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IT사회문화미디어국제·과학여성환경·교육
전체기사 공지사항 사회단체알림마당 기고및토론방 편집회의실
편집  2017.06.25 [12:02]
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공지사항
사회단체알림마당
기고및토론방
편집회의실
개인정보취급방침
대자보소개
광고/제휴 안내
기사제보
HOME > 정문순의 문학과 여성 >
표절을 표절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자의 슬픔이여
윤지관의 <문학의 법정과 비판의 윤리-신경숙을 위한 변명>에 대한 반론
 
정문순

1. 문학의 일은 문단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윤지관 평론가가 신경숙 씨와 문학권력의 변호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보다 앞서 T.S.엘리엇을 앞세워 신 씨의 표절을 두둔했던 그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지 이번에는 장문의 글을 올리며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홈페이지에 게시한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표절 의혹은 문학 내부에서 다뤄져야 한다.

2

문구나 문장의 일부만 유사한 것은 표절이 아니다. 

3

신경숙은 <우국>을 베낀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활용했다.

4

<우국>을 제외한 신경숙의 다른 작품들도 표절의혹의 근거가 없다

5

문학권력은 죄가 없다


 
윤 씨는 문학의 일인 신경숙 씨 표절 의혹이 ‘문학의 법정’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불만이다. 표절 시비는 ‘문학의 법정’에서 다뤄져야 하는데 ‘현실의 법정’에서 대중들의 여론을 차단하지 못한 채 다루어졌다는 것이 윤 씨의 주장이다. 윤 씨는 표절 논의에서 언급된 책도 안 읽어봤을 일반 독자들이 언론의 선정성에 정신을 못 차리고 신 씨를 표절 작가로 낙인찍었다고 생각한다.
 
윤 씨는 이응준이 문학적 논의를 뛰어넘은 채 신경숙 표절 의혹을 여론재판에 회부했다고 죽일 죄인 다루듯 격하게 비난하며 문인으로서 자격을 걸고넘어지고 있다. 윤 씨가 말하는 여론재판이라는 것이 고작 언론 기고를 말할진대 이 씨가 문학적 논의, 즉 문예지를 통하지 않고 언론에 기고한 점을 못할 짓으로 규정하는 것은 윤 씨의 과민반응이다. 문학적 논의만 한 결과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나.
 
과거에 문학적 차원의 논의 또는 윤 씨 표현대로 ‘문학의 법정’에서 신 씨의 표절 의혹이 거론되었을 때 윤 씨는 뭘 했는지 묻고 싶다. 그 당시 신경숙 표절 혐의에 대해 가타부타 입도 떼지 않았던 윤 씨는 신 씨 표절 의혹이 ‘여론재판’에 회부되고 나서야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 표절은 차용이다?
 
구체적인 표절 시비로 들어가서, 윤 씨는 “[전설]의 그 문단이 [우국]이 없었으면 그런 표현(”기쁨을 아는 몸“이 포함된 성애 장면-인용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일부 문장의 이런 유사성으로 그 작품이 곧잘 표절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에서 다른 작가의 작품들의 내용이나 표현들을 빌려오고 활용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나며 문학에서 차용은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문제는 차용이 표절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일반인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문학에서 차용은 어설픈 베끼기에서 창조적 변용에까지 걸쳐있기 때문에 그 차용의 수준에 따라서 그리고 새로운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도에 따라서 판단은 달라진다. 일부 단어나 문장의 유사성을 따져서 표절을 판정하는 것은 좁은 시각으로, 문학의 자유로운 표현영역을 제한하고 언어적 학습과 문학적 활용의 복잡한 관계를 무시하는 결과를 빚는다."(윤지관)
 
의도적인 왜곡, 악의, 거짓으로 점철된 위의 주장들은 창비가 신경숙 표절 제기에 대해 처음 낸 반응과 동일하다. 창비의 사과 비슷한 발표는 독자들과 담을 쌓고 그들을 발 아래 내려다보던 문학권력이 ‘무식한’ 독자들의 힘 앞에 얼마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꼬리를 내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다. 윤 씨는 이런 사정을 깡그리 무시하고 독자의 분노를 일으킨 창비의 처음 발표를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윤지관의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자신의 작품에서 다른 작가의 작품들의 내용이나 표현들을 빌려오고 활용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거나 다반사로 생각하는 것이 표절 행위이며 문학에서 표절은 절대 인정되지 않고 있다. 남의 글을 빌려온 것이 표절이 아니고 차용이라고 주장하고 싶더라도 표절이나 차용의 기준은 분명하고 명백하다.
 
