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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사랑한 백석동천과 백사실계곡
창의문 뒤 백사 이항복 별장이 있는 백사실계곡 위치, 청정지역 자랑
 
김철관   기사입력  2015/03/10 [08:22]

* 본문은 2015년 3월 10일 작성된 기사인데 최근 백석동천에 대한 관심이 급증, 소개하는 차원에서 다시 올립니다.-편집자 주. 

 

▲ 백사실계곡의 맑은 물줄기     © 김철관


지난 3월 9일 오후 절친한 지인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삼각산 줄기에 있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조선 중기 명인인 백사 이항복의 삶과 철학을 더듬어 봤다. 

그럼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어떤 위인일까. 이항복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했고, 율곡, 성혼 등이 사망하자 서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당쟁으로 북인에 의해 탄핵을 당해, 즉시 사직한 인물이기도 하다. 


광해군 때 북인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하자 강력히 반대해, 결국 북인에 의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됐고, 이듬해 이곳에서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소재지 인근에 이항복과 정경부인 권씨가 나란히 묻혔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돼 있다. 

 

▲ 이항복의 별서터     © 김철관
▲ 소나무길     © 김철관


도원수 권율 장군의 사위로, 결혼 직전 권율 장군과의 일화가 이항복의 강직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권율과 담벼락을 놓고 살았던 이항복은 집에서 자라던 감나무가 권율 집으로 향하자 권율이 자기네 감나무라고 감을 따 먹었다는 것이다. 화가 난 이항복은 권율 집으로 찾아가 권율의 방문에 주먹을 넣고 ‘이 주먹은 누구의 것이냐’고 말했고, 권율은 ‘너 것이 아니냐’고 답해, 권율의 승복을 얻어낸 인물이다. 이런 기개를 높이 산 권율은 딸을 이항복에게 시집을 보내게 된다. 


첫 주를 시작하는 9일 오후 절친한 지인들과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삼각산 입구로 가 산책로를 향했다. 

이날 이존영 미국콩코디아국제대학교 부총장, 이현미 법무법인 ‘명’ 재무이사와 함께 백사 이항복의 삶이 서려있는 백사실계곡 산책로를 우연히 걷게 된 것이다. 입구에 구불구불한 소나무 여러 그루가 우뚝서있고, 아기자기한 오솔길 같은 산책로에 매료가 돼 내가 태어난 전남 고흥의 오솔길이 생각나기도 했다. 사시사철 물이 흐른다는 백사실계곡에 들어서자 白沙(백사) 이항복(李恒福)의 별서 터가 보였다. 

 

▲ 백석동천     © 김철관
▲ 삼각산에서 본 북한산     © 김철관


백사실계곡은 물이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이어서 아직도 지표생물인 도롱뇽, 산개구리, 버들치, 가재 등이 살고 있는 곳으로 자연생태의 보고이며, 서울 종로구에 의해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서식지 보호를 위해 거주민, 보호관리자 외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특히 아름다운 자연경관 및 천년 역사적의 정취를 직접 느끼고 감상하면서 자연생태를 배우는 곳이었다. 

 

▲ 솟대     © 김철관

백사실계곡은 조선시대 별서가 있었던 자리로, 자연경관에 수려한 곳의 건물터와 연못 등이 남아있다.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 등의 각자(刻字)바위도 있다. 백석동천의 ‘백석’은 백악(북악산)을 뜻하고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백악의 아름다운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백석동천은 인근 주민들에게 백사실계곡이라고 불리면서 조선 중기 명신인 백사 이항복의 별장지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이항복의 호가 ’백사‘인 것에 유래해 구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에는 연못과 육가정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뒤의 높은 곳에는 사랑채의 돌계단과 초석이 남아 있다. 장인 권율(1599년)이 죽자 행주산성 주봉에 있는 행주대첩비의 끝에 추기를 쓴 장본인이 이항복이다. 

사랑채 뒤의 배드민턴연습장 터에 안채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석동천은 마을과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으며, 수려한 자연경관과 건물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 격노 높은 별서건축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별서터 주변에 우뚝 서 있는 ‘솟대’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하지만 소도라는 성역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마을 입구에 우뚝 서 마을로 들어오는 모든 액이나 살 그리고 자귀를 막아 준다고 해 세워졌다. 주로 돌을 쌓은 뒤 나무 기둥을 박은 후 꼭대기에 오리와 같은 새를 올려놓는다. 솟대는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종교적 의식에서 비롯돼 삼한시대에는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에서 유래했다. 

이곳에서는 북한산과 인왕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삼각산 등선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절인 은덕사가 있고, 능금마을과 북악팔각정(약수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있다. 은덕사 뜰에 걸려있는 남루한 목탁이 고승의 발자취를 느끼곤 했다. 이곳 산책로는 10여년 전 고인이 된 법왕청 일붕 서경보 큰스님(초대 법왕)이 자주 다녔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남루한 목탁     © 김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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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3/10 [08:2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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