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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고려 공녀 원나라 기황후씨 살았다?
경기 고양시 행주산성을 다녀왔습니다.
 
김철관   기사입력  2015/02/22 [17:50]
▲ 권율 장군 동상     © 김철관

행주산성하면 행주치마와 권율장군이 떠오른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 15번길 89번지에 있는 행주산성은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56호로 지정돼 있다. 행주산성은 덕양산 정상(912m) 중심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토성이다. 

전체 둘레길이는 1km이고, 현재는 415m정도가 복원이 돼 있다. 산성의 남쪽은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은 창릉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 천연의 요새지로서 인근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산성은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이중구조로 돼 있다. 

행주산성은 삼국시대 처음 축조돼 조선임진왜란(1593년) 당시 전라 순찰사였던 권율이 승군을 포함한 정병 2300명으로 왜구 3만 여명을 격퇴한 곳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권율 장군 사후 1년인 1602년(선조 35년)에 그날의 승전을 기념해 덕양산 정상에 부하장수들에 의해 대첩비각(초건비)이 세워졌다. 또한 정상에는 1963년 문화재 정화사업으로 세운 15.2m의 행주대첩비(3호비)가 있다. 1842년(헌종 8년)에 행주나루터에 기공사(紀功祠)를 창건해 권율 도원수를 제향했으나 6.25사변 때 소실돼 1990년 후반 기공사를 원형 복원한 후 현재 행주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해 권율 도원수 및 충신들의 제례를 봉향하고 있다. 

1970년 행주산성 문화재 정화작업을 시작으로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와 진강전, 대첩비각, 대첩문이 건립됐다. 1980년대 대첩기념관, 충훈정, 충의정, 권율 도원수 동상이 건립돼 현재의 행주산성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함께 조선시대 임진왜란 3대 대첩이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이다. 지난 12일 오후 평소 잘고 지낸 지인의 승용차를 차고 행주산성을 찾았다.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에 기거하고 있는 지인은 가까운 행주산성을 가끔 찾는다고 했다. 

행주산성 입구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지인이 입장료를 내고

▲ 충장사     © 김철관

서야 본격적으로 행주산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대첩문을 지나자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길옆 양쪽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청사초롱이 연등처럼 길게 이어졌다. 입구 바로 옆 오른쪽에 권율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있고, 그 뒤로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일어났던 왜군의 만행에 관군, 승병, 의병, 여성의병대 등이 함께 연대해 싸웠던 역사의 그림 동판이 처절했던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었다. 권율 장군의 동상은 1986년 8월 26일 세워졌다. 동상 앞에 당시 정부 관료였던 노신영 국무총리가 동상제막기념식수를 해 지금도 자라고 있다. 

권율 장군 동상을 지나 오르막길을 따라 해발 349지점에서 오른쪽으로 100m정도 가면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가 있고, 주변에 대첩비와 전사청이 나온다. 1970년대 문화재 재건사업으로 건립된 충장사는 권율 장군의 호국 충정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충장사 현판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이며 사당 안에 봉안된 권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이곳에서는 매년 3월 14일 행주대첩을 기리는 제례를 모신다. 

충장사는 궁궐, 사당, 서원, 향교 등에서 볼 수 있는 삼도(三道>로 돼 있다. 삼도는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참도(參道>가 있는 것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신도는 사당에 모셔진 신(神)이 다닌 길로 일반인들은 다닐 수 없고, 부득이 넘어가게 될 경우 머리를 숙여 예의를 갖추고 넘어 가면된다. 삼도삼문이 있을 때 들어가는 방법은 우입좌출(右入左出)로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오면 된다.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충장사도 삼도삼문(三道三門>으로 돼 있다. 

▲ 반송     © 김철관

이곳을 나와 중심부 큰길을 따라 해발 518m지점에서 좌측은 대첩비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55미터 정도를 가면 대첩기념관(기념물 전시관)이 나온다. 기념관 입구에 낙하산 모양의 소나무가 서 있는데 ‘반송’이다. 반송의 잎은 바늘 모양으로 높이는 2~5m이고 길이는 8~9cm, 나비는 1.5mm이다. 꽃은 5월에 피는데 암꽃이 수꽃보다 약간 적고 수꽃은 타원형이며 황색을 띠고 암꽃은 달걀형의 자주색을 띤 것으로 알려졌다. 

대첩기념관 정문 입구에 들어서자 행정구역인 고양시가 전시한 펼침막이 보였고, 읽고 있노라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일본 정부가 응답하라는 내용이었다. 흔히 위안부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표현은 ‘강제동원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펼침막에는 한국, 중국 등 20만 명에 이르는 성노예 피해자들 중 우리나라는 234명이고 50여명의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다고 써 있었다. 고양시도 두 분의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다가 2014년 초 돌아가신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첩기념관은 행주대첩 때 사용한 총통, 활, 화차, 수차석포 등 여러 무기들을 볼 수 있다. 지난 1953년 2월 12일(선조 26년) 행주산성 전투 당시 사용한 무기와 권율 장군의 승전 모습을 담은 행주대첩도, 충남 금산의 이치대첩도, 오산 독산성싸움도 등의 기록화가 전시돼 있다. 전시된 무기는 일본군 조총을 능가하고, 과학적으로 설계된 조선 무기가 다수 전시돼있다. 

▲ 대첩기념관     © 김철관

이 전시관에는 행주산성 전투 승리의 4대 요인으로 권율 장군과 휘하 장사들의 완벽한 전략과 전술,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식 무기 사용, 강과 절벽 등으로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적 지리적 조건, 민관군 승녀 부녀자 등이 혼연일체가 돼 목숨을 건 전투 등으로 기록해 놨다. 