윤지관이 생각하듯 분명하지 않고 애매하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문학에서 차용은 원저작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패러디나 오마주에 국한하며 원저작의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원저자의 허락을 구하지 않은 어설픈 베끼기는 어디까지나 글 도둑질인 표절이며 이를 두고 ‘창조적 변용’ 운운하는 것은 글 도둑질을 합리화하는 기상천외한 변명일 뿐이다. 남의 작품을 베껴도 수준에 따라서 그리고 새로운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도에 따라서 판단은 달라진다고 하는 표절옹호론자들의 주장도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베낀 작품의 수준이 어떻든 완성도와 성취도가 아무리 높든 절도품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일부 단어나 문장의 유사성만 같은 것은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남의 집에서 일부 물건만 훔친 것은 절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으며, 문학의 자존심과 위엄을 땅에 곤두박질치게 하는 낭패한 결과를 빚는다. 문학적 표현이 아무리 자유롭더라도 남의 글을 마음대로 절취할 자유는 없다. 윤 씨가, 언어적 학습과 문학적 활용의 복잡한 관계 운운하는 어려운 말을 남발하는 것은 표절 논쟁에서 일반 독자의 참여를 제한하고 표절 작가를 두둔하려는 교묘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표절과 차용의 차이도 구분할 줄 모르는 윤 씨는 남의 것을 가져다가 더 아름답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발상에 빠져 있으며, 궤변을 합리화하기 위해 셰익스피어, 밀턴, 토마스 만, T.S.엘리엇까지 동원한다. 셰익스피어, 밀턴 등이 표절을 예사로 저질렀고, T.S.엘리어트가 뛰어난 시인은 훔친다고 말했다고 하는 윤 씨에게, 신경숙이 한 일이 나쁘게 보일 리 만무하다. 차용(윤씨는 ‘차용’이라고 썼지만 표절이라고 읽는다)을 해도 창조적으로 변용하여 훨씬 더 좋은 작품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윤 씨에겐 신경숙의 <전설>이 딱 그런 작품이다. 
 
3.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은 무죄?
 
이응준이 <우국>과 <전설>의 일부 닮은 문장만 표절의 증거로 내민 것이 불만스러운 윤 씨는, 오래 전 신경숙의 표절을 주장한 내 글을 엉뚱하게 해석한 것을 근거로 문장이나 문구의 닮음이 아니라 다른 부분을 통해 표절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표절을 가리려면 A(문장, 문구의 닮음)뿐 아니라 B(내용, 구성, 모티브, 인물 등의 닮음)도 따져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윤 씨는 A만으로는 부족하고 B까지 충족해야 표절이라고 곡해한 것이다.
 
윤지관의 생각과 달리 이 씨가 제기한 A는 표절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명백한 근거로 통한다. 이 씨의 글에 사람들이 들고 일어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만약 이 씨가 B를 증거로 내밀었다면 그만한 반응은 일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B는 논자에 따라서 조금이나마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B에 주목한다면 표절 혐의가 거론된 작품들의 닮음 여부를 가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 있다. 이 점에 기댄 윤 씨는 <우국>과 <전설>의 표절 혐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유사성을 부풀린다고 주장한다.
 
"표절 혐의를 주장하는 글들이 하나같이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장하는 것은 <전설>이 <우국>의 표절작임을 입증하려는 의도에서일 터다. 그러나 이 두 작품만큼 그 내용이나 사고나 감수성이나 문체 등 문학의 중심요소들이 그야말로 정반대인 작품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윤지관)
 
