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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헤 '하야'만으로는 위험하다
[정문순 칼럼] 권력재창출 위기의 수구세력 반대에 힘을 모아야
 
정문순   기사입력  2016/11/10 [12:12]

박근혜 대통령 물러가라는 목소리가 연일 뜨겁다. 분노와 절망으로 보낸 지난 4년을 생각하면 철권 통치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식물 대통령으로 스러지고 있는 현실이 비현실 같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다. 
 

▲ 박근혜 하야 보다는 박근혜·새누리당이 상징하는 수구세력을 갈아치우는 데 시민의 동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 정문순

그러나 한편으로는 벼락같이 주어진 이 기회가 염세주의자에 가까운 나로서는 왠지 불안하기도 하다. 국민의 뜻을 거스르던 정권이 몰락할 것 같던 기회는 가까운 몇 년 사이에 여러 차례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국 때 이명박 정권도 그랬고, 이 정권의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쇠고기 정국 당시 서울에는 100만 개의 촛불이 출렁거렸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처음에 청와대 뒷동산에 올라가 촛불을 보며 반성을 했노라고 몸을 사렸다. 임기 초반부터 대형 사고를 친 정권이 오래 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리에 나온 우리들은 ‘불통’ 대통령을 풍자하며 시위를 놀이처럼 즐겼다.
 
세월호 침몰 때는 그보다 더한 기회였다. 세월호와 함께 박 정권도 꼼짝없이 침몰할 줄 알았다. 눈앞에서 국민들의 목숨도 못 구하는 정권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의 경우 박근혜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전사에 비하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국민들이 광우병에 걸릴 일도, 국민이 목숨을 빼앗기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이 세월호 참사보다 심각할 수 있단 말인가. 세월호 때도 잠잠하던 대구·경북이 들고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집권자의 권력 행사 방식이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박 대통령이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고 해도 이 정도로 국민이 반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박 대통령은 계엄령만 내리지 않았을 뿐 4년 내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썼다. 그러나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 받은 자가 권력을 함부로 행사한 것은 차라리 참아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게 나라냐?”라고 흥분하는 사람들 중에는 권력자가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권력을 남한테 떠넘겨줌으로써 자신이 권력을 덜 쓰는 것에 분노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민주주의 학습이 부족한 사람은 ‘독재’의 의미에 대해 권력자가 힘을 무리하게 쓴 것 정도로 이해하는 습성이 있다. 중년 세대의 박정희 향수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 언저리에 있는 자들은 권력을 잡고, 키우고, 유지하는 데 목숨을 걸었다. 권력은 아비와 자식끼리도 나눠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이 만고의 진리로 통했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아들이 어미를 죽이고, 시아비가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가 손자를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형이 동생을 죽이고, 동생이 형을 죽이고, 동생이 형수를 빼앗고,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일은 권력 투쟁의 역사에서 다반사였다. 역사에서 골육상쟁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 아저씨가 조카를 내쫓지 않고 조카도 아저씨를 끝까지 높였던 주나라 성왕-주공의 사이가 오히려 비정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박근혜는 특이하다. 박근혜처럼 주어진 합법적인 권력을 자신이 쓰지 않고 아무 자격도 없는 엉뚱한 자에게 통째로 넘겨주거나 최소한 그와 공유한 것은 유례없고 예외적인 일이었다. 물론 박근혜 이전까지 역대 대통령들도 자기 곁에 비선 실세나 측근을 두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 욕구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것으로서 권력자는 측근의 권력이 자신을 능가하도록 커지는 것만큼은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범의 등에 올라탄 여우는 범의 활동 반경에 있을 때만 위세를 부릴 수 있다. 이런 통상적인 관례를 이탈한 박근혜의 비선 정치는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상례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당대는 물론 역사를 통틀어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굳이 찾자면, 진시황에 이어 2세 황제가 된 호해가 그나마 박근혜에 근접할 것이다. 호해는 태자도 아니었지만 진시황이 죽자 그의 유서를 조작하여 맏이인 부소를 자살하게 한 환관 조고의 손에 이끌려 옹립되었다. ‘지록위마’ 고사의 주인공인 조고는 간신 업계의 전설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호해는 조고의 도움으로 황제에 오른 날부터 조고의 손에 죽는 날까지 줄곧 한 사람의 허수아비였다. 그러나 호해가 핫바지였음은 누구에게나 표가 났겠지만, 국민을 쥐 잡듯 했던 대통령 뒤에서 수렴청정하며 대통령이 말과 사슴을 분간할 수 없게 한 이가 따로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몰랐다.
 
