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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5.16 쿠데타, 미군부의 작품이었다?
[책동네] 재야 사학자 김상구의 '5.16 청문회', 5.16 추악한 이면드러내
 
김철관
▲ 표지     ©

지난 크리스마스 연휴기간 소설이 아닌 760여 쪽에 달하는 우리의 현대사를 읽었다.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흥미가 있었다. 국정농단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출판됐기 때문이다. 평소 알고 지낸 저자가 지난 20일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밝힌 책이라고 전해 몰입을 해 읽었다.

 

재야 사학자 김상구 씨가 최근 출판한 <5.16청문회>(2017년 12월, 책과나무)는 5.16쿠데타와 미군부, 여자 편력과 육영수 여사, 측근의 행태 등 박정희와 관련한 모든 내용을 디테일하게 조명했다. 1917년 11월 4일 출생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올해로 출생 100주년을 맞았고, 태어난 해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특히 저자는 이 책에 이어 박근혜와 최순실을 조명하는 <박근혜·최순실 청문회>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어 출판 시기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16청문회>의 핵심은 ‘5.16 쿠데타는 미군부의 작품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5.16 쿠데타의 진실을 말하는 증언들을 토대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틀 뒤인 5월 18일 미8군 캠퍼스 안에 있는 하우스만의 집을 방문해 “혁명위는 하우스만 당신 친구들이 거의 전부이니 당신네 혁명이오”라고 했다. 사실 하우스만은 무엇보다 친일, 부일배를 중심으로 국군을 만들었는데, 국군을 창설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후인 6월 13일 NSC회의에서 당시 케네디 미대통령은 “어떤 세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했던 현재의 시점에선 부차적인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권력을 쥔 자들이 미국에게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이다”라고 해 쿠데타 정권을 인정했다. 

 

이어 61년 7월 21일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김종필과 장태화의 면담에서 “혁명이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고 여러분이 실패하지 않도록 본관이 보장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미군부는 1945년 9월 8일 미군정이 들어온 이후 70여 년간 한국 현대사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 한국전쟁과 정전, 4월 혁명과 민주당 정권 출범과 몰락, 5.16 쿠데타 등이 그 증거이다.

 

박정희는 다섯 번의 쿠데타를 계획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시기에 이종찬, 이용문 등과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의 사주로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미국무부와 합참이 이승만 체제 유지를 결정함으로써 미수에 그쳤다. 두 번째는 1960년 5월 8일 김동하를 비롯한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박정희그룹이 계획했으나 4.19혁명으로 무산됐다.

 

 세 번째는 민주당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육사 8기와 5기 출신들이 데모진압 훈련인 비둘기 작전을 도용해 음모를 꾸몄지만, 61년 4월 19일 기대했던 소요가 일어나지 않음으로 쿠데타는 불발됐다. 네 번째는 5월 12일 비둘기작전을 훈련한다는 명분으로 소요와 관계없이 군대를 출동시키기로 했으나 일부 계획이 정부에 누설돼 불발됐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다섯 번째 음모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5.16 쿠데타이다.

 

“60만 이상의 군대를 가진 민주당 정권이 전군의 0.5%정도인 3400여명의 군인을 동원한 극소수 군인들에게 정권을 탈취 당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대통령 윤보선, 총리 장면,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제1군사령관 이학림 등 쿠데타의 주모자인 박정희의 동향을 훤히 알고 있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이상한 쿠데타였다.” -본문 중에서-

 

무엇보다도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가진 유엔군사령관이자 미8군사령관인 매그루더와 대리대사 그린이 쿠데타 첫날인 1961년 5월 16일 오전 10시경, <미국의 소리>와 <AFKN>을 통해 장면 정부 지지를 선언했음에도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쿠데타 배후에 두 사람을 능가한 힘이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1948년 연말 숙군과정의 여파로 인해 그는 좌익 경력과 함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개인사생활 면에서도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킨 인물이었다. 문제는 사전기획이든 사후승인이든 미국이 박정희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박정희에 대한 미국CIC비밀요원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박정희의 이력이 의혹투성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그는 북경, 천진에서 8개월 정도 머물렀으나 그동안의 행적을 제대로 규명한 적이 없다. 