윤지관의 말대로라면, 장 발장이 성당에서 은촛대 몇 개만 훔쳤지 다른 것은 안 훔쳤으니 절도를 저지른 건 아니라고 강변하는 격이다. 남의 작품을 아예 필사하지 않는 이상 닮음보다 다름이 더 많은 건 당연하다. 특히 차이점이라는 것도 표절 혐의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원저작과 다르게 쓴 결과일 가능성은 윤지관의 머릿속에 없다. 윤지관의 위 발언을 비틀어 바로 잡으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표절 혐의를 부인하는 창비나 윤지관의 태도가 하나같이 차이점을 실제보다 과장하는 것은 <전설>이 <우국>의 표절작이 아님을 입증하려는 의도에서일 터다. 그러나 이 두 작품만큼 그 내용이나 사고나 감수성이나 문체 등 문학의 중심요소들이 그야말로 꼭 닮은 작품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우국>과 <전설>의 유사성은 문구나 문장, 문단 단위의 닮음에 그치지 않는다. 두 소설의 가장 심각한 닮음은 인물들이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20세기적인 사람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국>의 남자가 자살하는 이유가 고작 자신이 신혼이기 때문에 친위쿠데타 참여에서 제외시켜 준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이고, <전설>의 남자가 전쟁터에 자원입대하는 이유가 신혼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참전을 권하지 않고 입대해 버린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인 것은, 그들이 천황제의 충실한 신민이나 국가주의의 충실한 국민임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두 소설에서 남편의 행동에 순응하고 남편 따라 죽거나 평생을 수절하는 아내들의 행동도 똑같다. 죽음과 극단적 폭력을 미화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심성일진대 <우국>과 <전설>의 세계는 모두 개인의 목숨이야 초개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극우 파시즘에 경도된 사고를 보여준다.
 
소설 제목에서 보듯 신경숙은 전체주의형 인물들의 삶을 아름다운 ‘전설’로 미화하기까지 한다. 신 씨는 <우국>의 몇 가지 문장뿐만 아니라 파시즘 작가의 사상체계까지 고스란히 베꼈다. 고작 친구와의 의리 때문에 자살하거나 입대하고, 그렇게 죽거나 실종당한 남편을 따라 죽거나 평생 기다리는 여자들을 미화하는 미시마 유키오와 신경숙의 몰근대적이고 위험하고 촌스러운 사고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윤지관은 <우국>이 ‘사실적’이고 ‘동물적’이지만 <전설>은 ‘시적’이고 ‘식물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국>과 <전설>은 ‘야만적’이라는 측면에서 쌍둥이처럼 닮았다. 
  
 
4. 성공한 표절은 표절이 아니다?
 
윤지관 논리의 위험성은 <우국>과 <전설>이 닮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모자라 누가 더 뛰어나느냐를 재단하는 데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윤지관은 신경숙의 변호인으로 자처한 사람답게 용감하다. 그 유명한 “기쁨을 아는 몸” 구절이 나오는 대목이 표절이 아니라는 과감한 선언을 했다. 윤지관에게 <전설>의 문장이 <우국>과 닮았느냐 닮지 않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차용(‘표절’이라고 읽는다)해서 작품의 성취를 이루었으면 창조적 변용이고, 그게 아니라면 베끼기라고 단언한다. 훔친 것보다 훔치지 않은 것이 더 많으니 표절이 아니라는 태도도 문제지만 훔쳤어도 원작보다 잘 만들어놓아도 표절이 아니라는 윤 씨의 주장은 더 황당하다.
 
윤 씨의 주장으로는, <전설>이 <우국>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감정 속에 녹여낸 것이라고 한다. 장발장이 훔친 은촛대에 금을 입혀서 더 값비싼 물건으로 만들어놓으면 장발장은 도둑질 혐의를 벗은 것이라는 논리와 다름없다. 이러니 성공한 쿠데타는 쿠데타가 아니란 말이냐는 항변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윤 씨는 이런 반박에 굴하지 않는다. 윤 씨의 변론 결론이자, 표절 행위를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양질변화시키는 그의 변증법적 상상력을 미리 소개하면, “쿠데타는 성공해도 쿠데타지만, 표절은 성공하면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변신한다.”
 
