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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과 소름, 다큐멘터리 영화 속 ‘공간’을 찾아서
이승민의 『영화와 공간 ― 동시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학적 실천』
 
박영대

<우리는 이미 유령들과 함께 살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이토록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니! 여태껏 내가 본 다큐멘터리들은 유익했지만, 대개 그럴수록 지루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그려주는 다큐멘터리는 달랐다. 여느 공포영화보다도 더 강렬한 긴장을 주었고, 몇몇 장면에서는 등에서 쎄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 이승민의 『영화와 공간 ― 동시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학적 실천』     © 갈무리

처음엔 저자의 필력이 좋다고 생각했다. 혹은 몇몇 다큐멘터리의 연출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모두 아니었다.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짜릿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저자의 독특한 시선 때문이었다. <영화와 공간>이라는 제목처럼, 저자는 다큐멘터리 영화 속 공간에 주목한다. 공간을 중심에 놓는 관점, 이것이 나에게 묘한 긴장감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의아했다. 왜 이 관점이 이렇게나 낯설고 섬뜩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낯선 것은 당연했다. 지금껏 한국 다큐멘터리가 공간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메시지를 선명하게 나타낼수록, 인물이나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공간은 자연스레 배경이나 무대로 소비된다. 이 때문에 공간이 직접 드러나는 영상이 낯설었던 것이다. 일리는 있지만 마음에 닿지는 않았다. 새로움은 그렇겠지만, 이 섬뜩함을 설명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던가.

 

나는 의외로 공포영화에서 답을 찾았다. 공포영화 속에서 곁에 있던 친구가 돌연 사라졌거나 텅 빈 공간에 누군가/무언가 있을 때(특히 있는 할 때), 아니면 방금까지 살아있었던 이가 주검으로 떨어지거나 죽어있던 시체가 갑자기 움직이게 될 때, 우리는 무섭다. 그러므로 공포영화의 성패는 이러한 있음과 없음, 생과 사를 나누는 우리의 판단기준을 어떻게 붕괴시키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섬뜩함을 느꼈던 것도 이 판단기준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저자를 따라가면서, 나는 살아있는 공간, ‘공간의 삶을 보았다. 생명이 없는 것으로만 여겼던 공간에게도 나름의 시간과 운명, 삶이 있었던 것이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본다는 것, 지금 여기에서 항상 존재해왔음을 깨닫는 것, 이는 매우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결국 공간을 무시한 것은 기존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 실은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는 공간의 삶을 무시했고, 이에 무지했다. 하지만 공간은 결코 죽은 적이 없다. 다큐멘터리 작품 속에서 공간은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갖고 스스로 변화해가는 존재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안에서도 공간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작용을 계속 가하고 있다.

 

이 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나의 공간을 되돌아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내 공간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공간이란 나의 결정에 속하는 대상일 뿐, 공간이 내 삶의 서사를 진행하는 숨겨진 연출자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보증금 천에 월 사십삼을 내고 있는, 나의 집이자 한 칸의 방. 홍대입구역과 합정역 사이에 있는, 넓은 반지하 방. 나는 이번 여름에 이 집으로 옮겨왔다. 지금까지의 이사와는 달리 희한하게도 나는 한동안 짐을 정리하지 못했다. 무언가 필요할 때마다 박스에서 꺼내 쓰다가, 두어 달이 지나서야 박스를 풀어헤쳤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바닥에 책이 쌓였다. 보고난 책이 책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방 곳곳에 남아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내 게으른 성격을 탓하거나 바쁜 일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공간에 주목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내가 이 공간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새 집에는 인테리어가 필요하다. 인테리어는 무미건조하고 낯선 공간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인테리어를 통해 그 공간을 나에게 친숙하게 바꿀 때, 그 곳은 비로소 내 집이 된다. 그런데 나는 이 낯선 집을 인테리어할 수 없었다. 공간과 계속해서 서걱거렸기 때문이다. 왠지 이 집에서는 자연스러운 가구배치가 되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짐을 정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가구배치를 결정한 것은 내가 아니라 공간이었다. 집 구조상 놓을 수밖에 없는 곳에 책장을 배치하고 보니, 내가 실제로 자주 사용하는 곳에다 책장을 둘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책이 바닥에 탑처럼 쌓여갔다. 즉 이사박스와 책탑은 사실 공간과의 불화를 나타내는 증거였던 것이다. 나는 이 어색함을 전혀 몰랐다. 말 못하는 집이었기에 망정이지, 함께 사는 가족이었다면 심하게 다투었으리라.

 

그렇다고 공간이 언제나 불편만 준 것은 아니다. 서울에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집을 수차례 옮겨 다녔다. 가난한 유학생의 운명이랄까. 그런데 그 운명은 내게서 여러 능력을 이끌어내었다. 친구와 함께 살았던 낡은 하숙집, 나는 그 집에서 밤마다 모기를 잡았다. 수많은 야간전투 속에서 나는 정확한 타격능력과 벽지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이는 물론 내가 알아낸 것이지만, 또 한 편 그 하숙집이 나에게 강요했던 일이기도 했다. 또 성남에서 살았을 적에 나는 전에 없이 부지런했다. 서울을 오가는 길이 멀었던 탓에 나는 일찍 집을 나섰다. 이른 출발에 몸은 고단했지만, 초조하게 지하철을 기다리지 않으니 마음은 더 편했다. 그 덕에 서울 안으로 집을 옮긴 지금도 미리 출발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지금껏 평생 한 번도 여유롭게 출발하지 못하다가 그 집으로 이사한 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면, 그 공간이 나에게 길러준 습관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내가 살아왔던 여러 집이 곧 나의 역사였다. 그리고 단지 이것은 집에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동네, 도시. 한국까지, 이 모든 공간은 우리 삶에 이미 작용하고 있다. 좋든 싫든 간에.

 

이 때문에 이 책은 그 평온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나를 두렵게 했다. 내 삶은 내가 주도한다고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나의 공간을 결정하는 만큼, 그 공간도 내 삶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것과 동일하게, 공간도 나름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죽었지만 실은 살아있는, 이 유령 같은 공간이 나는 섬뜩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새로운 능력, 새로운 습관, 다른 삶은 언제나 기존의 삶이 위험에 처했을 때 생겨난다. 생명이란 워낙 고집이 세서 좀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능력과 습관으로 더 이상 돌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존재의 변화를 겪는다. 이 점에서 공간은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에게 변화를 강요한다. 우리가 자신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잠재성을 실현시키는 힘이 공간에게 있다. 때문에 이 공간의 유령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 삶이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지구는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이는 지구와 태양의 중력 관계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는 동일한 궤도를 따라 도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 역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행성들이 공전하면서 태양계 공간의 중력은 언제나 새롭게 달라지며, 지구는 이 새로운 중력의 길을 따라 공전하는 것이다. 물론 지구의 공전은 다시 다른 행성의 궤도를 바꿔놓는다. 이 끊임없는 변화 때문에 지구와 태양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운동할 수 있다. 아마 고정된 중력의 길이었다면 우리 우주는 벌써 멈춰버렸을 것이다.

 

수많은 유령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 그것이 우리가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다.

 

* 글쓴이는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입니다.

 


기사입력: 2017/11/13 [14:09]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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