그러니 따져 보자. 시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박근혜인가, 박근혜 정권인가. 박근혜를 선택한 51.6%는 이제 박근혜 뿐 아니라 박 정권과 새누리당도 반대하기로 했는가. 한마음으로 박을 밀었다는 대구경북 사람들은 박근혜만 미운가, 새누리당에게도 배신을 느끼는가. 박근혜 하야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행사한 권력 통치 방식이 상궤를 벗어났다는 것 하나에 초점을 두는가, 아니면 집권 기간 누적해 온 반민주주의적 통치에 대한 반감이 이번 일을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인가.
 
대선을 1년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고 여당 대선주자로부터도 탈당 요구를 받고 있는 현실은, 박근혜를 내세웠던 이 나라의 지배 블록한테는 최대의 위기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시민들의 분노가 바지 대통령 한 사람을 넘어서는 것이다. 박근혜의 하야나 2선 후퇴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지배 블록 중의 한 축인 조선일보를 비롯한 종편들이 연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지면과 방송을 채우는 것은 박근혜를 자신들에게서 떼어내고자 함이다. 비선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 정치인으로서 박근혜의 실체를 애초에 모를 리 없었던 언론은 그의 본질이 들통 난 이상 꼬리를 자르기 바쁘다. 그들이 두려운 건 자신들로서는 박근혜의 정체를 더 이상 은폐할 수 없다는 사실과, 박근혜 게이트가 내년 대선에 미칠 영향이다. 정권 초기라면 어떻게든 수습할 시간을 벌어보겠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다.
 
정권 재창출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 국민적 저항을 받고 있는 대통령과는 하루빨리 결별해야 한다. 수구세력에게는 박근혜와 새누리당 친박 세력을 솎아내고 하루 속히 권력 질서를 정상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즉 박근혜와 새누리당 이전인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명박 정권은 권력을 비정상적으로 쓴 집단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미국 쇠고기 정국에서 100만 촛불 인파와 직면한 위기를 거뜬히 이겨냈고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비난은 잠깐이었고 위기도 오래 가지 않았다. 오히려 내공이 늘었고 비 온 뒤에 저력이 다져졌다. 그 동력을 몰아 한국 사회를 역주행하는 데 성공했고 정권 재창출도 이뤄냈다. 조선일보 등이 그리워하는 봄날은 이 시절이다.
 
박근혜 퇴진이나 2선 후퇴 목소리에는 의도가 불순한 이들도 끼어있다. 정권 연장을 희구하는 수구세력이 국민의 분노를 대변하는 양 스스로를 위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의 싸움이 보수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과분한 수구세력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구조조정하고 쇄신하는 기회로 귀결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시민들의 저항이 장기집권이 실패할 위기에 처한 권력집단에게 혹시라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지 않게 하려면 박근혜 반대만으로는 위험하다. 박근혜는 내버려둬도 처음이나 지금이나 정상적인 대통령이 아니며 수구세력조차 부끄러워하는 실패작이 되었다. 박근혜·새누리당이 상징하는 수구세력을 갈아치우는 데 시민의 동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박근혜라는 괴물을 낳게 한 역사적 책임만큼은 그들이 기꺼이 지도록 해야 한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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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10 [12:1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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