윤지관은 신경숙이 “미시마를 차용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맥락 속에 기가 막히게 결합시켰”다고 한다. <우국>에서 저 유명한 “기쁨을 아는 몸”이 등장하는 성애 장면은 작품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지만, <전설>의 비슷한 대목은 여자가 실종된 남자를 평생 기다리는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남다른 의미를 부여 받는” 장면이란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를 평생 기다린 것이 “기쁨을 아는 몸”이 될 정도로 그를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인지는 의문이다. 여자가 남자를 기다린 것은 남자의 자원입대를 말리지 않을 정도로 순응적인 성격에 기인하는 바 크며, “기쁨을 아는 몸” 대목도 특별할 것 없는 신혼부부의 성애 묘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신경숙은 <우국>이 아니라 <우국>의 번역문을 표절했다는 점이다. 사실 <우국> 표절을 처음 제기한 나도, “기쁨을 아는 몸”이 김후란의 독창적인 번역이라는 것을 이응준의 글로써 비로소 알았다. 원문은 “사랑의 기쁨을 알다” 정도의 밋밋한 표현이라고 하는데, 번역자가 독창적으로 표현한 것을 그대로 옮김으로써 독자들이 자신의 발상으로 오해하게 한 신 씨의 작가적 양식은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신경숙이 미시마 유키오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윤지관은, 김후란의 번역과 신 씨의 문장을 비교해 볼 생각은 왜 하지 않을까? 윤 씨는 남의 독창적인 번역을 그대로 갖다 쓰는 것마저 ‘문학적 변용’이요, 탁월한 성취라고 할 참인가? 빼도 박도 못하는 표절의 증거로 지탄받았던 <우국>과 <전설>의 부분이 표절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윤 씨의 논거는 그동안 엉성한 논리를 이어온 그의 변론이 자가당착을 거쳐 논리파탄으로 귀결되는 대목이다. 도무지 편들래야 편들 수 없는 것을 변호하고, 옹호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하다보니 논리가 일그러지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신 씨의 <전설>이 <우국>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신 씨가 자위대 무장 강화를 외치며 자살한 일본 작가의 소설을 베낀 것은 표절이 아니라 차용이라고 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만한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작가가 나찌를 찬양한 독일 작가의 작품을 베끼더라도 훨씬 더 좋게 만들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윤 씨는 보는가? 이런 몰지각한 역사의식이 어디 있으며, 역사의식을 망각한 신 씨의 행동이 왜 문제인지 망각한 윤 씨도 몰지각하기로는 똑같다고 판단해도 좋을까? 
  
 
5. 표절은 혁신적 창작방법론?
 
마치 필사한 듯 베낀 작품을 보여줘도 표절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윤지관으로서는 문구나 문장 단위의 표절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제기된 신경숙의 표절 혐의를 인정할 리 만무하며, 신경숙이 마지못해 표절을 인정한 경우에도 문제 삼지 않는 건 당연해 보인다.
 
<딸기밭>이 유학생 고 안승준 씨의 유고집 중 여섯 문장을 표절한 것으로 드러났을 때 신 씨는 출처를 밝히지 않은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표절을 시인한 바 있다. 많은 표절 의혹 중 <딸기밭>은 신 씨가 남의 글을 허락 없이 가져왔음을 스스로 인정한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 물론 신 씨는 유족에게 누를 끼칠 것 같아서 출처 표기를 하지 않았다는 말로써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기 바빴다. 윤 씨는 이런 것조차 신 씨를 편들려고 한다. 윤 씨의 주장인 즉 문학작품에서 출처를 일일이 밝히는 일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각주들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복덕방의 매물 광고처럼 더덕더덕 붙은 각주가 보기 싫다면 남의 작품을 차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맞다. 문학이 학술논문과는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발상이 나왔다면 윤 씨의 어마어마한 특권적 사고를 나무라지 않을 수 없다.
 
윤 씨가 박철화가 표절 의혹을 제기한 <작별인사>를 거론하면서 “구조적 유사성과 이미지의 공통성을 표절이라고 본다면 아마도 역사상 수많은 작품들이 표절의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법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이르면 논리적 궤도 이탈이 수습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밀턴 등을 거론하는 것도 모자라, 모티브나 이미지 차용을 표절로 본다면 피카소, 고흐 등도 표절한 것이라고 하는 윤 씨의 주장에 굳이 반박할 필요가 있을까. 피카소, 고흐의 그림은 그들이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고 무엇에서 힌트를 땄는지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신 씨처럼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에서 ‘물’이라는 핵심 모티브를 자신의 소설에 가져오고도 시치미를 떼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벨이 울리고>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표절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신 씨가 루이제 린저를 표절했다면 루이제 린저가 이상(李箱)을 베꼈다는 말도 성립한다며 ‘물귀신’ 논법까지 동원하는 윤 씨 모습에서는 딱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지경이다.
 