 

육사사생도 시절 교장대리 이치업 살인미수사건 주범이었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육사생도대장 시기 발생한 훈련생 2명 사망사건 역시 군부는 박정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48년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박정희의 구명을 상신했는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별 연관이 없는 하우스만이 박정희 구명운동에 나선 것도 석연치 않다, 전쟁 중 전격적으로 치러진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도 수상하다. 당시 좌익전력이 있는 박정희가 별다른 공훈 없이 소장까지 진급한 점도 규명 대상이다.

 

당시 박정희 사생활은 어땠을까. 첫 번째 처 김호남과 낳은 딸 박재옥의 호적을 정리하지 않은 채 이현란과 3년 가까이 동거(사실혼)를 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출생한 아들이 요절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는 점이다. 이현란과의 실질적인 결혼 생활을 포함해 육영수와 세 번째 결혼을 서둘렀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1950년 8월 첫 만났고, 10월 약혼, 12월 12일 결혼을 했다. 첫 부인 김호남과의 이혼은 약혼한 다음 달인 11월에 이뤄졌다.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식 날 허억 대구시장이 주례를 했는데,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신랑신부의 이름을 뒤바꿔 부른 주례 실수담은 두 사람의 결혼을 유명하게 만든 화제꺼리가 됐다. 신부 측에서는 결혼을 반대한 옥천 갑부 장인 육종관은 참석하지 않았고 참석한 사람은 장모 이경령과 동생 육예수 둘 뿐이었다. 신랑측 주도로 결혼식이 이뤄져 신부 육영수는 시종일관 얼굴이 밝지 않았다. 

 

박정희 결혼 청첩인은 오덕준, 조재천, 신상묵, 이성조, 손희선, 박춘식 등 6명으로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신기남의 부친인 신상묵도 포함됐다. 신상묵은 대구 사범 5기로 박정희의 1년 후배였기에 절친했다.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한창 논란이 벌어졌다.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에 의해 열린우리당 의장인 신기남의 아버지 신상묵이 일제 문제가 불거졌다.  처음 폭로가 나왔을 때 신기남은 신상묵이 일제강점기에 교사로만 재직했다고 밝혔고, 이로 인한 거짓 해명 논란 끝에 신기남은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사퇴한다. 송재천이 증언한 ‘신상묵은 오장계급이 달린 헌병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있었는데, 대전에서 일본 헌병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본문 중에서-

 

 신상묵은 친일파 중 악질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헌병 시절 항일독립군들을 무수히 고문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독립지사를 탄압했던 친일 모리배들이 해방 후 경찰 혹은 군인으로 변신해 빨갱이 잡기의 명수로 거듭나는 사례 중의 하나로서 김창룡·노덕술 등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결혼 청첩인의 한사람인 조재천의 이력은 흥미롭다. 박정희가 결혼할 무렵 경북도지사로 근무하다 51년 관료생활을 마감하고, 훗날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소속 3선 의원으로 활약하며 야당 중진이 됐다. 4.16혁명이후 법무장관, 내무장관 등을 역임했고, 5.16 쿠데타로 인해 정치가의 꿈이 좌절됐다. 이후 민주당 부총재와 총재를 거치면서 박정희 공화당과 투쟁하던 1970년 7월 5일 사망한다.

 

“반공 보수주의자였으나 ‘황태성 생존설’을 계속 주장하는 등 박정희와의 투쟁으로 많은 주목을 끈 대표적인 야당인사였다. 비록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으나 이승만 박정희와 맞서 싸운 야당 경력은 그의 친일 이력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만한 활약이었다.” -본문 중에서-

 

그럼 고 육영수 여사는 실제 어떤 사람이었을까. 당시 육영수 여사는 ‘청와대 안의 야당’의 이미지가 각인됐다. 특히 74년 8월 15일 사망한 후, 학과 목련의 이미지가 추가 돼 신화처럼 포장됐다. 박정희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김대중 대통령도 국민회의 총재시절 ‘누구보다 인간적인 장점이 많은 여성’으로 표현했다. 

