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IT사회문화미디어국제·과학여성환경·교육
전체기사 공지사항 사회단체알림마당 기고및토론방 편집회의실
편집  2017.11.24 [22:08]
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공지사항
사회단체알림마당
기고및토론방
편집회의실
개인정보취급방침
대자보소개
광고/제휴 안내
기사제보
HOME > 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명절과 냉면 가락의 공통점을 아시나요
[정문순 칼럼] 유습이 돼버린 전통, 한때는 저항과 혁신이었던 시절도
 
정문순

설날이라고 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설날’)로 시작하는 노래다. 명절이라고 해서 새 옷과 새 신이 생기지 않는 요즘 아이들에게 설날은 초콜릿을 주고받는 정체불명 서양 명절만큼의 흥분도 없는 날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여전히 설이라고 하면 어린 시절 살얼음이 낀 차가운 수정과, 상어고기(돔베기), 모두배기떡(잡과병) 등 풍성한 차례 음식들이 눈앞에 선연해짐과 함께 명절 기념 동요와도 같은 이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허나, 동요의 착각과 달리 까치설날은 까치 새의 설날이 아니다. 까치에게도 설날이 있다고 생각한 건 노랫말을 쓴 윤극영의 오해였거나 그가 작시를 할 당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던 생각이었다. ‘까치라는 말은 작다는 뜻의 아ᄎᆞᆫ에서 발음이 변한 것이다. 아ᄎᆞᆫ에서 아ᄎᆞ아치를 거쳐 까치가 되었다.(국어학자 허웅) 즉 까치설날은 까치가 누리는 설이 아니라, 작은 설을 뜻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크리스마스 못지않은 명절이듯이 예전에는 설 전날도 마찬가지였다. 예전 문헌을 통해서 아ᄎᆞᆫ설, 까치설, 작은설은 설날에 버금가는 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나온 <동국세시기>에는 섣달 그믐날 저녁에 그해 남은 음식이 해를 넘어가지 않도록 밥과 반찬을 비벼먹는 풍습이 있다고 되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오늘날 비빔밥의 유래를 찾는다. 어쨌든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는 세시풍속이 있다는 건 조상들이 작은설을 명절로 당당하게 즐겼다는 뜻이다.
 
또 굳이 문헌의 증거가 없어도 일상에서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쇤다느니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작은설의 흥겨움을 가장 진듯하고 뜻 깊게 나타낸 이는 근대 시인 백석이다
   
저녁술(저녁 밥숟가락)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섶()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국막질(숨바꼭질)을 하고 꼬리잡이(서로 꼬리를 잡는 놀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 가는 노름 말 타고 장가가는 노름을 하고 이렇개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아랫방)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웋간(윗방)한 방을 잡고 조아질(공기놀이)하고 쌈방이(주사위)굴리고 바리깨돌림(주발뚜껑이나 종지 돌리기)하고 호박떼기(호박 따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서로 다리를 끼고 마주앉아 노는 놀이)하고 이렇게 화디(화대. 호롱불 받침대)의 사기 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독구고 홍게닭(새벽에 우는 닭)이 멫 번이나 울어서 조름이 오면 아릇목싸움(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처마의 안쪽 지붕 도리에 얹힌 부분)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북적거리며)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무국을 끓여 무만 건져 두었다가 다시 끓이는 국)을 끄리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곬족()> 부분, 1935년 발표 (띄어쓰기는 현대어에 맞게 고침)
 
여우난곬족: 여우가 출몰하는 산골에 사는 사람들
원문 시 풀이 도움: 송준 엮음, 백석 시 전집, 흰당나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놀이로 본 조선 
  
백석이 살았던 20세기 초엽 평안북도 정주 지방 풍속도 설 하루 앞날인 작은설은 설날 못지않은 명절이거나 명절의 시작이나 진배없었으며, 밤이 깊어지고 설날이 다가올수록 온 집안이 붐볐음을 알 수 있다. 섣달 그믐날 저녁은 하루가 저무는 때가 아니라 설날의 실질적인 시작인 셈이었다.
 