윤 씨가 “차용을 넘어선 명백한 표절조차 문학창작의 한 유효한 방법”이라는 주장이 있다고 말할 때 인내심은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그것으로도 부족한지 윤 씨는 저작권 개념이 사유재산권이 인정된 자본주의 사회 이후에 나온 것인 만큼 표절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사적 소유권을 풍자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위험천만한 단세포적인 사고”(신경숙의 말)까지 넘보고 말았다.
 
근대문학의 위대한 작가들이 표절을 범죄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통찰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였고. 작가의 언어표현을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서 법이나 제도로 그 자유로운 활용을 윤리나 법으로 통제하려는 자본주의 규제 장치에 항거했다는 해석도 그래서 가능하다. (윤지관)
 
표절을 자본주의 사회의 소유권 개념에 저항하는 운동으로까지 보고 있는 윤 씨 덕분에 신경숙은 사적 소유에 저항한 반체제 예술인의 경지에 올랐다. 가히 막장 논리의 화룡점정일 것이다. 나는 그가 변론의 마무리로 도출한, “쿠데타는 성공해도 쿠데타지만, 표절은 성공하면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변신한다.”를 다음과 같이 바꾸고 싶다.
 
쿠데타는 성공해도 쿠데타이고, 표절은 성공해도 안 들킨 도둑질이다. 
   
6. 만신창이가 된 평론가
 
윤지관은 신경숙 표절 사건의 진원지로 주목되는 문학권력 비판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으로 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윤 씨는 2000년 대 초기에 이미 문학권력 비판의 목소리를 비판했던 논자 중 한 명이었다. 이 글에서 윤 씨는 당시 문학권력을 비판한 이들이 최근에 그때의 글자 한 자 바꾸지 않고 똑같은 시비를 걸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이런 주장은 윤 씨에게 먼저 적용해야 할 것이다. 당시 윤 씨를 비롯한 문학권력 옹호론자들은 문학권력 비판에 대해 푸코를 인용하면서 권력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냐고 응수하며 논점을 흐렸는데, 십 수 년이 지난 오늘 윤 씨의 주장 역시 그때의 재탕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창비 영인본 전집이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시절 한국 사회의 지성계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창비의 권력을 비판한 사람은 없었다. 그 창비가 2000년대라는 특정 시기의 문학 공간에서 상습 표절작가를 감싸주고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띄워주는 등 부당한 문학권력을 행사한다면 비판은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자들을 비판했더니 권력 자체가 문제란 말이냐, 또는 문단을 해체하라는 말이냐는 따위의 맥락 흐리기로 응수하는 윤지관을 비롯한 문학권력 옹호자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물론 변한 것은 있다. 15년 전에 비해 문학의 지형도는 크게 변했다. 추문이 문단 안에서 풍문으로만 떠돌다 묻힐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문학 현실을 자성하고 바로잡겠다고 해도 부족한 판에 현실감각이 없음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 한국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외면과 냉대, 이탈을 부추길 것 같아 걱정스럽다. 윤지관은 “만신창이가 된 한국문학을 추스르는 최소한의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는 비평가로서의 책임의식 때문”에 글을 썼다고 밝혔다. 그에게 만신창이가 된 한국문학을 걱정하기 전에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논지부터 추스르기를 권고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허탈하다. 그동안 신경숙의 표절을 옹호하는 발언은 더러 나왔지만, 윤지관의 글은 신 씨를 옹호하려면 얼마나 많은 무리수가 필요한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윤 씨가 신 씨의 결백을 주장하는 궁극적인 의도가 무엇일까. 그의 글은 궁지에 몰린 문학권력의 솔직한 속내를 대신 말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이 대놓고 말할 수 없었던, “신경숙의 표절을 거론하지 말라”라는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 아니냐는 말이다.
 
