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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몫 없는 자들의 희망
예쥔젠의 장편소설 『산촌』, 1920년대 중국의 내전과 혁명과정 그려
 
박연옥   기사입력  2015/07/27 [14:42]

에스페란토라는 무기, 만국의 독자여 환기하라


현재 중국은 세계 경제 규모에서 2위, 무역 규모에서 2위, 제조업 규모에서 1위, 저축 규모에서 1위, 온실가스 배출량 1위를 차지하는 국가다.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부실함을 우려하는 일각에서는 위안화를 그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고, 최근 급락한 중국증시는 세계경제에 먹구름을 몰고 오는 등 중국경제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2015년 한국을 강타한 메르스 재난에서 한국경제가 가장 걱정한 부분은 급감한 유커의 한국관광이었다. 시장경제로의 개방화를 선언한 이후 중국의 도약과 약진은 눈부시다. 10억 인구의 내수만으로도 세계 경제의 규모를 유지해갈 수 있는 중국은 내핍의 저성장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전지구적인 한파로부터 유일한 무풍지대로 보인다. 모든 ‘짝퉁’이 원본을 밀어내고 진품의 위세를 장악하는 나라,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스러운’ 사회주의국가가 중국이다. 지금의 중국과 혁명을 병치하고 교차시키는 작업은 뜨악하고 난감한 측면이 있다.

 

▲ 예쥔젠의 소설 <산촌>은 1920년대 중국의 내전과 혁명의 과정을 간결하고 순박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는 1948년 작품이다.     © 갈무리

예쥔젠의 소설 <산촌>은 1920년대 중국의 내전과 혁명의 과정을 간결하고 순박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는 1948년 작품이다. <산촌>은 최초로 영어로 쓰여진 중국소설이며, 에스페란토로 번역되기도 한 작품으로, 이것이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2015년 한국의 독자에게 뒤늦게 도착했다. 발표 당시 서구사회에 중국혁명의 실상을 알린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평가가 2015년 한국의 독자에게는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혁명시대를 살아가는 중국 <산촌> 사람들의 이야기는 100여 년의 시차를 건너뛰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서사적 흡인력을 갖고 있다. 밤마다 마을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야기꾼 라우리우, 먹성 좋은 아내 암까마귀를 위해 남보다 배로 일하는 마우마우, 오매불망 남편을 기다리는 국화 아줌마, 암소를 딸처럼 아끼는 판 삼촌 등 화자 춘성의 눈에 비친 <산촌> 사람들은 정겹고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이다. 소년의 시각이 갖는 단순명료함에 에스페란토 문법의 간단명료함이 결합되어 <산촌>의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그 질박한 문체가 <산촌> 사람들의 정서를 원형에 가깝게 재현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가 영어와 에스페란토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며 국적이 표백된 듯한 문체효과를 가져오는데, 그 독특한 단순함이 만국(萬國)의 독자들에게 각자의 ‘잃어버린 시간’을 환기시킨다. 
 
공통의 언어, 공통의 경험


1980년대 분단문제를 다룬 임철우의 소설들, 그리고 1990년대 조정래의 역작들이 서사화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역사의 문제는 한국문학의 본령을 이루고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체험, 한국전쟁과 산업화의 질곡을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의 근대는 1920년대 중국 농민들이 내전과 혁명의 도정에서 체감한 인간 모멸과 공동체 파괴의 고통을 유사하게 관통해갔다. 당대 중국 농민은 지주와 패전군인들에게 약탈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피난민들은 걸인과 폭도 사이를 오가는 불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인민을 위한 변혁을 약속하는 혁명세력 또한 정비되지 못한 시절, 인민의 삶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태로움 아래 놓였다. 특히 혁명을 왕조의 교체와 변발의 문제로 이해하는 <산촌>의 농민들에게 요동치는 역사는 더욱 혹독한 잔해를 남겼다.

 

먹성 좋은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지주의 보안대에 들어간 마우마우는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반동’의 죄명으로 혁명가들에게 죽음을 당한다.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혁명군의 서기가 된 늙은 교사 뻬이후 삼촌은 되돌아온 지주의 마름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춘성의 가족, 어머니와 판 삼촌은 갑작스런 이러한 비극을 이해할 수 없다. 혁명 사상을 전하는 청년이든, 혁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도사 벤친이든 춘성의 어머니와 판 삼촌에게는 모두 그들의 안위가 걱정스러운 이웃이며 무릇 ‘같은 사람’이다. 마우마우의 비보(悲報)를 부인에게 전할 수 없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 판 삼촌에게 혁명군은 규정을 어겼다며 개조소 수용을 명령한다.

