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고구려 혜관스님, 일본 나라시 반야사를 창건하다
[일본속 한국문화의 숨결] 삼론종 시조로 추앙 받는 고승대덕의 자취
 
이윤옥   기사입력  2016/01/10 [11:30]

나라(奈良) 반야사(般若寺, 한냐지)의 수선화는 한 겨울인데도 곱게 피어 있었다. 어제 9일(토) 오후 3시 찾아간 반야사는 주택가 언덕길을 막 벗어난 곳에 동백과 수선화를 품고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반야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에는 사람들이 늘 바글거리지만 반야사를 찾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반야사에 머무는 동안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낡은 카메라를 든 노인들뿐이었다. 아마도 겨울 수선화를 찍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 같았다.

 

▲ 나라시에 있는 반야사 전경, 왼쪽이 본당이고 오른쪽 탑은 목탑이 주종을 이루는 일본에서는 보기드문 석탑으로 13세기에 만든 것이다.     © 이윤옥

 

▲ 나라를 대표하는 동대사에서 10여분 거리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반야사     © 이윤옥

 

▲ 국보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마쿠라시대 누문     © 이윤옥


 
“나라산(奈良山) 아래 언덕 고즈넉한 곳에 자리한 반야사는 아스카시대에 고구려 스님 혜관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수도가 나라로 천도함에 따라 덴표 7년(735년) 성무왕(聖武天皇)이 헤이죠쿄(平成京)의 귀문(鬼門)을 지키기 위해 ‘대반야경’을 기단에 넣어 탑을 세운 것이 인연이 되어 절 이름을 반야사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헤이안시대에는 천여명의 학승들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으므로 학문사(學問寺, 가쿠몬지)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1180년 헤이케(平家)의 남도 공격으로 대가람은 재로 변하고 말았다.”
 
이는 반야사에서 만든 홍보물에 나온 이 절의 유래 가운데 일부이다. 천여 명의 학승들이 공부할 만큼 컸던 대사찰 반야사는 가마쿠라시대 무사들의 군웅할거와 함께 한줌의 재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이 유난히 안타깝게 들린 것은 특별히 이 절을 창건했던 고구려 스님 혜관(慧灌, 에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 아스카시대 고구려 혜관법사가 창건했다고 써놓은 반야사 홍보물, 붉은 글씨 부분     © 이윤옥


 

▲ 수선화 꽃에 싸여 있는 불상     © 이윤옥


 
 
혜관스님은 나라시대 남도 6종의 한 종파인 삼론종(三論宗)의 시조로 추앙 받는 고승대덕이다. 혜관스님이 일본에 건너와 불법(佛法)을 펼쳤다는 처음 기록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스이코왕 33년 (625)조에 ‘정월 고구려왕이 승려 혜관을 보냈다(正月、高句麗の王、僧慧灌を日本に遣わす)’라는 기록이다. 이 무렵 《일본서기》 에는 고대 한국의 고승들이 빈번하게 일본에 건너온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혜자스님이 건너와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스님은 5경과 채색 및 지묵(紙墨)과 맷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최초의 불교 통사인 《원형석서(元亨釋書)》에도 혜관스님 이야기가 전한다. 원형석서를 지은 승려 고칸시렌(1278~1346)은 양(梁) · 당(唐) · 송(宋)나라의 3대 《고승전(高僧傳)》을 참고로 《원형석서》를 지었는데 이 책에 혜관스님 이야기가 나온다.
 
“혜관은 고구려 사람이다. 수나라에 들어가 가상대사(嘉祥大師) 길장(吉藏)에게 삼론의 요지를 배웠고 스이코왕 33년(625) 을유년 봄 정월에 본국(고구려)에서 천거하여 우리 일본에 왔다. 칙명으로 간고지(원흥사)에 머물렀다. 그해 여름, 천하가 크게 가물었다. 왕께서 혜관에게 조칙을 내려 비를 빌게 하였다. 혜관이 푸른 옷을 입고 삼론을 강설하니 곧바로 큰비가 내렸다. 임금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그를 발탁하여 승정으로 삼으셨다. 그 뒤 나이슈우(河內)에서 이카미지(井上寺)를 창건하여 삼론종을 널리 폈다.”
 

▲ 반야사는 가을 코스모스와 겨울엔 수선화로 유명하다     © 이윤옥


 

▲ 반야사 본당에 이르는 길에는 불상과 함께 수선화가 활짝 피어있다     © 이윤옥


 

▲ 관서지방의 꽃절로 유명한 17번째 도량 반야사     © 이윤옥


 
1300여 년 전의 반야사는 천여 명의 학승이 있을 정도로 대규모 절이었을 테지만 오늘의 반야사는 작고 아담한 규모의 절이다. 절 입구 매표소에는 늙고 쇠잔한 할머니가 표를 팔고 있었는데 600엔을 내고 들어서니 본당으로 이르는 길에 활짝핀 수선화가 나그네를 반긴다.
 
반야사는 “일본 최고의 코스모스 명소”라고 알려져 있지만 수선화도 그에 못지않게 경내 구석구석에 활짝 펴 있어 사진 애호가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반야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일본 최고(最古)의 누문(樓門)과 중요문화재인 13중 석탑 등이 있지만 본당(대웅전)을 비롯한 경내의 건축물들은 모두 가마쿠라시대(1185-1333) 이후의 것으로 고구려 혜관스님 때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혜관스님이 맨 처음 이 땅에 대가람을 세운 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인으로서 감격스러움을 감출 길 없다.
 
이 세상의 상(相)이라는 것은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는 것이지만 그 터(址)라는 것은 천지개벽이 없는 한 그 자리에 여여하게 자리하는 것이 아니던가! 바로 그 반야사 터에 서서 실바람에 살랑거리는 수선화 꽃을 바라다보자니 1300여 년 전 고구려 땅에서 건너와 이곳에 대가람을 지으면서 일본에 불법(佛法)을 폈던 혜관스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 반야사 경내에는 나이든 분들만 드문드문 찾아오고 있었다     © 이윤옥


 

▲ 반야사 본당 앞에선 기자는 고구려 혜관스님을 떠올려 보았다     © 이윤옥


 

▲ 본당 앞에는 홍매화도 활짝 피어 있다     © 이윤옥


 
스님은 가고 스님의 조국 고구려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혜관스님의 발자취만은 여전히 반야사에 남아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 가슴 속에 한 떨기 수선화로 오래도록 남을 것임을 믿으며 반야사를 뒤로 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동대사에서 10여분 거리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반야사
* 찾아가는 길: JR 나라역에서 아오야마주택행(靑山住宅行) 11번 버스를 타고 10여분 가다 반야사정류장에서 내려 반야사(般若寺, 한냐지)쪽으로 5분 정도 걷는다.
( 버스 210엔, 택시 1400엔 정도)
 

이윤옥 소장은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고 이를 토대로 미래의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외대 박사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민족자존심 고취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밝힌『사쿠라 훈민정음』인물과사상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항일여성독립운동가 20명을 그린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도서출판 얼레빗
*발로 뛴 일본 속의 한민족 역사 문화유적지를 파헤친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기』 바보새 등이 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6/01/10 [11:3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