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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은 좋은 영화가 아니다
[정문순 칼럼] 망자의 넋은 쉽게 달래지지 않는다
 
정문순   기사입력  2016/03/24 [11:52]

상업성을 포기하고 예민하고 무거운 사회 문제를 제기한 영화들 중에는 제작 과정이 순탄치 않거나 개봉의 어려움을 겪는 것들이 많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을 다룬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가 개봉됐을 때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돈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를 냉정하게 품평하지는 말자”고. 그런 말을 평론가들이 모두 지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평론가의 날선 시각에서는 모자라거나 성에 차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상업영화가 흉내 낼 수 없는 미덕이 있는 영화라면 “봐 주는” 게 옳다는 주장에 아무런 이견이 없어야 하는지 나는 궁금하다.
 
이른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영화들, 지역의 시민단체들이 다투어 상영하고 공동체 상영도 하면서 꼭 봐야 하는 것이 숙제처럼 인식된 영화들은 한 해에도 몇 편씩은 세상에 나온다. ‘몇 편’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숫자다. 영화광한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1년 통틀어 극장에 한 번도 발걸음하지 않을 때도 있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매우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 영화들 중 상영 당시 일으킨 파장과 비교하여 시간이 지나도록 강렬한 잔영을 지속한 게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5.18 광주항쟁을 정면으로 조명했다는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있었다. 인물 구도나 구성이 참 어설펐던 영화였다. 특히 애인과 더불어 항쟁에 참여한 여자 주인공이 영화 마지막에 “자신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관객에게 노골적으로 구걸하다시피 하는 대목은 참으로 거슬렸다. 영화를 잘 만들었으면 굳이 주인공이 영화 밖으로 튀어나와 애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작품성은 그렇다 치고 그 영화가 사회적으로 남긴 역할은 평가할 만할까.
 
국기 하강식에서 시위대의 애국가 합창 직후에 자행된 계엄군의 발포, 유혈 진압을 반대하는 군인, 동료나 어린 학생은 피신시키면서 자신은 도청에 최후까지 남아있던 시민군 등 5.18항쟁이 주는 감동이 대중의 관심을 반짝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화려한 휴가>가 나왔다고 해서 광주의 비극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그 이전과 조금이라도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광주는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렀어도 여전히 고립된 섬이며 TK정권에 의해 내팽개쳤진 상태다.
 
독립영화 중 수작으로 평가 받는 <지슬>도 경우가 별로 다르지 않다. <지슬>이 아무리 나라 밖에서 온갖 영화상을 휩쓸었더라도 이전 정부에서 겨우 공식적으로 복원해 놓은 4.3항쟁의 정체를 권력이 정반대로 왜곡하는 횡포를 털끝만큼이라도 저지할 힘은 없었다. 그건 물론 영화의 잘못은 아니다. 한 편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책임져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 피난을 포기하고 집에 남아있던 노인이 토벌대에게 산 채로 불에 타죽는 끔찍한 학살을 당한 후에 곁에 남겨진 감자를 아들이 가져다가 토굴 속 피신자들에게 나눠 먹이는 장면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떤 자식이 감자가 불에 구워진 내력을 알면서도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일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죽은 자의 희생이 산 자의 생존을 돕는다는 억지 설정에 꿰맞추기 위한 무리수로밖에 볼 수 없었다.
 

어렵게 세상에 나온 영화라는 이유로 관람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꼭 봐야 할 영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는 영화 한 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하는 시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영화가 사회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 한 편이 완강한 사회구조에 틈을 내는 데는 무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한 편에 각별한 사회적 위상을 담는 태도에 나는 수긍하기 힘들다. 영화 한 편이 할 수 있는 일은 '막장' 드라마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영화를 보는 첫번째 기준은 작품성이어야 한다. 잘 만들었으면 많은 이들이 관람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흠결이 많다면 비판을 받거나 외면을 당하는 것도 감당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위안소 생활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첫 영화에 들어가는 <귀향> 역시 이런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기꺼이 재능기부를 한 배우나 스텝들의 미담에도 불구하고 <귀향>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누릴 자격이 있을 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귀향>은 많은 부분에서 조바심이 드러나거나 타이틀에 집착하는 태도를 숨길 수 없는 영화다.