 

마을사람들의 혼을 빼놓았던 이야기꾼 라우리우는 혁명사를 선전 선동하는 이론가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난다. 돌아온 남편 민툰이 외국여인과 동지적 사랑과 가족을 이루었다는 절망적인 통보를 듣고 국화 아줌마도 마을을 떠난다. 많은 것이 바뀌어 예전처럼 살 수 없는 화자 춘성의 집도 아버지와 형이 있는 도시로 떠난다. 내전과 혁명은 <산촌> 사람들의 삶에 회복할 수 없는 변형을 가져왔다.


봉건착취계급인 지주를 제거했을지는 몰라도, 새로운 공화국의 군벌과 사상이 무르익지 않은 혁명군은 양자 공히 농민의 삶을 파탄내고 마을을 붕괴시켰다. 일본의 만주국 점령을 비롯해 모택동의 공산당이 내전을 종식할 때까지, 그리고 광기어린 문화혁명의 여파가 잦아들 때까지 중국 인민들의 삶은 격랑과 함께 표류했다. 그리고 등소평의 개방화 선언과 천안문사태를 겪으며 중국은 현재와 같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제주도의 부동산가격을 치솟게 하고, 명동의 쇼핑몰을 휩쓸고 다니는 유커는 중국 인구의 일부에 불과하다.

 

개방화 이후 중국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열악한 노동과 환경 문제로, 더 이상 ‘하나의 중국’으로 말할 수 없는 다양체로 존재한다. “아, 나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잘생겼다고 말하는 것에 속고 살아왔던가. 아, 아, 얼마나 많은 젊은 세월을 환상에 속아 낭비해 왔던가......”(<산촌>, p.293) 라우리우의 독백은 고도성장시대의 거품이 꺼지고 심각한 불평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토와 국적을 가로질러 <산촌>의 인물들이 겪은 삶의 변형들은 온전히 지금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몫 없는 자들의 희망


10여 년째 이어지고 있는 밀양 할매들의 ‘탈핵 탈송전탑 운동’은 <산촌> 사람들의 수난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 한평생 고향땅에서 농사짓고 사는 삶, 이외의 인생을 선택지로 갖지 못한 밀양의 노인들에게 국가와 한전은 농사를 짓지 말 것을, 고향을 떠날 것을, 또는 고압 전자파에 노출되어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 것을 강요한다. 전쟁과 혁명이 아니라도 오늘날 누군가에게는 그에 맞먹는 불안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성실히 일한 노동자는 공장을 떠나야 하고, 강제로 삶의 터전이 철거된 가족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사회적 안전망은 없다. ‘생명보다는 돈’이라는 자본의 논리와 윤리에 따라 배제되는 ‘잉여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각자 위치하고 있는 시공간은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몫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몫을 가진 자’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의 영역에서 공공재의 사유화를 일삼아도, 몫 없는 자들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공론의 장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과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몫 없는 자’라는 공통점을 공유한 자들의 ‘공통의 언어’를 상상한 에스페란토 창시자 라자로 자멘호프의 지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소수자들의 공통의 목소리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고립이 아닌 공생을 이야기한다. 생명과 공생의 희망의 언어가 발화될 때, 사물화된 자본주의의 질서는 균열이 간다. 몫 없는 자들의 희망의 언어가 위험한 언어인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여기 사람 있다” “함께 살자” 배제된 자들과 몫 없는 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희망의 언어와 (누군가에게는) 위험한 언어는 계속된다.


<산촌>의 마지막에서 춘성과 어머니는 집을 떠나며 혁명군이 두고 간 표어를 읽는다. “우리는 돌아온다.” 늑대와 여우가 양을 잡아먹는 유치한 그림들과 괴상한 표어를 남발했던 혁명군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던 어머니는 그들이 남긴 다짐의 글을 곱씹어본다. 그리고 고향과 집을 떠나는 자신들의 언어로 전유해, “그럼 돌아와야지”로 각오를 다진다. ‘봄이 오면 황토는 우리에게 쌀을 주고, 가을날에 황토는 우리에게 콩과 고구마를 주네’ 생명의 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 반세기를 경과해 이제야 우리에게 당도한 예쥔젠의 <산촌>이 때를 놓친 ‘뒤늦은 도착’이 아닌 까닭은 여기에 있다. 

 

* 글쓴이는 문탁네트워크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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