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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희생에 빚진 민족의 명절
[옛날 교과서 읽기] 교과서는 죽어도 명절 풍속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정문순

“추석이 되었습니다. 사과가 익어갑니다. 배도 익어갑니다. 내 마음은 그렇지 못합니다.” 명절 준비의 번거로움을 앞둔 친구가 지난 해 페이스북에서 이와 비슷하게 푸념했다. 친구의 발언은 40여년 전 우리 세대가 배웠던 국어 교과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
벼가 익었습니다.
밤도 익었습니다.
감이 익어 갑니다.
즐거운 추석이 옵니다.
<추석>, 초등국어 1-2, 문교부 제3차 교육과정(1973~1981) 
   
예전에는 밤과 감이 가을을 대표하는 과일이었겠지만 요즘은 단연코 사과와 배다. 명절을 앞둔 시장에는 홍로 품종의 햇사과와 신고 품종의 배가 무더기로 쌓여 있다. 올 여름, 과일의 생육을 방해할 정도로 맹위를 떨친 무더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선선한 바람에 자리를 내주면서 제수용 과일이 시장에 출하하는 데 도움을 줬다. 교과서는 이러한 자연의 순리를 사람이 만든 명절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때가 되면 알아서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추석이 되니 절로 밤도 익고 감도 익는다. 아이는 벼와 밤이 익고 감이 익어가면 즐겁다고 한다. 아이한테 추석은 왜 즐거운가?
 
아이는 곡식과 과일이 익으면 곧장 즐거운 추석을 떠올리지만 그것들이 추석 차례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물론 아이는 벼나 과일이 시장에 오기까지의 과정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장보기나 조리 과정은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의 머릿속에는 벼와 과일이 제 입에 들어오기까지 어머니의 노동력 투입 과정이 고스란히 생략되어 있다. 어머니가 명절마다 무엇을 하는지 목격했을 아이의 뇌리에 어머니의 명절 노동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건 문제다. 아이는, 즐거운 추석이 그저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 몰라도 되는 나이일까? 아이에게 사과, 배, 햇곡식만으로는 추석의 즐거움이 되기에 부족하다. 아이들에게는 먹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이 있다. 
 
어머니가 새 옷을 만드십니다.
우리들의 옷입니다.
추석에 입을 옷입니다.
아버지는 새 신을 사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신입니다.
 
옛날 여성의 명절 노동에는 차례 준비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입힐 추석빔이나 설빔을 만드는 일도 부가되었다. 옷 짓는 일을 낮에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자들은 낮에는 집안일에 전념하고 밤에는 몸에 쌓인 피로를 풀지도 못한 채 힘겨운 바느질을 해야 했다. 옷을 손수 짓는 시대라면 아이들에게 옷이 풍족할 리 없다. “우리들의 옷”이라는 구절은 꾸밈말을 배우는 단계의 교육과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대개 손위 형제에게서 헤진 옷을 물려받았던 시절, 명절에야 비로소 자기 소유의 깨끗한 옷을 가져볼 수 있었던 아이들의 마음이 묻어난다. 어머니가 짓는 옷은 다른 누구의 옷도 아닌 “우리들의 옷”이자 아무 날 입어도 되는 옷이 아닌 “추석에 입을 옷”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새 옷을 짓는 어머니의 힘겨움은 아이의 생각에 없다. 아이는 추석에 자신의 옷을 입는다는 즐거움밖에 없다.
 
새 신은 새 옷을 마련할 때 곁들여 구입하는 것이다. 내 어릴 때도 새 신은 새 옷과 더불어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 한 세트로 장만하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생활 소모품을 사는 것은 아버지의 역할이 아니다. 제3차 교육과정의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시내에 가서 새 신을 장만하고 돌아오는 내용이 나온다. 다만 명절은 평소와 다른 때이니만큼 이 교과서에서 아버지는 평소의 성역할과 다른 일을 해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새 옷을 ‘만들고’, 아버지는 새 신을 ‘사 오는’ 것은 아이한테는 또다른 성역할의 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교과서에서 옷과 신의 대비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비인 양 제시된다. 옷의 가벼움과 신의 무거움, 옷 제작의 비전문성과 신 제작의 전문성, 원시적인 자급자족 경제 행위로서의 만들기, 근대적인 경제 행위로서의 상품 구매 등이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에 포함되면서 서로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대비는 아이들에게 성별에 따라 역할이 다르다는 인식과 함께, 여성(어머니)을 남성(아버지)보다 열등하고 낮은 존재로 인식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노동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의 노동,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은 추석날 절정에 이른다. 아이가 손꼽아 기다려온 추석 당일 풍경. 
   
추석이 되었습니다.
새 옷을 입었습니다.
아침에 차례를 지냈습니다.
 
송편을 먹었습니다.
과일도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리들은 산소에 갔습니다.
모두 절을 하였습니다.
산소 옆에 꽃이 피었습니다.
들국화가 예쁘게 피었습니다.

 

▲ 옛날 교과서의 추석은 지금도 살아있다     © KTMC. Inc 제공
▲ 옛날 교과서의 추석은 지금도 살아있다     ©KMTC. Inc 제공


역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한다. 흡사 일사천리다. 추석날 아침에 새 옷 입고, 차례 지내고, 송편 먹고, 과일 먹고, 산소 가는 등 하루를 꼬박 소비해야 하는 모든 활동이 저절로 시계추 움직이듯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명절 활동을 여성의 노동력이 뒷받침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과 한 조각 깎는 일에도 여성의 손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명절에 얼마나 피곤한지, 차례 지내고 나서 다시 음식을 싸서 산소로 이동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아이는 관심이 없다. 차례 준비에 참여하지 않고 어른들 따라 차례상에 절만 하면 되는 아이에게 송편과 과일이 맛 없게 느껴질 리 없다. 어른들 성묘를 따라 갈 뿐인 아이에게 조상 산소는 들국화가 배경이 되어주는 풍경화일 따름이다.
 
사실 교과서의 아이 목소리는 교과서를 편찬한 남성 어른들의 목소리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의 지배적인 목소리다. 예나 지금이나 명절을 둘러싼 환경은 별반 바뀐 것이 없다. 여성들이 추석빔을 직접 만들지 않는 것 정도를 빼면 명절 풍경은 거의 요지부동 변하지 않았다. 교과서의 어머니는 4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에도 고스란히 살아있다. 명절은 남자들과 아이들뿐 아니라 모두가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희생이 명절을 즐거운 날로 만들어주는 이 완강한 고질을 끊는 일은 불편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해 주지는 않는다. 자신을 옥죄는 사슬이 대물림되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 여자들의 몫이다. 
   
※ ICOOP소비자활동연합회 시민기자단 블로그에 게재한 글을 조금 손본 것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기사입력: 2016/09/20 [12:58]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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