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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거부, 빚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초점] 앤드루 로스의 『크레디토크라시』, 부채거부와 대안경제 모색
 
권범철   기사입력  2016/06/09 [11:40]

책의 제목 “크레디도크라시”(creditocracy)는 역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채권자(creditor)의 지배(-cracy)를 뜻하며 이는 부채관계가 삶을 지배하는 사회를 가리킨다(때문에 이 책에서 크레디토크라시는 ‘부채의 지배’ 혹은 ‘부채의 지배 시스템’으로 옮겨져 있다). 아니 ‘사회’라는 말은 적절치 않을 지도 모른다. 부채가 지배하는 시스템에서 사람들의 삶은 상호 협력이 아니라 채무관계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사회라는 것은 없다”던 대처의 말이 실현되는 체제를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

 

▲ 앤드루 로스의 『크레디토크라시』, 부채거부와 대안경제 모색하고 있다     © 갈무리

부채의 지배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저자 앤드루 로스(Andrew Ross)의 말에 따르면 부채의 지배는 상품화를 넘어서는 단계에서 나타난다. 그러니까 “재화 각각의 구매비용이 부채로 조달될 수밖에 없을 때, 나아가 부채가 물질적인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기본적인 생활 필수재에 접근하는 데서도 전제조건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부채의 지배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부채의 지배는 부채가 삶의 전제조건이 된 체제, 부채를 통해서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체제다.

 

이것은 삶을 위해 필수적인 주택, 의료, 교육 등의 사회적 필요가 “부당이득자들이 수취할 경제적 지대의 저수지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즉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 공적으로 공급되지도 않고 소득도 증가하지 않아 빚을 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게 된 상황에서, 사회적 필요는 은행가와 채권자들을 위한 직접적인 이윤 축적의 장소가 되었다. 이제 부채는, 하트와 네그리의 말처럼 다중의 주요한 형상이 된 이 ‘빚진 자’들을 규율한다.

 

우리는 빚을 갚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고 –그것도 고분고분한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대체할 ‘빚진 자’는 널려 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대학을 가고 대학을 가기 위해 또 빚을 진다. 삶의 경로의 주요한 정거장마다 채권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빚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닐 것만 같다. 정확히 그 상태가 채권자들이 바라는 모습이다. “부채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그들에게 지워진 빚을 청산하리라는 기대도 청산하라는 권고도 받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채무를 청산한다면, 결국 우리는 채권자들에게서 더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연대보증인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채무 상환이 생의 마지막 날까지, 심지어 사후까지도 연장된다는 데 있다.”

 

부채거부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한 저자는 이러한 부채의 지배를 벗어나는데 일조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저자의 제안은 어떤 것인가? 먼저 “부채 지배의 현행적인 권력 장악이 종식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이 시스템의 정당성에 대한 관념부터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왜 빚을 갚을 필요가 없는지, 아니 갚아서는 안 되는지 설명한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힘든, 그러니까 독자를 설득하는 저자의 입장에서는 힘든 지점일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 한다는 고정된 사고방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지대를 추출하는 자들이 가하는 위해로부터 인민들을 보호할 수 없을 때, 채무부담이 자유 시민들에게 실존적 위협을 가할 때, 상환거부는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시민 불복종 행동이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심지어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 그러한 거부가 일종의 책무나 다름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정말 빚은 갚을 필요가 없는 것인가?

 

상환의 도덕률은 빚을 지고도 갚지 않는 자를 도덕적으로 나무란다. 그들은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자제력을 결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도덕적 심문의 방향을 대부자들의 탐욕”으로 돌릴 것을 주문한다. 예를 들어 빚을 내어 주택을 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집을 담보로 제공하고 대출을 받는다. 그러면 은행은 그 집에 저당권을 설정하고 이를 담보로 대출금을 회수할 권리인 주택저당채권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서 주택저당채권이란 “금융기관이 주택을 담보로 채무자로부터 미래에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여기까지는 쉽다. 그러나 채권-채무 관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주택금융공사는 은행으로부터 양도 받은 주택저당채권을 기초자산으로 삼아 주택저당증권(MBS)을 발행하여 자본시장에 판매한다. 빚을 받을 권리가 수익증권으로 탈바꿈된다. 간단히 말하면 은행은 채무자로부터 빚을 받을 권리를 다시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 중 위험한 권리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서브프라임(비우량) 대출- 를 슬쩍 끼워서 묶음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이렇게 은행은 채권자-채무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투자자가 개입함에 따라 투자자들에게 자신들의 책임과 위험을 떠넘길 수 있다. 그러므로 은행은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에게도 대출을 실행할 수 있다. 어차피 저당채권을 팔아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팔아버리는 것뿐 아니라 수익을 올릴 수 있고 위험은 제3의 투자자에게 떠넘길 수 있다. 그리고 “대부를 통해 꾸준히 수익을 올리기보다는 대출채권 판매로 조성한 자본을 재투자하는 편이 훨씬 더 수지맞는 장사”이다.