끝으로, 한국작가회의와 창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용산참사, 세월호 등에서 대사회적 발언은 거침없이 잘 하는 ‘정의롭고’ ‘반체제적인’ 작가회의가 집안 문제에서는 성명서 한 장 내놓지 않고 있다. 신경숙을 감싸기 위해 ‘무의식적 표절’이라는 ‘창조적인’ 조어가 나온 곳도 작가회의다. 윤지관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게시판에 올리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다. 그러나 작가회의 회원으로서 윤 씨가 글을 올린 것은 작가회의의 침묵이나 방조, 방관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신경숙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겠다고 한 후 침묵이 길어지고 있는 창비의 입장도 듣고 싶다. 윤지관의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윤 씨는 창비 출신의 비평가이다. 윤 씨의 의견을 전적으로 그의 개인적 의견으로 국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문에서 윤 씨의 발언을 인용하고도 출처 표기나 인용 표시를 하지 않은 것들이 있을 수도 있다. 표절에 대해 한없이 너그러운 윤 씨가 이해해 주리라고 믿는다.)
 
 
<부록 - 윤지관 문학용어 사전>
초등학교 시절 매달 나오던 월간 소년잡지의 알짬은 본책이 아니라 별책부록으로 딸린 만화책에 있었다.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인 윤지관 선생이 독창적으로 창조한 문학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부록으로 만들어보았다. 그의 기나긴 논지를 핵심적으로 갈무리한 것이니만큼 이 글의 본문을 다 읽기 귀찮은 분은 참조하시기 바란다. 
   

독자 또는 대중: <우국>과 <전설>을 읽어보지도 않고 여론의 ‘광풍’에 휩쓸려 신경숙을 표절작가로 오해하는 사람들
 

문학
1) 학술논문이나 정치와는 차원이 다르며, 독자적인 논리와 사법체계를 갖춘 성역
2) 구질구질한 각주 달기나 출처 표시 생략이 허용되는 특별한 위치에 존재하는 것
3) 성공한 표절을 통해 인류의 정신적 자산이 됨
4) 작가를 비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오직 작가의 양심에 의존하는 고차원적인 생태계
 
문학권력
1) 엄혹한 1970~80년대에 지성의 등불이 되었던 창비
2) 어려운 출판 환경에서도 꿋꿋한 문학정신으로 문학계의 버팀목이 되고 있는 창비,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등 대형 문학출판사
3) 2000년대 초기와 2015년, ‘문단 카르텔’ 소굴이라는 오해를 받은 집단
4) 돈만 밝히느라 신경숙의 표절을 일부러 덮었다는 모함을 받은 집단
5) 고은, 조정래 등 한국 문단의 거목들
 
문학권력 비판자
1) 문단에서 유난히 목소리 크고 힘이 세며 동료 작가에 대해 ‘고발’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
2) 언론을 등에 업고 ‘여론재판’에 호소하는 자
3) 신경숙에게 절필을 요구하는 자
4) 2000년대 초에 했던 묵은 주장을 15년 후 꺼내어 복창하는 사람들
 
미시마 유키오
1) 신경숙이 무의식 상태에서 다시쓰기 한 <우국>의 저자
2) 대단찮은 소설을 썼음에도 신 씨의 표절 대상으로 오해를 받으면서 지위가 격상된 작가
3) <우국>을 통해 신경숙의 ‘창조적 변용’ 능력을 입증해 준 작가
4) 기억력이 좋지 않은 신경숙을 괴롭힌 작가
 

신경숙
1) 상습적인 표절 작가로 억울하게 낙인찍힌 세계적인 작가이며 일방적인 ‘여론재판’의 피해자
2) 일본 극우 작가의 소설도 창조적으로 변용하여 걸작을 만든 탁월한 작가
3)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창조했음에도 터무니없는 표절 혐의를 받은 작가
4) 말재주가 모자라 정치인들이 잘 하는 변명 수준의 말(“<우국>을 읽은 기억이 안난다”)로 오해를 산 작가
5) <우국>의 표절을 인정한 적이 없는데도 인정했다고 모함 받는 작가
6) 경미한 교통사고 수준의 실수를 했음에도 절필 요구를 받은 작가
 

