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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한문학자 이우성, 큰 별이 지다
[옛날 교과서 읽기] 우리 고전에 바친 고인의 사랑, 한국학 밑돌 놓아
 
정문순   기사입력  2017/06/11 [20:55]

얼마 전 학계는 큰 별을 잃었다. 역사학자이자 한문학자인 이우성의 타계는 학계의 큰 손실이다. 그의 제자 임형택은 고인을 문사철의 사대부적 교양과 근대적 지식인의 풍모를 고루 갖춘 이로 평가한다.
 
신영복에 따르면, 문사철에서 언어, 개념, 논리로 구축되어 있는 완고한 틀이며 는 추상력, ‘은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가리킨다. 얼핏 합리성이나 과학과 거리가 멀 것 같은 유교 철학이 기실 물 샐 틈 없는 논리로 충만한 학문임을 뜻한다. 반면 근대적 교양의 핵심은 비판적 사고 능력과 자기성찰이다.
 
수천 년 이어져온 유가적 사유 체계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볼 줄 아는 상반된 능력을 갖춘 것이 고인이었다. 고인은 어렸을 때 학교를 다니지 않고 독선생을 모셔놓고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고인의 학적 관심은 우리 역사를 진보적으로 해석하고 한문학에서 근대적 의미를 발굴하고 계승하는 것이었다.
 
고인은 생전에 한평생 민족의 고전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특히 실학 연구의 선구자로 뚜렷이 족적을 남겼다. 실학은 1970년대 이전만 해도 그 명칭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황무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고인은 <실학연구서설>(1970)로 그전까지 유동적이었던 실학 용어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실학이 유형원, 이익 등 중농학파의 경세치용,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등 북학파들의 이용후생, 김정희 등의 실사구시 세 조류로 나뉜다는 것, 실학은 정약용에게 와서 집대성되었으며 정약용 이후 실학을 더욱 발전시키며 개화사상으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이가 최한기라는 것 등 오늘날 우리가 실학에 관해 알고 있는 교과서적 지식들도 고인의 손을 거쳐 정립된 것들이다. 특히 최한기의 가계를 처음으로 발굴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사실 보기에 따라서는 1970년대 이후 실학 연구 붐이 당시 박정희 정권의 국학 연구 지원에 힘입었다는 점에서 실학 연구가 독재 정권의 체제 이데올로기에 활용된 측면을 떨칠 수 없기는 하다. 이우성에 앞서 최한기에 주목한 사람들도 이병도, 박종홍 등 관변학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와 한문학의 진보적 전통을 확립하는 데 쏟은 고인의 열정을 폄하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전통 사상이나 한문학이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건 고인에게 빚진 바가 클 것이다.
 
그러나 한문학도도 역사학도도 아닌 내게 이우성이라는 이름이 각별한 것은 그의 학문적 위업 때문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그가 편저한 한문 교과서에서 비롯한다. 한국사와 우리 한문학에서 진보적 전통을 발굴하는 데 주력한 고인의 노력은 교과서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1984년에 발행된 동아출판사 고등학교 한문, 의 저자는 이우성, 임형택, 이동환 세 사람이다. 이 책은 군사 정권 치하의 교과서로 보기 힘들 정도로 시대를 앞서나갔다.

 

▲ 이우성 외 편저, 고등학교 한문 교과서, 동아출판사 1984년     ©정문순


이 교과서에서 비중을 크게 둔 이들은 황진이, 매헌, 이옥봉, 허난설헌 등 여성 시인들과, 정약용,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등 실학파들, 그리고 동명성왕, 장보고, 안중근, 신채호 등 민족 영웅들이었다. 여성, 실학, 민족영웅의 공통 속성은 근대적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근대 이후 발견된 존재이며, 실학은 성리학의 태내에서 태어났지만 근대를 향한 학문이었고, 민족의 영웅은 근대 국민국가가 요구한 민족주의와 만난다. 특히 고인이 민족영웅을 강조한 것은 한국 한문학의 독창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 교과서에서 고인 등은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우리나라 시문이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 말을 좇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는 것과 같다고 일갈한 주장을 실으면서도 그런 글도 한문으로 쓰였다는 점에 유의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우리 문학의 우수성을 남의 문자를 통해 설파하는 김만중 논리의 모순, 고인이 일본, 월남 등 여러 주변 국가에 비하여 한문학의 축적이 훨씬 풍부하고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한 것과 통한다. 이런 현실은 우리 한문학에 대한 고인의 자부심을 낳거니와, 한문 마지막 단원으로 <허생전>에서 허생이 집을 찾아온 이완 대장에게 호통 치는 부분을 삼은 것도 한국 한문학의 당당함에 대한 고인의 자신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나의 경우 서정적인 당시(唐詩), 여성 시인들의 시, <사기>에서 항우와 오자서의 영웅적 최후를 수록한 부분이 특히 좋았다
  
