해 지내는 호구로 간주했다. 루즈벨트의 처칠에 대한 방침은 교수형대의 죄수가 목을 매달 정도의 밧줄를 제공하는 수준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전쟁을 통한 제국의 전복을 추구했다.

 

마침내 처칠은 워싱턴이 히틀러가 아닌 대영제국과 더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기에 엄청난 아이러니는 히틀러는 처칠에게 평화와 제국의 존속을 제안 했었다는 사실이다. 처칠은 독일과의 전쟁이 가장 불필요한전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미국의 정치가 패트릭 부캐년 역시 그의 저서 <처칠과 히틀러의 필요없는 전쟁>에서 처칠이 불필요한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있다.

       

4) 재난 유발자

 

 

▲ 패트릭 뷰캐넌의 <히틀러와 처칠>     © 아레나

히틀러는 영국 도시들의 민간인 지역에 대한 폭격을 금지했다. 전쟁 범죄를 시작한 것은 처칠이었고 나중에 미국도 이 같은 전쟁범죄를 따라했다. 처칠은 영국이 독일 민간지역에 폭격하고 있는 것을 비밀에 붙였고 적십자가 공습을 감시하지 못하도록 했다. 처칠은 독일 민간인 지역에 소이탄 폭격으로 화재를 일으켜 도시 전지역이 불이 나면,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지 못하도록 또다시 폭격을 지시했다. 처칠이 이런 일을 저지른 목적은 독일로 하여금 런던을 공격하도록 만들어, 영국이 그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미국에서 영국에 대한 동정 여론을 조성하여 미국을 참전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번의 영국 공습으로 함부르크 인구 5만명이 살해했고 그 뒤를 이은 공격으로 4만명이 더 죽었다.

 

처칠은 또한 독일 민간거주 지역에 대한 공습에 화학무기인 독가스를 추가하도록 명령했다. 그 뿐 아니라 로마를 폭격하여 재로 만들라는 명령도 내렸다. 영국 공군은 두 명령을 모두 거절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과 미국은 아름다운 바로크의 도시였던 드레스덴을 대규모 공중폭격으로 파괴했다. 소이폭탄을 투하하여 화염폭풍으로 10만명이 타 죽고 질식사했다. 베를린을 포함 한 독일 전역에 대한 폭탄 테러가 몇 달 간 계속되자 히틀러는 굴복했다. 처칠은 마침내 성공했다. 이제 공중폭격 이야기는 영국의 독일 공습이 아닌 독일의 "런던 대공습"으로 바뀌게 된다.

 

독일의 히틀러처럼, 처칠도 전쟁을 지휘했다. 그는 군사지도자들의 조언을 받는 수상이라기 보다는 군대를 무시하는 독재자 쪽에 더 가까웠다. 비교해보면 히틀러는 처칠보다 훨씬 탁월한 전쟁 전략가였다. 처칠은 하는 족족 되는 일이 없었다

 

1차 대전 당시 처칠은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약화시키기 위해 영국군을 파병했다. 이 작전은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고 참담하게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2차대전에서도 처칠은 노르웨이, 그리스, 크레타, 시리아 그리고 다카르 전투에 영국군을 파견하는 황당한 결정을 내렸고 이 전쟁에서 모두 실패했다. 처칠은 또한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여 1,600 명의 프랑스 해군의 생명을 앗아갔다. 히틀러가 프랑스와의 평화조약을 위반하고 프랑스 함대를 탈취 할 것이란 개인적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칠이 저지른 이러한 재난들은 의회의 불신임 감이었으나 챔벌린과 핼리팍스 같은 경쟁자가 나서지 못하니 대안이 될 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실로, 지도력의 부족이야 말로 내각이나 군부가 철의 결단력을 가진 처칠에 맞서 견제하지 못한 이유였다.

 

히틀러 또한 강철의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는 그 자신과 독일을 그의 결단력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은 히틀러가 아닌 처칠이 일으킨 것이다.