언론
‘여론몰이’의 ‘광풍’을 주도함으로써 대중들이 신경숙을 표절작가로 오인하게 만든 집단
 

조정래
한국의 문학권력이면서도 문학권력 비판자들에게 가담하여 신경숙에게 절필을 요구한 작가
 

차용
1) 이응준이 표절로 오해한 신경숙의 무의식적 행위
2) 신경숙의 표절 혐의에만 쓸 수 있는 용어
3) 신경숙에게 위대한 작품을 쓰는 동력으로 작용함
4) 현대문학에서 폭넓게 인정됨에도 ‘염결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표절로 오해하는 것
(참고: 표절)
 
ㅌ 
T.S.엘리어트
1) “똑똑한 시인은 베낀다.”라는 명언으로 표절에 대한 신개념을 정립한 20세기 영문학계 최고의 시인이자 문학이론가
2) 몸소 표절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말을 증명한 작가
 

표절
1) 남의 작품을 어설프게 베끼는 것. 잘 베낀 ‘창조적 변용’의 반대말
2) 남의 작품에서 일부 문장을 베끼는 것만으로는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 행위
3) 원저작보다 잘 만들기만 하면 혐의를 벗을 수 있음
4) 죄 없는 신경숙이 부당하게 받은 오해
5) 사적 소유권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물신주의에 저항하는 창작 방법
6) 셰익스피어, 밀턴, 괴테, T.S.엘리어트, 브레히트, 고흐, 피카소가 위대한 작품을 생산한 원동력 
  
* 이 글은 8월 4일 뉴스1에 게재한 기고를 손 본 것임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로 [한국문학의 거짓말-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작가와 비평, 2011)의 저자입니다.
 
기사입력: 2015/08/06 [19:39]  최종편집: ⓒ 대자보
 
관련기사목록
[문학] 학생운동권 출신 법조인의 시집 눈길 김철관 2017/01/26/
[문학] 소설 <은교>가 보여준 남자 문인들의 추태 정문순 2017/01/02/
[문학] 철도원 24년, 삐라만 만든 줄 알았는데 시인이었다 이한주 2016/11/18/
[문학] 노출 복장, 남자 즐기라고 입지 않는다 정문순 2016/08/04/
[문학] 추억의 교과서에서 삶을 발견하다 정문순 2016/06/22/
[문학] "정부가 나라를 미국과 중국 장기판의 '졸'로 만들었다" 이진욱 2016/02/29/
[문학] '관계론' 철학자 신영복의 함정 정문순 2016/02/13/
[문학] 조계사 시화전 연 대안 스님 시집 눈길 김철관 2015/10/10/
[문학] 박쥐들의 날갯짓? 중간은 없다 정문순 2015/09/23/
[문학] 사랑의 단맛, 눈물을 참아야 하나? 김철관 2015/08/30/
[문학] 표절을 표절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자의 슬픔이여 정문순 2015/08/06/
[문학]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몫 없는 자들의 희망 박연옥 2015/07/27/
[문학] 시인의 흔적, 시로 남겼다 김철관 2015/07/18/
[문학] 신경숙 표절 글쓰기, 누가 멍석 깔아주었나 정문순 2015/07/19/
[문학] 신경숙 표절 <전설>은 일본 군국주의자의 영혼 정문순 2015/06/24/
[문학] 2천원으로 10년간 버티어 온 잡지 종간 이유 뭘까 김철관 2014/10/04/
[문학] 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정글만리> 정문순 2014/02/03/
[문학] "바람은 가족이란 뿌리를 견고하게 내리도록 하는 것" 김철관 2013/11/27/
[문학] 불의의 시대, 문인이 괴로운 시대여 정문순 2013/11/12/
[문학] “시인과 이색공연을 만날 수 있는〈詩가 있는 카페〉 오세요” 임성조 2013/10/25/
최근 인기기사
  개인정보취급방침대자보소개광고/제휴 안내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우) 120-093 서울시 영등포구 버드나루로 80 제일빌딩 별관 4층 TEL: 070-4411-5452ㅣFAX: 02-6280-5462 (web@jabo.co.kr / c.p: 010-2249-9446)
대자보ⓒ1998-2014 ㅣ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아00133 ㅣ 발행인 겸 편집인 : 이창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대자보' 가 생산한 저작물은 정보공유라이센스 2.0 : 영리금지 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