춘효(春曉) 봄날 아침 / 맹호연
 
春眠不覺曉러니
봄잠에 날 밝는 줄 몰랐더니
 
處處聞啼鳥
곳곳에 새 소리 들리네
 
夜來風雨聲
간밤의 비바람 소리,
 
花落知多少
꽃은 얼마나 졌을까.
 
-한문
 
이 시는 원시보다 풀이가 탁월하다. 마지막 구절은 꽃이 얼마나 졌는지 알겠다.” 쯤으로 직역할 수 있지만, “꽃은 얼마나 졌을까로 의문형으로 옮김으로써 애상과 안타까움을 원시보다 짙게 풍기고 있다. 봄비는 그쳤고 새소리가 곳곳에 울리며 청신한 봄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시인의 관심은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막 피었다가 속절없이 져버렸을 꽃으로 이동한다.
 
봄의 흥취를 만끽하려다가 져버린 꽃에게 애상을 느끼는 것은 시인과 자연물의 교감 능력이 극한 경지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생명이 약동하는 활기찬 봄 속의 아련한 아픔이라니, 그 섬세한 감각에 취해 나는 정말 맹호연이 살았던 당나라 때로 가보고 싶었다. 당나라의 봄은 필경 아련한 애상이 뭉글뭉글 피어나는 그림 같은 세상이었으리라. 이 시는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봄날의 여리고 섬세한 정서를 노래한 서정시로 내가 첫 손에 꼽는 작품이 되었다.
 
詠半月(영반월)- 반달을 읊다 / 황진이 
 
誰斲崑山玉하여
뉘라 옥을 찍어내어
 
裁成織女梳
직녀 얼레 만드신고
 
牽牛離別後
견우가 아니오니
 
擲碧空虛
하늘에다 던지었네
 
-한문 
   
곤륜산 옥은 천상에 올라가 얼레빗이 되었다가 더욱 승천하여 반달이 되는 두 번의 존재 변이 과정을 겪는다. 하늘에 던진 얼레빗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늘 한복판에 올라가 박히는 것은 자연의 중력법칙을 위배한 것이다. 그만큼 직녀의 집념은 자연법칙조차 넘어선 것이었다. 직녀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로 더는 소용없게 된 한갓 머리빗을 본디 태어난 지상이 아닌 천상에 던져 버림으로써영원 불멸의 존재로 일약 승격하도록 한다. 직녀는 실연의 슬픔이나 버림받은 신세가 된 비운의 처지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사랑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지고한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 시가 특히 감동스러운 것은 직녀에게 자신을 투영한 황진이 때문이다. 하늘에서 영원히 빛나는 반달은 곧 황진이 자신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는 신분을 극복하고 찬란한 천체로 자신을 승격시킨 태도가 일생 동안 사람 대접을 못 받고 살았을 기녀의 처지를 떠올리게 하여 가슴이 먹먹해진다. 교과서를 통해 처음 이 시를 접할 때만 해도 나는 이 시를 일별만 했을 뿐 기녀 작가의 처절한 삶과 작품을 연관 지어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이 명품 시를 일찌감치 접하게 해준 이우성 등의 편자들이 고마울 뿐이다.
 
황진이의 시는 훗날 서정주가 표절로 의심되는 시를 낳을 정도로 후세에 미친 영향력이 컸다. 한문학을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건 이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문을 읽을 줄 아는 학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등 한문으로 쓰인 학술 연구의 지속 가능성이 의심되거나 한국학의 연구 지반이 흔들리는 현실에서, 한문 창작이 가능했고 우리 고전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고인의 타계는 한층 아쉬움을 준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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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11 [20:5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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