생각해보자. 집을 사기 위해 빚을 지는 일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은행에게 그것은 수익증권으로 판매할 수 있는 이윤의 원천이고, 증권 투자자에게는 고수익 투자처다. 누군가에게는 삶을 위한 선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낱 돈놀이에 불과하다면, 이를 통해 누군가는 삶 전체를 저당 잡히는 채무 노예가 되고, 누군가는 손쉽게 부자가 될 뿐이라면,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빚을 갚지 못한 혹은 갚지 않는 사람인가, 그걸 알고도 아니 그것을 이용해 돈을 빌려주며 “수지맞는 장사”를 하는 사람인가?

 

가계부채가 누적되는 과정에서 은행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렸고 “평균적인 미국 가정들은 2008년 이전까지 20여 년 동안 채무원리금을 상환하느라 세후 소득의 5분의 1 가량을 월가에 넘겨주었다.” 그러니 우리는 가계부채에서 이득을 본 자가 누구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을 되뇌며 물어야 할 것이다. “과연 누구의 자제력 결핍이 시민 전체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웠단 말인가? 약탈적인 지대추구 행위를 일삼은 자들이 도대체 누구였던가? 빚을 진 사람들에게서 수십 년 동안이나 부를 빼앗아 온 자들에게 더 이상의 부채 상환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빌린 돈의 몇 배를 저들에게 이미 돌려주었노라고 결론지을 수 없는가?”하고 말이다.


저자의 이야기는 부채를 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부채탕감 이후의 과제로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신용의 원리에 입각한 후속 경제체제의 건설이라는 녹록하지 않은 과제”를 설정한다.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신용”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우리가 은행들 수중에 넘겨주는 부당한 채무원리금 상환액 전부를 되찾아 진정으로 유익하고도 공동체 지향적인 방식으로 활용”할 것을 주문하며, 이를 위해 “공동 이익에 기초한 기관들로 전환된 신용조합과 은행들에 의해 제공되는 대안금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한 전 지구적인 부채 거부 운동, 신용협동조합, 지역사회개발조합, 공동체토지신탁, 공동제지원농업 등을 사례로 들면서 “상호부조적이고 비영리적인 데다 공통적인 것에 기초하면서 공동체 지향적이기도 한” 이 활동들은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 또한 광범위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재발명이다. 그것은 현재의 대의민주주의가 채권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체제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선출된 대표자가 시민이 아니라 긴축 정책을 강요하는 IMF에 복종할 때, 은행가들이 입법자들에 대한 로비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할 때, 대의민주주의는 크레디토크라시의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채무거부가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기 위한 책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저자는 2011년 겨울 튀니지에서 시작된 지구 곳곳의 봉기들에서 수평주의라는 공통의 특성을 발견해낸다. 그리고 이것이 당장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하기는 어렵다 해도 미래의 시민적 행동 규범으로 자리 잡아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요약하면 부채의 지배에서 탈출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경로는 빚에 대한 고정관념 탈피(상환의 도덕률 폐기)에서 시작하여 부채 거부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대안 경제와 민주주의의 재발명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대안 경제와 민주주의의 재발명을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대의제가 크레디토크라시(=부채의 지배)에 다름 아니라면, 민주주의의 재발명과 대안 경제의 구축도 다른 언어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과정이다.

 

부채의 거부는 그 시초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적인 시도는 어려울 뿐 아니라 효과적이지도 않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함께할 ‘빚진 자’들이 많다 –이는 분명 부채의 지배에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이다- 는 것이다. 당장 그것이 어렵다면 보다 쉬운 방법도 있다. 저자는 부채거부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열거하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문구로 그 목록을 채워줄 것을 요청한다(31쪽). 이에 응답하는 것 또한 저자가 제안하는 경로를 따라갈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일 것이다.

 

* 글쓴이는 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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