어른들은 새벽에 일어나 음식을 장만해야 함에도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은 저녁을 먹고 나서부터 새벽닭이 울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하룻밤 사이에 무려 12가지 놀이를 즐긴다.(놀이로 본 조선) 아이들에게는 이때가 사실상 명절의 본령이었다. 새벽닭이 울 때도 자리다툼하는 놀이를 하고 나서야 잠에 곯아떨어진 아이들에게, 설날 아침은 부엌에서 시누이와 동서들이 북적거리는 부엌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가 잠을 깨울 때까지 단잠을 곤히 자는 한밤중이다
   
백석의 시에서 사람들로 흥성거리는장면은 설날뿐만 아니라 냉면 먹는 날에도 나타난다. 백석의 <국수>는 아주 추운 날이 되면 마을 집집마다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이 냉면을 준비하는 모습이 명절 분위기처럼 흥성 흥성 들뜨게그려진다.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산새)가 벌(벌판)로 날여 멕이고(활발히 움직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아이들)들은 여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김칫독 묻어두는 곳)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 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국수> 부분, 1941년 발표 
     
이 시에서 국수는 냉면을 말한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국수라고 하면 랭면’(냉면)을 일컫는다. 백석의 시에서야 펑펑 내리는 눈을 국수 가락에 비유했지만, 사실 끈기 없는 메밀가루로 면발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밀가루만큼 탄력이 없으니 반죽하여 면을 뽑으려면 고도의 공력과 많은 품이 든다.
 
거기다 동치미 김치가 익고 맛이 도는 계절은 춥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겨울의 한복판. 백석의 고향 평안북도는 함경남북도와 더불어 한반도에서 추위가 매섭기로 악명 높다. 더욱이 집안 살림마저 궁핍하다. 그럼에도 눈이 많이 올수록 아이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냉면 육수와 꾸미로 쓰일 꿩을 잡으러 다니고, “가난한 엄매는 기꺼이 별식을 장만하러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백석의 시에서, 냉면 같은 고유 음식이나 설 같은 명절이 상징하는 전통은 이처럼 자연스럽고 수월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대개 전통이라는 것이 별스러운 노력도 없이 그저 이어져 오는 것인 줄 알지만 백석의 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 사발의 냉면이 만들어지려면 엄매와 아이들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냉면의 길다란 면말은, “먼 녯적 큰마니(할머니)먼 녯적 큰아바지(할아버지)에게서 로 면면히 이어지는 전승과,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의 이웃 간 어울림이라는 시공과 종횡의 넘나듦이 있어야 한다.
 
4계절 자연의 운행을 통과하는 메밀의 생육과 동치미김치의 숙성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냉면 한 그릇이 등장할 수 있다.
 
이처럼 전통이란, 세대와 세대를 잇고 울타리와 울타리를 넘는 구성원들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노력과 협력을 통해서 계승하고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쉽게 끊어질 듯한 메밀국수 면발을 끊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힘겨움이 상징하는 전통은, 근대와 함께 삶의 양식이 통째로 바뀌고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고 도시 개발이 진행되면서 설 자리를 잃어야 했다.
 
사람들은 도시로 돈 벌러 떠나야 했고 식민 체제는 전통 풍습을 미신이라고 배격했다. 일제는 원단(元旦: 한 해 첫날 아침)’으로 불리던 으뜸 명절인 설을 이중과세라는 이유로 없애고 자신들이 지내던 양력 설과 통폐합해 버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설날이 명절 지위마저 빼앗긴 채 구정으로 격하된 수모는 무려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백석이 장성했을 당시에도 이미 전통은 파괴되거나 사라지고 있었다. 시인에게 풍요로운 명절 풍습이나 겨울철 별식을 즐기는 일은 그가 아이였을 때에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백석의 시에서 명절의 풍성함이나 냉면을 위시한 음식에 탐식하는 어린 남자 아이가 화자로 단골로 등장하는 것은, 시인이 세상 물정을 아는 어른이 된 당시에 그런 시절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의 풍성한 식탐을 즐겨 회고하는 백석의 시는 겉으로는 더없이 풍요롭고 포근하지만 그럴수록 외롭고 쓸쓸한 실상을 감추지 못한다. 백석이 시를 쓸 때 유년기의 전통은 벌써 죽은 과거가 되어 있었다.
 