 

5) 히틀러의 실수

 

처칠이 영국인들을 그의 뒤로 단결시킨 것처럼, 히틀러 역시 독일인들의 앞에 섰다. 그는 독일을 위해 일어섰으며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이 당한 강간과 파멸로부터 나라를 재건시켰다. 그러나 히틀러는 처칠과 같은 귀족이 아닌 중 하층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름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폰(von)자가 붙는 프러시안 군대 장교의 강력한 충성을 얻지 못했다. 그는 군방첩기관인 압베르(Abwehr)와 이 기관의 수장인 빌헬름 카나리스의 반역에 고통받았다. 전쟁의 마지막 해의 러시아전선에서 히틀러는 러시아가 베를린까지 저항없이 들어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장군들에게 배신 당했다.

 

히틀러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들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은 것과 러시아를 침략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또한 그는 패전을 거듭한 영국군이 프랑스 덩케르크에서 철수할 때 40만명의 적군을 그대로 보낸 실수를 했다. 그는 전멸당한 영국군이 모멸감을 느껴 전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함으로 전쟁종식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처칠과 상대를 하는 나라에겐 평화의 기회란 없다. 히틀러가 퇴각하는 영국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후퇴작전은 영웅적 행위로 변신되었다. 덩케르크의 퇴각은 영국으로 하여금 전투 의지를 부추기는데 이용됐었다.

히틀러가 왜 러시아를 침략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가지 가능한 이유는 엉터리 정보가 주어졌거나, 혹은 군방첩기관이 의도적으로 거짓정보를 제공함으로 러시아를 만만하게 오판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나중에 그의 동료들에게 러시아 군대의 엄청난 규모와 소련군이 탱크와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알았더라면 결코 침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략한 이유는 영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전쟁을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히틀러는 러시아를 정복함으로써 그 가능성을 없애고자 했던 것 같다.

 

침략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히틀러를 패배시킨 것은 30 년 만에 일찍 들이 닥친 러시아의 겨울이었다. 독일군이 계획된 대로 러시아를 포위 하기 전에 동장군은 모든 것을 궤도에서 멈춰 세웠다. 혹독한 추위는 독일군의 이동을 불가능하게 했고 그 사이에 스탈린은 회복할 시간을 얻었다.

 

히틀러는 효과적인 전투력이 없는 무솔리니와의 동맹으로 인해 러시아 전선에서 필요한 자원을 이탈리아를 구하기 위해 소진시켰다. 무솔리니의 실수로부터 이탈리아를 구하기 위해 히틀러는 러시아 전선에 쓰여져야 할 군대, 탱크 그리고 항공기들을 그리스와 북아프리카로 돌렸으며 크레타 섬을 점령하는데 소모했다. 독일군이 러시아의 반격을 받아 밀려나게 되었는데도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연합군에 체포당하여 항복하는 것을 막기위해 귀중한 군사자원을 돌려 이탈리아를 점령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은 러시아의 1000킬로미터에 걸친 전선과 그리스, 북아프리카, 프랑스의 일부 그리고 미국/영국 연합군의 노르망디와 이탈리아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인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독일 군대는 최고의 전투력을 가졌지만 전선이 너무 많았고 장비와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것에 압도당했으며 연락 통신의 관리 또한 부주의 했다. 영국이 독일의 통신암호문을 읽을 수 있다는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이를 막지 못했다. 따라서 북아프리카의 롬멜 장군에게 보급품을 공급하려는 노력은 영국 해군에 의하여 번번히 막히고 말았다.

 

6) 홀로코스트 문제

 

어빙은 어느 책에서도 직접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것을 기록했지만 사실적 증거에서 나온 그림은 시온주의자들의 공식적 기술과는 다르다.

 

조직적으로 유대인을 대학살하면서 가스실에서 죽이고 화장했다는 그 어떤 독일의 계획서나, 히틀러 혹은 히믈러의 명령은 그 누구로부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대학살은 자원과 운송 수단을 엄청나게 사용하며 막대한 조직과 예산 및 자원이 필요한 아주 특별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서들은 히틀러가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의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이주시키려고 계획했던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계획은 러시아 침략의 초기 성공과 함께 유럽의 유대인들을 러시아의 동쪽 유대인 볼세비키 지역으로 보내 스탈린에게 맡기기로 변경 되었다.

 

또한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서류들이 남아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히틀러는 유대인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해결된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유대인 학살의 대부분은 독일과 프랑스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유럽 동부의 독일점령지로 보냈는데 그곳의 독일인 행정가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인다. 이들 행정가들의 일부는 유대인을 관리하는 불편을 감내하기 보다는 참호를 파놓고 그들을 일렬로 세워 총살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은 유대인 볼셰비키 행정부 하에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던 러시아 주민들의 분노에 희생되었다.

