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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극렬 반대하는 개신교인들에게
[종교산책] 성서의 문자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예수의 정신을 읽어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5/06/29 [14:57]

지난 6월 9일부터 28일까지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행사 내내 보수개신교인들이 주축이 된 반대의 목소리와 방해도 잇따랐다. 행사가 말미에 이른 26일에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 커플은 미국 어느 곳에서나 결혼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했다. 곧 이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미국의 동성결혼 합법화 결정을 환영했다.


반기문 총장은 그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헌장 채택 7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미국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디든지 간에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도록 한 연방대법원의 합헌결정을 적극 환영한다... 매일 우리는 인종과 종교, 국적, 성별 혹은 성적 취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수호하고 있다.”면서 동성결혼의 합헌결정을 지지했다.


이번 퀴어문화축제는 우리나라에서 차별과 편견에 대한 저항운동이 궤도에 오른 날로 기념할 만하다. 이처럼 성소수자에 대해 범시민적인 이해와 동조를 얻은 적이 과거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영훈 대표회장은 “동성애는 용납할 수 없는 죄”이며 “한국 교회가 하나가 돼 동성애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기총은 한국의 보수개신교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2년 전 야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발의했던 ‘포괄적 차별금지법’ 법안에 대해서도 반대운동을 주도해 결국 이 법안을 철회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 글은 그때 법안이 철회된 직후 인터넷에 올렸던 글을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이미 교리적 배타와 독선으로 굳어진 한기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들의 지도를 받는 순진한 한국 교회 교인들을 위해, 또한 기독교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관련 내용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기독교성서에 근거하여 그 진위를 따져보고 싶다.


1. 동성애를 정죄하는 성서의 기록에 대하여


동성애를 죄로 보는 기독교성서의 관점은 구약성서 뿐 아니라 신약성서에도 나타난다. 하여 성서의 기록을 신앙과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 보수 개신교인들이 동성애를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동성애를 금하는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인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자와 한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레위기 20장 13절, 공동번역.)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 대신 비정상적인 것을 즐기며 남자들 역시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남자끼리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6~27절, 공동번역.)


기독교성서에 이런 기록들이 있기에 동성애는 죄일 수밖에 없다고 보수 기독교인들은 믿는다. 하지만 이 구절들이 정말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신의 말씀이라면, 하여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 적용해야 할 절대 규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성서를 버리고 이 문제로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고 싶다.


몇 년 전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구약폐기론을 주장한 적이 있다. 오늘날의 가치관에 맞지 않으니 차라리 폐기하는 게 낫겠다는 주장이었다. 나 역시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으로 성서를 읽지 못하고 문구에 매여 이삼천 년 전 고대인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갇혀 산다면 구약 뿐 아니라 신약까지도 폐기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성애자를 용납하지 말라는 성서 구절은 성소수자가 겪는 아픔과 인권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고대인의 가치관 아래에서 기록된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사상과 윤리, 의학, 과학 등 모든 면에서 이천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특정 구절과 교리에 여전히 묶여있으면 예수께서 품어주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인권탄압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2. 바울은 자신의 글이 신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독교성서의 모든 구절이 신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증거는 성서 자체에 의해서도 제시된다. 당시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고 저주를 선언했던 사도 바울 자신이 그 증인이다. 다음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직접 쓴 서신의 일부다.


미혼 남녀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바가 없으므로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25절)


형제 여러분, 내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29~31절)


그리고 이것은 내 의견입니다마는 과부는 과부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나에게도 신의 성령이 계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40절, 이상 공동번역)


오늘날 사도 바울에 대한 해석은 예수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대부분 바울이 정통교리의 초석을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려 한 것은 교리가 아니라 영성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을 보듬어 안으신 예수정신과 그 운동을 계승한 분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교회가 이른바 ‘보수정통’ 신학을 지지하므로 그 입장에 의거해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보수 개신교인들은 성서의 모든 기록이 신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본문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다.


“미혼 남녀에 관해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지시하신 바가 없으므로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라는 표현대로, 바울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신의 영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생각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므로 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나에게도 신의 성령이 계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라는 표현 역시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음을 드러낸다.


