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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가 보여준 남자 문인들의 추태
[2017년, 바꾸어야 할 문학1] 성폭력 문인 퇴출 없이 문학계 자정 없다.
 
정문순   기사입력  2017/01/02 [12:00]

노인과 어린 여자아이의 성애를 다룬 문학은 꽤 있다. 몇 년 전 개봉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마르케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한국에서도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은교>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인과 여자 아이의 사랑을 다룬 소설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만, 출간 당시 <은교>가 준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은교>를 다시 떠올리는 건 문단 성폭력이 고질적인 폐해임을 확인해 준 저자 박범신 때문이다.
 
내일모레 관에 들어갈 나이의 늙어버린 남자와, 중년을 향해 늙어가는 남자가 교복 입은 여자아이의 몸을 서로 차지하고 싶어 싸우고 질투하다 끝내 죽음으로 귀결했다는 <은교>의 줄거리는 흔해빠진 이야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처럼 서로 아주 가까운 사내들이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밀고 당기는 연적으로 탈바꿈하여 죽음도 불사한다는 내용은 인류의 보편적인 서사 중 하나이지만, 둘이 다투는 먹잇감인 여자의 나이를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다.
 
자신의 필명처럼 쓸쓸하고 고요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상한 작가이자 문단을 대표하는 위대한 문호로서 떵떵거리는 위엄을 누리고 있는 적요라는 인물은, 중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신의 육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은 몸을 갈망하는 용광로처럼 들끓는 욕망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요는 아들과 진배없는 애제자 지우조차 자신과 똑같이 교복을 입은 몸을 탐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양보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제자는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하려는 스승의 의도를 알아차리자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 스승도 얼마 뒤 병 치료를 중단하고 스스로 죽음에 드는 등 두 남자의 죽음을 통해 젊음, 정확히는 영계를 향해 이글거리던 욕망은 소진된다.
 
박범신은 아주 늙은 것과 덜 늙은 것들이 젊음을 희구하고 여자의 몸을 갈망하는 데는 사람의 감각기관을 총동원하는 기교를 능란하게 부리지만, 정작 두 남자의 욕망이 집결하는 은교라는 인물의 형상화에는 적지 않은 부족함을 드러낸다. 소설에서 은교는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며 구체적인 실감이 거의 느껴지지는 않는 캐릭터이다. 수시로 적요의 서재를 들락거리는 은교의 생활부터 고등학생의 일반적인 생활리듬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은교는 소설에서 영민한 애라고 거듭 강조되고 있지만, 고등학생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언행이나 사고 수준은 초등학생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철이 없고 유치하다. 심지어 나중에 대학생이 된 후에도 죽은 적요를 언급할 때 타인 앞에서 할아부지라고 말하는 말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영화 <은교>의 포스터     © 정지우 필름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은교가 지우를 살갑고 친근한 삼촌 정도로 대하면서도, 무슨 생각으로 남자로 느끼지도 않는 지우의 변태적이기까지 한 성적 요구에 고분고분히 응하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할아부지로 그토록 친애해 하는 적요의 서재에서 지우와 관계를 갖는다는 설정이 은교의 입장에서 가능하긴 할까. 응한다는 표현도 부적절할 정도로 은교는 소설에서 아무 생각도 없는 무존재인 양 그려지고 있다. 또 나중에 적요가 죽은 뒤 그가 남긴 글에서 자신에 대한 성적 갈망을 읽고 나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자기가 뭐가 대단하냐고란다. 적요가 자신을 원한다는 걸 알았다면 기꺼이 몸이라도 줄 수 있었다는 것인지?
 
소설에서 은교는 살과 뼈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니다. 은교는 단지 적요가 혼자 꿈꾼 공상에 불과하며 그럴 때 은교는 늙은이의 일방적인 상상에다 옷만 입힌 존재일 뿐이다. 은밀한 성교라는 의미의 은교라는 이름조차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어린 여자를 탐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는 사내들의 지저분함을 합리화하고 있다. 은교의 인물 형상화는 미성년 여자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박범신의 행각이 드러난 후 그의 시각을 의심할 필요는 없어졌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죽음과 맞바꿀 정도로 늙으나 젊으나 사내라는 동물들의 욕망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인데, 굳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덜 늙은 한 명은 욕망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고, 더 늙은 한 명은 끝내 그렇지 못했다는 것. 늙은이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는지 오직 꿈이나 상상 속에서 은교의 몸을 충족하고자 한다.
 