 

"죽음의 수용소"는 실질적으로는 노동 수용소였다. 예를 들어 오늘날 홀로코스트(Holocaust) 박물관이 된 아우슈비츠 (Auschwitz) 수용소는 독일의 필수적인 인조고무 공장이었다. 독일은 절망적으로 노동력을 구했다. 독일의 전시물자를 생산하는 노동력의 상당한 인원이 러시아 전선의 빠진 부분을 메우기 위해 차출되었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전시물자 생산지는 전쟁으로 집을 잃고 난민이 된 사람들을 데려다 노동력으로 썼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 추방될 예정이었으며 강제 노동을 시킬 수 있는 인력이라면 누구라도 수용했다. 독일은 어떤 노동력이든 절실하게 필요했다.

 

모든 수용소에는 화장장이 있었다. 그 시설들의 목적은 인구 근절이 아니라 발진티푸스나 기타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들을 처분하는 것이었다. 난민들은 모든 곳에서 왔고, 그들과 함께 질병과 세균도 가져왔다. 조직적인 유대인 몰살의 증거라고 알려진 해골과 뼈가 난무한 시체 더미의 끔찍한 사진들은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독일 행정 체계가 무너져 노동수용소에 의약품과 식량이 없는 상태가 되자 수용자들이 굶주림과 장티푸스로 죽은 수용자들이었다. 위대하고 고귀한 서방의 승리자들이 직접 노동 수용소를 폭격해서 그곳의 수감자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7) 지배엘리트의 방해자

 

내가 보고한 내용은 총 1,663 페이지로 두권의 책이다. 이 많은 분량의 문서화 된 역사적 정보는 서구의 독선과 궁정 역사가들의 인적 자본 모두와 모순되기 때문에 기억의 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이 알려지는데 그 대가는 너무 비싸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어빙이 발견한 정보를 자신의 역사 설명에 추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어빙을 칭송하는데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역사가들은 그를 인용하고 그의 책 내용을 표절할 수 있다.

 

시온 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얼마나 큰 힘을 얻었나. 미국의 정치학자 노르만 핀켈슈타인( Norman Finkelstein)은 이를 가리켜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부른다. 물론 전쟁으로 유대인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들과 함께 여러 다른 민족과 나라들도 환란을 겪었다. 하지만 시온주의자들은 그 고통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독특한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어빙은 자신의 저서가 널리 판매 되었고, 처음에는 저명한 역사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영국과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집은 폭도들에게 공격받았고, 가족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이름은 짓밟혔고, 책을 낸 출판사들은 화염병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소위 민주주의의 나라인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고 추방당했다.” 어빙이 구금된 사건은 이후 법원 판결로 불법적인 것으로 결론이 났고 관련부처 장관은 벌을 받았지만 말이다. 그 이후 어빙은 이 책에 대한 불만에 가득한 학자들과 영향력 있는 시민 즉 시온주의자들의 명령으로 1992년 캐나다에서 추방당했고, 호주, 뉴질랜드, 이탈리아, 남아프리카 그리고 다른 여러 소위 문명국이라는 나라들에서 입국 거절을 당했다. 국제적으로 연결된 단체들은 도서관에 편지를 돌려 이 책이 책 선반에서 제거되도록 운동을 했다.”

 

서방 세계의 사상의 자유와 진실에 관해선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하자. 서양에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진실만큼 무시당하는 것은 없다. 서양에서는 지배 엘리트 집단의 이익을 위한 의제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역사 설명은 통제를 받는다. 데이비드 어빙 (David Irving)이 몸소 배웠듯이, 저들에게 방해가 되는 이에게는 불행이 있다.

 

출처: https://www.paulcraigroberts.org/2019/05/13/the-lies-about-world-war-ii/

 

이글의 원저자인 폴 크레이그 로버츠 박사는 미국의 전 재무부 차관보이다. 그의 정치경제시사 웹사이트 www.Paulcraigroberts.org는 수많은 독자들이 구독하고 있다. 저서 <1세계 중산층의 몰락>이 국내에서 출간됐다


기사입력: 2019/06/18 [23:25]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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