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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 '서시' 필사본과 규암 김약연 선생
[연변기행3]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당(명동력사전시관)-선바위
 
김철관   기사입력  2017/07/30 [14:12]
▲ 윤동주 생가     ©


16만 여 세대가 살고 있는 룡정시는 70%가 조선족이 산다. 룡정은 우물에서 룡이 승천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연길 대성중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23km 쯤(30여 분)을 가니 룡정시 명동촌 윤동주 생가가 나왔다. 윤동주 시인 생가로 들어선 입구 바윗돌에 ‘윤동주 생가, 명동 –조성인, 거재시애금강조경 1998. 9-’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내리막길로 200m를 걷자 윤동주 생가 정문이 나왔다. 정문 오른쪽은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쓴 표지석이, 왼편 표지석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라고 새겨져 있었다. 특히 인근 집 벽에 “별들의 고향-시인의 마을 ‘명동촌’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흰 비석에 2007년 12월 28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가 중점 보호단위로 공포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고, 2014년 10월 25일 룡정시인민정부가 세운 ‘윤동주 생가’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서 있었다.

 

▲ 윤동주 생가 정문에서 일행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윤동주 생가는 1900년경 조부인 윤하현 선생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칸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 구조로 된 집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부친 윤영석씨의 맏아들이었고 유복한 가정이었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매도돼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특히 명동촌에서 함께 태어나 윤동주(1917.12.30~1945.2.16)의 삶에 영향을 준 사람이 고종 사촌형 송몽규(1917.9.28~1945.3.7)였다, 몽규가 석달 먼저 태어났지만 죽마고우처럼 지냈다. 송몽규도 윤동주와 함께 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를 다녔다. 은진학교를 다닐 때 몽규는 동주 집에서 다녔다.

 

둘 다 은진학교를 중간에 그만 두고, 서로 다른 학교로 전학해 다른 길을 걷는 듯했다. 이 때 몽규가 먼저 콩트로 문단에 데뷔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확인한 동주는 시 습작에 분발한다. 윤동주는 생전에 그리 잘나간 시인은 아니었다. 무명의 문학청년이라고 할까. 지금까지 많이 알려진 시 대부분은 4년 동안 다녔던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습작한 시들이다. 

 

▲ 일본 유학 중 일시 귀국한 윤동주 시인(윗줄 두번째)과 송몽규 지사(아렛불 두번째 안경 쓴이)     © 독립기념관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1938년 몽규와 나란히 경성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1941년 졸업 기념으로 시를 발표 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제적 사정과 일본의 악랄한 탄압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끝내 포기하고, 19편의 시를 한데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권을 만들어 자신과 자신이 잘 알고 지낸 두 사람의 교수에게 각각 한부씩 전달한 것으로 역사는 밝히고 있다. 

 

1944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후 몽규와 동주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서로 학교는 달랐지만 이 때 일제가 요시찰 인물로 검거해 이들을 감옥에 가둔다. 죄명은 독립운동이었다. 동주는 유학길에 오른 지 1년이 지난 1944년 2월 16일 일본의 형무소에서 옥사했고, 몽규도 며칠 뒤인 3월 7일 한 맺힌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숨을 거뒀다. 이들은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몇 달 앞두고 옥사한 것이다. 특히 석달 차이로 태어나 20여일 차이로 숨을 거뒀으니 생사를 같이 한 셈이다. 2016년 영화 <동주>는 일제 강점기 때의 동주와 몽규의 처절한 삶을 조명했다.

 

일본으로 동주 시신을 수습하러 부친 윤영석 선생과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그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다’라고 말했다. 몽규도 20여일 후 숨을 거두었다. 이들은 일본의 간악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돼 체포된 지 1년 반 만에 독립의 한을 품고, 향년 27세의 일기로 원통하게 옥사한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27살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일제에 강점돼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의 아픔에 괴로워했다.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반성과 성찰 그리고 다짐을 반복하며 별처럼 노래하다 별이 됐다. 동주는 내성적이었고, 몽규는 활발하고 밝은 성격으로 대조를 이뤘다고 알려졌다.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역사적 의의와 유례를 고려해 룡정시인민정부에서 관광지로 지정했다. 룡정시 지신향정부와 룡정시 문학예술계련합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역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했다.

▲ 민족역사기행 버스     ©


마루를 딛고 윤동주 시인 생가 집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방 안에 ‘시인 윤동주 서거 72주기 추모’ 상이 마련돼 있었다. 영정과 꽃, 술병, 물병 들이 놓여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예를 갖췄다. 

 

추모상 옆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위원회가 제공한 윤동주 대표시 ‘서시’가 놓여 있었다. 바로 옆방에 들어서니 당시 유물로 보이는 옷장, 재봉틀, 가방, 도마, 십자가, 숯다리미, 함지 등이 전시됐다. 바닥에는 밥과 국을 끓인 것으로 보이는 쇠솥과 지하 곳간도 보였고, 장독이 나란히 정렬돼 있었다. 발길이 간 옆 쪽 공간으로 가니 엣 기왓장들이 수북이 놓여 있었다.

 

밖으로 나와 뜰을 살펴봤다. 비석에는 리별, 조개껍질, 모란봉에서, 나무, 이런 날, 참새, 곳간, 서시, 눈 등 윤동주 시인의 주옥같은 시가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리별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하늘에 또 뿌연 내, 그리고

커다란 기관차는 빼-액 울며

쪼끄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리벌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고 하고-

더운 손의 맛과 구슬눈물이 마르기전

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1936.3.20.