작가는 나이가 아무리 들거나 눈만 감으면 송장이라도 남자가 젊든 어리든 여자를 탐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어린 여자의 몸을 탐하는 데 환장한 수컷들의 욕망을 합리화한다고 해도 이건 정말이지 부당하다. 아무리 뜯어봐도 은교는 두 사내들에게 바닥까지 낱낱이 대상화됐을 뿐 자신의 주체적인 욕망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은교는 늙었거나 늙어가는 것들이 어린 여자 몸을 통해 자신의 늙음을 거부하고 싶었던 사내들의 회춘 수단이었을 뿐이다. 여성의 욕망을 감안하는 것은 애시당초 작가의 능력 밖 일이거나, 아니면 작가는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다.
 
적요처럼 사랑이나 연애로 포장하고 있지만 상대를 배려할 생각 없는 혼자만의 짝사랑이든, 지우처럼 사랑이나 연애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은 어린 여자를 차지하고 싶은 자신의 탐욕에다 스승에 대한 질투심에 눈이 멀어 미성년 여자아이의 몸을 탐하는 것이든, 둘의 사고나 행태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을까. 상대방과의 감정 교류가 전혀 없는 철저하게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는 둘은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으며 스승과 제자는 서로 싸우면서 닮아갔다는 점을 모른다고 작가에게 타박하는 것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박범신은 둘 다 죽는 파국을 통해 수컷들의 전쟁은 비극이요 덧없음을 나타내기는 한다. 그러나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농락을 수컷의 본능이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욕망으로 합리화한다는 비판은 피해갈 수 없다.
 
박범신과 달리 모든 여자가 은교처럼 자기 주관도, 줏대도, 성적인 자기결정권도 없이 살지는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을 든 10대 여성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영민하고 똑똑한지 알려주는 주이란 같은 여성작가를 보면, 박범신 부류의 남성 작가들과 천양지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나라 문인의 전부가 미성년 여성을 함부로 다루지 않음에 조금이나마 위안 받고 싶지만, 지저분한 상상력밖에 갖추지 못한 자가 대가인 양 대접 받는 것은 이 나라 문학의 수준을 증명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의 지저분한 상상력이 소설에서만 그치지 않음을 확인해 준 것이 2016년 문단이었다. 박범신의 소설적 상상력이 소설 안에서만 놀았으면 좋았으련만 실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에서 작품과 작가, 작품과 현실의 상관 관계라는 오래된 문학 주제가 떠오른다. 나는 창작물의 작가와 그 작가의 실제 모습을 동일시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박범신을 포함하여 추태를 부린 남자 작가들에 관한 한 그렇게 주장하기 힘들다는 것에서 낭패감을 맛본다. 한 출판인이 폭로한, 여고생들이 다니는 거리에 차를 대놓고 그 안에서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관찰하며 ““교복과 허벅지 등에 대해 신체적인 감탄을 했던”” 박범신의 실체는 은교의 몸을 탐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노작가와 한 치의 틈도 없다. 적요는 박범신이 만든 허구적 캐릭터가 아니라 그의 분신이었을 뿐이다.
 
그 따위 소설을 쓸 때부터 알아봤어.” “사람 됨됨이가 저 모양이니 그런 글이나 쓰지.” 등 작가의 행적을 잣대로 작품을 평하거나 작품으로 작가의 인성을 유추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이 옳을 수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슬프다. 무의식이니 저자의 죽음이니 하는 온갖 세련된 이론들을 일거에 흙더미로 만들어버린 채 작가=작품이라는 저급한 등식이 부동의 진리일 수 있음을 확인해 주는 현실은 허망하기까지 하다.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함으로써 문학의 폭을 좁히는 저급한문학이론이 틀리다고 반박할 수 없음을 입증해 주는 한국 문학계의 수준을 안타까워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약자에 대한 성폭력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거벗은 채 추구하는 박범신 같은 자들이 문단에서 더는 발을 붙일 수 없도록 자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 나라 문학 수준을 올리는 일은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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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1/02 [12: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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