 

영화에서 위안소나 전장 터는 실감을 전혀 느낄 수 없게 그려졌다. 위안소가 있는 중국이 낯선 외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주인공 정민의 고향 ‘밀양’이 더없이 친근하고 다정하게 묘사된 것과 극명히 대조적이다. 국내를 묘사하는 데는 특별히 돈이 많이 들지 않지만 이국으로 설정된 배경을 그럴듯하게 담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칠 수 있다. 일본군이 치른 태평양전쟁이 전쟁 같지 않게 유격대 수준의 소수 비정규군과 싸우듯 유치하게 묘사된 부분도 제작비가 부족한 탓이라고 칠 수 있다. 

 

 

▲ 귀향의 한장면     ©김철관

 

문제는 영화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무거운 주제를 제대로 감당할 여력이 없다는 점이다. 전시 성노예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인류 역사가 존속하는 한 잊어서는 안되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범죄다. 그 천인공노할 흉악함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자체로 충격적이기 이를 데 없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소재의 무게에 압도되었기 때문인지 충격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백병전이 등장하고, 갑자기 ‘빵’ 하는 총소리가 나고, 툭 하면 사람을 칼로 난자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은 무거운 소재를 다룰 역량이 부족하여 엉뚱한 방식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충격을 전달하고 싶었던 영화의 꼼수에 불과하다. 이런 점은 감독의 역량을 물어야 할 일이지 예산 핑계를 댈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귀향>의 가장 큰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넋을 상징하는 수많은 나비 떼가 씻김굿이나 해원굿을 통해 귀향하는 행렬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그들의 한이 풀어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대목이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한 나비 행렬이 어색하고 생뚱맞은 것은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넋이나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이들의 소망이 강렬히 투사된 것에 불과할 뿐이지, 그들의 한이 그렇게 쉽게 풀리겠는가.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영화가 해원을 말하는 것은 아직은 너무 성급하고 경솔하다.
 
따지고 보면, 산 자가 망자의 넋을 달래는 제의 의식은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의 응어리를 풀기 위한 것이다. 영화에서 굿은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넋을 불러내어 고향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친구 대신 살아남았던 위안부 피해자가 자신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평생 동안 숨겨온 죄의식을 씻어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오랜 세월 그들을 잊어버렸던 우리들의 죄책감을 달래는 역할을 하기까지 한다. 그런 점 때문에 내게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만큼 이야기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나 하는 영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많은 이들의 기부와 응원이 만든 <귀향>은 사적인 소유물이 아니며 일종의 공공재나 다름없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도 그 정도밖에 만들지 못했다면 제작자와 감독의 책임의식 결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귀향>은 시대를 잘 만난 덕분인지 흥행 요소를 찾을 수 없는 저예산영화 치고는 이례적으로 300만 명 이상이 찾은 영화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본과 해서는 안될 합의를 덜컥 해버린 박근혜 정부를 움직일 힘은 터럭만큼도 없다. 영화가 극장에 걸려있는 지금이야 사람들은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듯이 기대하지만 극장에서 내려오는 순간 사람들의 기억은 퇴각하거나 다른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갈 것이다. 물론 잘 만든 영화라면 사람들에게 아픈 역사에 대한 해원을 쉽게 말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관객들이 흘리는 눈물에 행여나 죄책감 해소나 카타르시스가 담겨 있지는 않은지 나는 걱정스럽다.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만큼 다루었으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나찌의 유대인 박해를 마르고 닳도록 재생산하는 미국 영화에서 보듯 인륜에 도전한 범죄를 조명하는 것은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으며, 해원, 용서, 승화 등이 있을 수 없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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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3/24 [11: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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