전통으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타파해야 구습이나 케케묵은 유습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중에는 힘겹게 지켜온 삶의 소중한 가치를 뒤엎으려는 세상의 도전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것도 있다. 근대화 바람이 몰아치고 제국주의 침탈을 받던 시대에 전통을 기억하고 되살리는 시인의 작업은 그만큼 혁신적인 의미를 띠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세상이 또 달라졌으며 전통을 잇는다는 것에서 혁신은커녕 대단한 의미를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개혁이나 저항의 적극적인 의미를 읽어내기는커녕 여성의 노동력과 감정을 착취하는 원성의 표적으로 전락한 오늘의 명절에서 보듯, 전통이라는 것들은 오히려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는 훼방꾼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 전에는 그 반대의 의미를 띤 시절도 있었다는 것만큼은 기억할 만하다.
 
iCOOP소비자활동연합회 시민기자단 블로그에 게재된 글을 손본 것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기사입력: 2017/02/01 [10:07]  최종편집: ⓒ 대자보
 
관련기사목록
[문화] 대학캠퍼스에서 열리는 혜민스님의 마음치유법 이형호 2017/11/16/
[문화] "세계 최고를 향한 도전과 집념, 죽도록 해야“ 이형호 2017/11/10/
[문화] 소설가 이외수, 인권대상 수상..체육 부분 야구인 양준혁 김철관 2017/11/04/
[문화]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낯선 뒷모습을 보다 김철관 2017/10/14/
[문화] 복잡한 호칭, ‘님’과 ‘씨’로 단순화하면 어떨까? 류상태 2017/08/25/
[문화] 중국국기를 단 선박은 두만강을 자유롭게 항해? 김철관 2017/08/08/
[문화] 백두산 북파로 가는길... 땅 속 온천수 눈길 김철관 2017/08/03/
[문화] 1442계단으로 올라가 본 서백두 '천지' 모습 장관 김철관 2017/07/31/
[문화] 윤동주 시인 '서시' 필사본과 규암 김약연 선생 김철관 2017/07/30/
[문화]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 같은 고향 '절친' 김철관 2017/07/27/
[문화] 중국 향신료 들어가지 않은 연길, '현지식'은 꿀맛 김철관 2017/07/25/
[문화] "행복과 기쁨 주는 입체감 넘친 만다라 작품" 김철관 2017/06/24/
[문화]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도>가 인천시에 있다? 김철관 2017/06/14/
[문화] 강남에서 온 제비 어디있나? 김철관 2017/03/28/
[문화] “채식해야 건강도 지키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김철관 2017/03/21/
[문화] 자식 교육에서 소외된 아빠, 변화는 언제쯤 정문순 2017/02/27/
[문화] 2017 월간 현대시 사숙 시창작 강의 이준희 2017/02/19/
[문화] 명절과 냉면 가락의 공통점을 아시나요 정문순 2017/02/01/
[문화] 지하철 임산부 전용 좌석을 보면 섬뜩하다? 이수영 2017/01/31/
[문화] 한 교육지원청, 새해 미술치료로 직원역량강화 연수 김철관 2017/02/02/
최근 인기기사
  개인정보취급방침대자보소개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우) 120-093 서울시 영등포구 버드나루로 80 제일빌딩 별관 4층 TEL: 070-4411-5452ㅣFAX: 02-6280-5462 (web@jabo.co.kr / c.p: 010-2249-9446)
대자보ⓒ1998-2017 ㅣ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아00133 2005.11.11ㅣ 발행인 겸 편집인 : 이창은,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경주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대자보' 가 생산한 저작물은 정보공유라이센스 2.0 : 영리금지 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