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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 출신 애국지사 부춘화 누구?
일제강점기 해산물 수탈 항거 옥고 치러
 
김철관   기사입력  2019/03/23 [23:54]
▲ 1930년 물질가기 전 해녀 회의모습이다.     © 이윤옥


지난 3.1절 100주년 기념식이 전국 각지에서 성대히 열렸다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기미년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졌다특히 올 3.1절에는 언론 등에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활발히 조명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녀(기생), 해녀 등 신분과 관계없이 조선팔도 곳곳에서 조선의 독립을 부르짖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약도 지대했다특히 1931년 일제강점기 때 제주해녀 해산물 수탈에 항의해 잠녀항쟁을 추동했던 부춘화(1908-1995) 애국지사의 얘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이윤옥의 시집 <서간도에 들꽃피다2>와 제주해녀박물관 자료 등을 통해 그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부춘화 지사는 지난 1908년 제주도 구좌읍 하도리에서 출생했다이후 1922년 15살 때 물질을 배웠다물질을 하면서도 향학열에 불타밤에는 사립보통학교 야간학부에 들어가 민족 자주정신을 일깨운 교육을 받았다. 1928년 21살 때 해녀조합 산하 조직인 구좌면 해녀 대표로 선임돼 해녀회장이 됐다. 1931년 5월 해녀들이 어렵게 채취한 해산물을 일본인 주재원으로 하여금 부당하게 일괄 수납케 한 현장을 목격한다.

 

이 때 부춘화 애국지사는 분연히 일어난다어민투쟁인 해녀잠녀항일 투쟁은 일제의 해산물 수탈이 원인이 됐다그는 해녀 1500여명을 동원해 일본 검속경관대를 습격해 무장경관대와 격렬한 항일투쟁을 이끌었다그는 수차례 일본인들의 강제적 침탈행위 중단을 관청에 건의했다하지만 시정되지 않았다이후 해녀들의 단결을 호소하며 9개항의 요구사항이 적힌 건의서를 직접 작성해 항일 투쟁에 나섰다.

 

1932년 1월 7일 제주도사(도지사)가 순시차 구좌면 세화리를 경우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부 애국지사는 해녀 1000여명을 동원해 해녀복과 해녀 작업차림으로 무장하게 한다. 이 때 도사의 행차를 가로막고 해녀 권익옹호와 주권회복을 요구했고 해녀노래를 합창했다.

 

우리들의 진정서에 아무런 회답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 “해녀조합은 해녀의 권익을 옹호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응한다고 맞섰다이를 본 제주도사 다꾸찌는 혼비백산해 피신했다.

 

당시 해녀들이 애환을 달래며 낮이나 밤이나 자주 불렀던 해녀의 노래는 어떤 뜻이 담겨있을까.

 

1.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2.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 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가 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못 이룬다

 

3.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 등에다 지어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4.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은 착취기관 설치 해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 해간다

가이없는 우리 해녀 어데로갈까?

 

1931년 5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이어졌던 해녀투쟁에 연 230연인원 1만 7000명이 참여했다표면적으로 해녀들이 해녀조합 횡포에 맞선 생존권투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저항했던 민족 울분이 담긴 항일 투쟁이었다.

 

부춘화 애국지사는 해녀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홀로 주동했다고 자수해 목포 유치장에서 6개월 간 모진 고문을 받고 1932년 7월 미결수로 풀려났다풀려난 후에도 외경의 감시와 미행으로 인해 1933년 1월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사촌 언니 집으로 피신을 한다.

 

7년간의 피신을 하면서 일본 내에서 가내공업을 하면서 지내다, 구좌면 세화리 출신 고한일과 결혼해 3남 1녀를 낳았다. 1946년 7월 귀국해 고향 세화리 부인회장을 하면서 해녀권익 옹호에 앞장섰다. 정부는 부춘화 애국지사와 함께 행동을 했던 김옥련 애국지사를 지난 2003년 8월 15일 건국훈장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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