 

 

나무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1937.3

 

 

 

지난밤에

눈이 수-북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월이 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1938. 12.

 

생전 윤동주 시인은 정지용 시인, 백석 시인 등을 좋아했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윤동주 생가와 지근거리에 있는 명동력사전시관(명동교회)에도 들렀다. 안중근 의사 등이 숨어 훈련을 했다는 룡정 선바위 그 기슭에 자리 잡은 명동은 반일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민족문화교육의 발상지였다.

 

▲ 명동력사전시관     ©

 명동교회 자리인 명동력사전시관에 등장한 규암 김약연은 간도를 민족운동의 기지로, 인재 양성의 본산으로 건설하려고 1908년 규암제를 중심으로 김하규의 소암재, 남위연의 서숙 등을 합쳐 명동 서숙을 설립했다. 학교명을 ‘명동’이라고 칭하고 명동은 ‘동쪽을 밝힌다’는 의미로 룡암, 장재, 대룡, 영암 등 네 개의 마을을 총칭한 말이었다. 

 

규암 김약연 선생은 이곳 룡정 명동촌에서는 반일 민족독립운동과 반일민족문화교육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함께 자란 윤동주 시인과 고종 사촌형 송몽규 지사도 명동학교시절 규암 선생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김약연 선생은 함북 회녕 출생으로 1899년 2월 18일 김하규, 문치정, 김정규, 남위연 등과 함께 지신 장재촌에 집단 이주해 명동촌을 건설하고, 1901년 규암제를 창설했다. 1908년 4월 27일 명동서숙과 1909년 명동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 명동중학과 1911년 명동여학 병설 그리고 1912년 간도국민회와 1913년 간민회를 설립했다. 1917년 간민교육회를 설립하고 1919년 북간도 대표로 노령 ‘전노한족 전회’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특히 조선독립기성회 의사부원으로 3.13 반일대시위운동을 주도했다. 

▲ 규암 김약연 선생 연보와 영정사진이다.     ©



1919년 5월 항일 독립운동가 구춘서, 황병길, 이동휘 선생의 무장 시위 결사대를 후원할 군자금을 모금해 헌신했고, 1920년 1월 상해 임시정부 각료로 임명되자. 그해 2월 연길 도윤에 의해  감옥에 연금됐다. 1927년 북간도기독소년회를 창립한 후, 1938년 2월 은진 명신여고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42년 10월 29일 룡성 자택에서 ‘나의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서거했다. 1977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약연 선생의 주도로 명동학교가 창립되면서 이곳 명동촌은 반일운동의 진원지가 됐다. 명동은 일제의 눈에 가시가 되었고, 이 때문에 탄압도 심했다. 1920년 10월 20일 일본군 한 개 소대가 명동촌을 침입해 학교와 20여호의 인가를 불을 질렀고, 항일운동을 한 허낙근, 리용훈. 최홍택 등 10여 명을 살해했다. 주민 90여명을 체포해 간 곳이기도 하다.  

 

명동은 해방될 때까지 의연한 항일구국의 봉화 속에서 자랑거리가 많다. 오늘 날 500여 명의 인구를 가진 명동은 유서 깊은 조선 마을이지만, 경제력의 빈약과 학교마저 문을 닫아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 복원된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명동력사전시관)는 수많은 동포들의 눈길을 끌며 과거 명동의 엣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명동교회당(명동력사전시관)은 1909년 8간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1909년 김약연 선생 등의 주선으로 지금의 명동교회당 건물을 세우게 됐다. 교회당은 연변에서 가장 일찍이  세워진 교회건물 중의 하나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93년 4월 명동촌이 룡정시의 관광지로 된 이후, 룡정시인민정부는 명동교회당 건물을 문물보호단위로 명명했다. 이곳 지신향인민정부에서는 사단법인 해외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의 지원을 받아 1994년 8월 새롭게 단장을 했다. 윤동주 문학과 생가 보존 그리고 명동교회당 건물 단장에 힘쓴 해외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의 뜻을 기려 교회 무대 왼편에 초상 사진을 걸어뒀다.

 

▲ 명동교회당     ©
▲ 윤동주 시인의 '서시' 필사본이다.     ©


특히 명동교회당인 명동력사전시관에는 과거 민족의 성산 백두산과 백두산 폭포, 명동 개척자 김정규·김하규, 엣 간도 모습, 명동기독여자청년회, 명동교회 주일학교, 안중근 의사·윤동주 시인 등 사진들도 전시해 놨다. 반일민족운동과 반일민족문화교육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 연보와 유언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가 전시돼 있다. 특히 1941년 11월 20일 지은 윤동주 시인의 대표시 ‘서시’가 적힌 원고 사본이 눈길을 끌었다.

 

윤동주 생가와 명동력사전시관(명동교회)을 나와 버스를 타고 5분정도 이동하다 잠시 내려 윤동주 시인이 어린 시절 많이 오르내렸고, 안중근 의사 등이 사격 훈련을 했다는 선바위를 봤다. 

 

지신진 신동골어구에 있는 선바위는 한족토착민 동한(董閑) 이 이곳 땅을 차지하고 있을 때만 해도 절벽사이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래서 ‘비둘기바위’라 불렀는데 명동학교를 세운 김약연 선생 등이 이곳으로 오면서 비둘기바위를 선바위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선바위에 오르면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장재촌으로부터 동거우, 명동촌, 중영촌, 풍락촌, 수남촌 등 마을이 차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 룡정 주변은 유난히 옥수수 밭이 많았다.

 

▲ 안중근 의사가 사격훈련을 했다는 선바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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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30 [14:1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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