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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번 촛불이 피워낸 봄, 승리는 이제 시작
[정문순 칼럼] 대통령 파면, 아직은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정문순
▲     ©정문순
▲ 시민단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촛불과 결합하기를 바랐다. 사진은 촛불집회의 탈핵 시위. 사진 제공:창원아이쿱생협     © 정문순


촛불이 18번 타오른 끝에 마침내 봄을 맞았습니다.
 
헌법재판소는 현직 대통령이 국민주권과 대의민주제의 헌법 정신을 저버렸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법리를 조목조목 따진 헌재의 판단에도 대의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했습니다. 헌재 역시 국민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준엄한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19번째로 마지막 촛불 집회가 열린 날 시청 광장에는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시민들에게 붕어빵, , 과자가 제공되었습니다. 시민의 승리는 19876월 항쟁 이후 처음일 겁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때 서울에서만 100만 인파가 운집했지만 촛불은 국민 건강을 외면한 정권의 역주행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는 많은 이들이 낙담에 빠졌지요. 이길 듯하다 끝내 이기지 못한 기억이 거듭 있기에 이번 승리가 한층 빛납니다.
 
지난 해 1025일 제가 사는 지역의 도심에서 대통령 하야·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이 처음 점화되었을 때만 해도 한 자루의 촛불이 장차 어떤 힘으로 커져나갈지 짐작한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여느 집회와 달리 오가던 시민들이 질문도 건네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촛불이 겨울 내내 타오르며 헌정사에 남을 일을 해낼 줄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늦가을에 켜진 촛불은 지난 310일까지 설날 연휴를 제외하고는 토요일마다 거의 빠짐없이 타올랐습니다.
 
촛불 집회가 열린 시청광장은 민주주의를 익히는 살아있는 정치 학교였습니다. 시민들의 발언은 집회의 꽃이자 백미였습니다. 연단에 오른 시민들은 대부분 조직되거나 훈련된 운동가가 아니었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웃들이었습니다. 20대의 남성 비정규직 노동자는 최저임금으로 살아가는 설움을 호소하였고, 40대 여성은 미용 시술에 열 올리는 철없는 대통령을 조롱하며 세월의 순리에 최적화된 자신의 몸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청소년들은 10대 투표권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고, 대리운전노조는 매번 어묵 국을 끓여 주며 시민들과 만났습니다.
 
시민단체들도 촛불의 그늘을 찾았습니다. 시민단체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촛불 광장과 결합하고자 했습니다. 여성단체가 주관한 세계여성의 날 기념식도, 환경단체가 마련한 탈핵 행사도 모두 촛불 집회가 열린 곳에서 몇 시간 앞서 열렸습니다. 예전 같으면 시민단체 행사는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그들만의 작은 목소리를 내는 데 그쳤을 것입니다.
 
매번 집회장에서 모금 상자가 돌았습니다. 운동본부는 그렇게 거둔 돈으로 다음 대회를 치렀습니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의혹이 새로 터져 나올 때마다 거듭된 대통령의 담화가 국민의 염장을 질러 1만 여명의 촛불 참가자들을 기록한 날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은 인구가 100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인구 1만 명 당 1명이 나온 셈이지요. 그날 사회자가 집회 종료를 선언하고 나서도 계속 시민들이 꼬리를 물고 모여들었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회를 거듭하면서 참여자는 수백 명 수준으로 내려갔습니다.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를 의결한 다음날 열린 집회도 기대만큼 많은 이들이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굳이 자신이 나가지 않아도 탄핵 전선에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낙관한 시민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 시민들의 관심사는 아무리 봐주려고 해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헌정 파괴를 저지른 대통령의 거취에 국한되어 있었던 듯합니다.
 
일반시민들의 참여가 줄어들고 운동본부에 참여한 단체 활동가들이나 회원들, 그 주변 사람들 중심으로 참여자들이 좁혀지면서 촛불집회가 시민단체 행사로 굳어질 즈음 헌재의 결정이 나왔습니다.
 
물론 촛불 집회가 아니었다면 탄핵 결정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라고 합니다. ‘촛불 혁명이라고도 합니다. 피를 흘리지 않은 명예혁명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국민이 단 몇 년 간 맡긴 권한을 엉뚱한 데 쓴 대통령이 파면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대통령이 국민에게 거짓말을 하거나(미국 닉슨 전 대통령), 부적절한 처신(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을 했다는 이유로 탄핵이 추진된 다른 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우리는 그들과 큰 차이가 납니다. 대통령 지지율 5%에다 국민 70%의 탄핵 찬성에도 불구하고, 겨울 내내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야 했고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결의한 것도 모자라 헌재에까지 가서야 결론이 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 전체의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큽니다.
 
촛불이 대통령 탄핵 결정을 이끈 가장 큰 동력인 점은 인정하지만, 촛불에 대통령 파면 이상의 것을 기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촛불 집회가 대통령 한 사람을 끌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 구석구석의 적폐를 해소하고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개진하는 장이 되었는지는 확신하기 힘듭니다. 비정규직 노동 문제, 사드 배치 등 사회단체들이 제기한 현안들은 촛불 광장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낮아지기 시작한 것은 광장에서 대통령 하야·구속·탄핵 요구를 넘는 목소리가 나올 때와 맞아떨어집니다.
 
우리는 아직 승리를 부르기에는 이른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당장 코앞에 대선이 다가왔습니다. 쫓겨난 대통령을 여전히 떠받들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배반당한 역사를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떤 역풍이 덮치지 않을지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다가오는 선거가 정말 촛불의 승리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설령 촛불 민심을 거역하지 않는 정부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상식이 지배하고 정의가 통하는 나라, 특권을 용납하지 않고 땀 흘리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 나라, 젊은이들이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을 저주하지 않는 나라 등 우리가 꿈꾸는 나라를 만드는 일은 대통령 탄핵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과제일 수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이 앞으로 우리가 수없이 만들어가야 할 승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탄핵이 우리가 거둘 성취 중 작은 것에 지나지 않을 때 촛불은 진정 위대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파 속에서 촛불 한 자루의 온기에 의지하며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이 무색하게 겨우내 말랐던 잔디에 드문드문 푸른빛이 돌기 시작합니다. 지난 겨울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견뎌낸 누런 풀들이 푸른 옷을 완전히 갈아입을 때쯤 나라를 바꾸는 큰 일이 있겠지요. 선거가 끝나고 다시 광장에 모여 폭죽 터뜨릴 날을 꿈꿉니다.
 
iCOOP소비자활동연합회 시민기자단 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다듬었습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기사입력: 2017/03/23 [10:18]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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