이에 대해 “비록 바울 자신은 자기 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확신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만일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왜냐 하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권하는 내용을 보면 그의 생각 자체가 잘못 판단한 오류였음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교인들이 서로에게 건넨 인사말은 “마라나타!”였다. 이 말은 “주여, 어서 오소서!”라는 뜻으로,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며 그 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옛 질서를 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니 고난을 참고 기다리자는 상호간 믿음의 격려였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오지 않았을 뿐더러 이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오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7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권면은 그가 당시의 교인들처럼 ‘임박한 종말론’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결혼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곧 오시리라고 기대했던 임박한 종말론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의 확신이 틀린 것으로 역사에 의해 증명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마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면 성령의 오류를 인정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런 예는 기독교성서의 기록 자체를 절대기준으로 삼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다. 성서는 당시 시대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토대로 기록되었기에, 당시 시대와 사회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저자가 가진 인식과 가치관의 한계도 고스란히 담겨있으므로, 성서의 기록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성서자체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3. 환호환 탄환사 (幻虎還 呑幻師)


불교에 초발심보살(初發心菩薩)이라는 말이 있다.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수행길에 들어선 초보수행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 초발심보살(初發心菩薩)을 위하여 쓴 원효대사의 글 가운데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라는 게 있다. 중생이 눈·귀·코·혀·몸·뜻의 6정으로 여러 가지 번뇌를 만들어서 괴로워하는데,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버리고 죄업의 체(體)가 없음을 성찰하면 합리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글이다.


이 대승육정참회에 ‘환호환 탄환사(幻虎還 呑幻師)’라는 비유가 나온다. ‘환사’는 마술사를, ‘환호’는 허깨비호랑이를 말한다. 그러니까 마술사가 환술로 허깨비호랑이를 만들었는데 그 호랑이가 마술사를 집어삼켰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으로 무엇이든 지어낼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들어낸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받고 심지어는 서로 죽이고 죽기까지 한다.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는 오래된 교리는 허깨비호랑이와 같다. 전혀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허깨비호랑이가 지금까지 사람을 여럿 잡아먹었다. ‘동성애는 죄’라는 오랜 편견을 재해석하지 못하고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소수의 선한 이웃들을 내치고 공격하는 사람들은 무지와 편견으로 자신들마저 허깨비호랑이에 잡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살부살조’ 정신도 가르친다. 수행을 하다가 부처가 와서 방해하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먼저 깨달은 이)가 와서 방해하면 그도 죽이라는 뜻이다. 아무 것에도 매이지 말고 이전의 전제를 깨뜨려야 올바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기독교도 그런 정신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살신살서(성서와 신에 대한 전제를 내려놓기)하고 살예살바(예수와 바울의 가르침으로 기록된 구절이라도 재해석하여 읽기)할 수는 없는 것일까?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모든 비합리적이고 배타적인 기록들에 대해 ‘살신살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신앙을, 또한 신약성서에도 여전히 나타나는 한계와 편견, 오류들에 대해서도 ‘살예살바’할 수 있는 열린 신앙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독교성서의 문자 안에 갇힌 신과 예수를 죽이지 않고는 참 하느님과 참 예수님을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4. 성서의 문구를 넘어 성서 전체에 흐르는 예수정신을 읽어야


기독교성서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된 어록조차도 전승자나 기록자가 예수의 입을 빌어 전하거나 기록한 것일 수 있기에, 특정 문구에 매이지 말고 성서 전체를 흐르는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의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해석해야 한다. 또한 예수정신에 어긋나면 성서에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매이지 말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모든 종교적 규례와 편견과도 맞서 싸우셨으며,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과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신 분이다. 하여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고 옥죄는 성서의 모든 기록은 오늘날 인류가 도달한 과학과 이성의 빛 아래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른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는 신도라면, 성서의 문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성서의 구절을 절대화하는 성서우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성서무오설이라는 비합리적인 교리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 성서의 특정 구절이 뭐라고 말하건 보편 상식에 어긋나면 성서 구절이 아니라 상식과 합리를 따라야 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성서의 기록도 오늘날에는 재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사회가 타락한다는 생각은 객관적인 탐구나 과학적 통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기록에 대한 맹신과 오래된 관습의 영향으로 형성된 허상이다. 오히려 다수자와는 다른 소수자의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수의 힘으로 소수자를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타락한 사회의 폭력이며 우리 사회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편견이다.


동성애 문제는 이성애의 경우와 똑같이 그것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가의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구체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차별 없이 당사자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성적 지향은 개인의 성향에 대한 것이기에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문제이지 사회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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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6/29 [14:5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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