특히 전시물 중 각궁(角弓)이 눈길을 끌었다. 각궁은 우리나라 활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물소뿔, 뽕나무, 소힘줄, 실 등을 복합적으로 붙여 만든 활이다. 일반적 사정거리는 200보에 달하는 무기이다. 

임진왜란 행주산성 전투 당시 권율에게 40량의 화차를 제조해 제공한 변이중 선생의 문집도 있다. 문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망암 변이중 선생이 쓴 5건 2책의 시문집이다. 시(時) 소(疏) 서(書)와 교서(敎書> 그리고 헌패(憲牌), 묘지명 등이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에 대처해 국가의 요새지와 전략지를 모두 열거해 왜적을 이길 수 있는 방책을 기록한 병학자료와 상소문, 총통화전도설 등 무기의 원리를 설명한 자료가 수록돼 있다. 임진왜란 당시 변이중 선생은 300량의 화차를 제조해 권율 장군에게 40량을 제공해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했다.

기념관을 나와 중심도로에서 좌측 오르막길을 향하면 진강정이 나오고 더 가면 정상이 보이면서 덕양정과 대첩비각, 행주대첩비가 나온다. 이날 행주산성 정상은 세찬 바람이 불었지만 맑은 날씨로 한강, 남산, 난지도, 63빌딩, 성산대교, 가양대교, 관악산, KTX 행신기지, 북한산 백운대, 북한산 인수봉 등을 볼 수 있어 기분이 참 좋았다.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은 북한산, 고봉산과 함께 고양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 행주대첩비와 비각     © 김철관

고양시의 서남쪽 끝에 자리한 이곳 덕양산에는 고양시와 인근 일대를 볼 수 있다. 동쪽으로는 고양지역의 명산인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고, 북한산 백운대 아래에서 시작한 장릉천은 한강과 연결돼 있다. 북한산 우측으로 서오릉이 있는 웅(매)봉이 있고 산줄기를 따라 화전의 망월산, 대덕동의 대덕산 등이 보인다. 덕양산 바로 앞에는 예전봉수대가있던 강매동 봉대산이 있다. 멀리 북쪽으로 고양, 양주, 파주의 경계가 되는 계(개)명산이 있다. 이곳에서는 서울 남산과 안산, 인왕산 등을 볼 수 있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자유로, 한강, 관악산, 서울 시내 등을 볼 수 있다. 

덕양정은 전망 좋은 정자이고, 정상에 세워진 행주대첩비(경기유형문화재 74호)는 권율(1537~1599) 공이 사망한지 1주년이 되던 해 세워졌다. 권율 장군의 부하이고 막료였던 인사들이 과거 행주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 공이 대단히 컸던 것을 기려 행주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영원히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을 결정하고 비문을 지었다. 

권율은 46세인 임오년에 문과에 합격해 낭관에서 바로 당상관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문과출신 장군으로 활약해 중앙정부에 있을 때가 적었다. 그래서 중앙에서는 정치적으로 큰 업적이 없었다. 비문은 행주대첩의 경과와 권율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비의 재질은 흑색이 가미된 화강암이며 비문은 최립이 짓고 비의 명칭은 최상용이, 글씨는 한석봉(한호)이 썼고, 끝의 추기는 이항복이 지었고, 김현성이 썼다. 이 비는 비각을 새워 보존했으나 오랜 세월 풍화작용과 마모로 비 몸이 갈라지고 떨어져 같은 재질로 보수한 상태이며, 헌종 11년(1845년) 같은 내용의 비를 기공사에 세워놓았다. 1963년에 세운 15.2m의 행주대첩비도 볼 수 있다. 

▲ 충의정     © 김철관

행주대첩비를 넘어 오면 충의정이 나오고 이곳에서 행주산성 전투 영상(17분)을 볼 수 있다. 영상은 임진왜란과 행주대첩, 권율 장군의 생애를 담았다. 영상 관람이 끝나고 인근 토성으로 가는 입구를 향했다. 복원된 415m 토성을 따라 내려가면 과거 토성 행주산성의 성문(토성문지)이었던 곳이 나오고,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율 장군의 조방장 조경이 목책을 쌓아 행주산성의 약점을 보완한 지역으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승군 등이 부근에 배치돼 치열한 전투로 대승을 거둔 곳이었다. 

특히 이곳은 행주기씨 시조가 태어난 곳으로 기씨의 후손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기감천 있고 행주기씨 유허비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시대 공녀에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도 이 지역에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럼 행주산성 전투의 주역 권율 장군은 어떤 인물일까. 선조 32년(1599년)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등진 권율 장군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로 나갔다. 하지만 장군으로 임진왜란 7년간 조선군을 지휘해 풍전등화의 국난위기에서 왜병과 싸워 승전보를 전한 명장이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 경기도 광주 목사로 있었다. 이 때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됐다. 그 후 명나라 군대와 연대해 서울을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수원성에 머물다가 1993년(선조 26년) 2월 1만 여명의 병력을 행주산성으로 집결시켰다. 일본군 3만 명은 2월 12일 새벽 사기충천한 기세로 행주산성을 여러 겹 포위했고 3진으로 나누어 9차례 걸쳐 종일 맹공격을 감행했다. 

▲ 토성     © 김철관



이에 권율장군은 왜군과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행주산성 전쟁시 동산동 밥할머니 등이 주축이 돼 조직된 여성의병대가 치마에 돌을 날라 무기(석전)로써 맹활약을 했고, 이때부터 여자들의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을 했는데, 권율은 이를 추격해 130여 명의 왜군 목을 베었고,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 등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전쟁에 승리한 권율은 전군을 지휘할 수 있는 도원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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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2/22 [17:5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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