 

당시 야당 총재와 5선 의원의 경력을 가진 박순천 여사도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 국민장 장의위원’의 자격으로 조사를 썼다. “목련과 같이 청초하여 선녀같이 고이 승천하실 줄 알았던 여사께서 그 무지막지한 폭도의 흉탄에 가시다니 이게 원말입니까.”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누구 못지않게 수난을 당했던 고은 시인은 <만인보> 중 유영수 편을 실었다. “그녀는 영롱한 새소리로 하얀 이빨 시려 불행을 돕는 마음을 일으켜 행복했으나 그 새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꽃도 새도 아닌 백자항아리로 말이 없다.”

 

세월이 많이 흘러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전국이 탄핵열풍으로 들끓고 있던 2016년 11월, 김종필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처숙모인 육영수에 대해 의외의 발언을 한다.

 

“고집이 세다. 욕심이 많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다. 불우한 사람 돌본다는 이미지는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인터뷰를 한 기자가 김종필 전 총재에게 “육 여사의 신화가 깨질까 봐 걱정이 된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중 훈려조차 받지 못한 학도병들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을 때 대통령, 장성, 국회의원, 국무위원 등 고위관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 안전을 보장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역사적 진실이었다. 

 

그럼 전쟁 중 박정희의 행적은 어땠을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혼란 중 그해 12월 12일 9사단에 근무한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한다. 9사단 근무이전 박정희의 이력은 현역소령에 복귀해 육본전투 정보과장(1950년 7월)을 맡는다. 이후 중령 진급(1950년 10월)과 동시에 육본수송작전관(1950년 9월), 9사단 참모장 전보(1950년 10월) 등이다.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 38선 돌파, 평양탈환, 압록강 물마심 등 국군이 자랑하고 있는 달콤한 기억이 박정희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전투에 참여한 흔적은 중공군이 참여한 이후인 9사단장 참모장 시절이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9사단은 급조된 부대로서 인민군 패잔병 소탕, 빨치산 토벌 등의 작전만을 수행한 탓에 실제적인 전투경험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추천사를 쓴 강정구 전 동국대 사회학과교수는 “지은이 김상구 선생은 비강단 재야 사학자로서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어느 누구보다 절감하고 분노하면서 이성과 천착으로 이승만, 기독교와 아메리카 제국, 김구, 김두한 등에 대한 성역을 허물고 허울을 벗겨 내는 작업을 해 왔다”며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힘든 조건 속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의 허물기와 벗기기는 더욱더 탄력을 받고 있어 경이롭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무명의 사범학교 학생, 무능한 군인이었던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미국 군부와의 결탁 속에 이뤄지고, 이런 결탁이 가능한 바탕이 일본 패망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천하의 기회주의자 박정희 본인의 미국의 끄나풀로 되살아나기와 지속적인 미국 가랑이 밑을 기어 다니기 등이었음을 추론, 방증, 증명하고 있다”며 “박정희 개인에 대한 수수께끼와 박정희 지배 18년간의 한국사에 불가사의했던 수많은 의문들이 일부 밝혀지는 쾌감 또한 소홀치 않다”고 밝혔다.

 

저자 김상구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종교비판자유실현시민연대(종비련)·종교법인법추진시민연대(종추련) 등에서 활동했다. 종교인의 소득세 문제를 사회 문제화하는데 일조했다. 역사는 이데올로기, 종교, 정치권력과 관계없이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저서로 <김두한 출세기>, <김구 청문회>, <전쟁과 기독교>, <다시 분노하라, 이승만 숨겨진 친일행적>,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범재 김규홍과 3.1절>, <예수평전> 등이 있다.


기사입력: 2018/01/02 [22:32]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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