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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릴 샌드버그: ‘페이스북의 성인 감독관’인가?
[인물과사상] 실리콘벨리 페미니스트 치어리더인가? 섹시한 젊은 여자인가?
 
김환표

샌드버그는 구글러의 대표주자

 

구글러(Googler)라는 말이 있다. 구글 출신으로 미국의 다른 IT업체 임원으로 영입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때문에 구글은 IT산업의 인재양성학교로 불리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실리콘벨리의 벤처 캐피털리스트이자 페이스북, 이베이와 휴렛팩커드(HP) 등 IT업체 이사를 맡고 있는 마크 안드리센은 “혁신을 추구해온 회사의 역사와 함께 IT업계에서 구글과 같은 큰 회사가 흔치 않다는 점이 구글 인재의 인기 원인”이라고 말한다. 혁신을 장려하는 문화 속에서 대기업 조직운영 노하우를 쌓았다는 점이 주목받는 이유라는 것이다.

 

광고 판매 부진으로 고전하던 아메리카온라인(AOL)이 2009년 영입한 팀 암스트롱, 구글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하다 2010년 트위터의 CEO로 스카우트 된 딕 코스톨로, 2012년 야후 CEO가 된 머리사 메이어 등이 대표적인 구글러다. 모두 다 쟁쟁한 인물이지만 구글러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아마도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일 것이다. 워낙 다양한 방면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샌드버그는 2009년부터 월트 디즈니와 스타벅스의 이사로 활동 중이며 브루킹스 연구소 이사 명함도 가지고 있다. 샌드버그는 직업이 여권운동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 차별 해소에도 열심이며 IT업계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올 만큼 전형적인 알파걸(Alpha Girl)이다. 알파걸은 엘리트 여성을 이르는 말이다.

 

물론 샌드버그를 수식하는 가장 유력한 명함은 페이스북 COO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샌드버그가 없었으면 페이스북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라며 샌드버그를 “가장 중요한 동료이자 소중한 친구”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의 평가도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뛰어난 아이디어를 품은 저커버그와 실력을 두루 갖춘 샌드버그가 만난 것이 페이스북의 진짜 성공 비결이었다고 말한다.

 

워싱턴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플로리다주에서 성장한 샌드버그는 학창 시절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으며 1991년 하버드대 경제학과를 수석 졸업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다. 하버드대에서 평생의 은인이라 할 사람을 만났으니 훗날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 장관으로 일한 로렌스 서머스였다. 샌드버그의 논문 지도 교수였던 서머스는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로 자리를 옮기면서 샌드버그를 자신의 연구 보좌관으로 데려갔을 만큼 둘 사이의 관계는 막역하다. 1995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수석으로 취득하고 컨설팅 업체 매킨지에 잠시 몸을 담았던 샌드버그는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미 재무부에서 특별 보좌관으로 활동했는데, 이 역시 서머스의 부름 때문이었다.

 

저커버그는 왜 샌드버그를 선택했는가?

 

이후 샌드버그는 구글에 입사해 7년간 일했는데, 이는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때문이었다. 당시 슈미트는 샌드버그를 영입하기 위해 거의 매주 전화를 걸어 “(구글은) 앞으로 성장하는 일만 남았다. 늦기 전에 합류하라”고 설득하는 등 끈질지게 구애를 했다고 한다. 샌드버그는 2001년에서 2008년까지 구글에서 ‘애드워즈(AdWords)’ 프로그램을 지휘하는 등 글로벌 온라인 판매 운영(Global Online Sales and Operations)을 담당하는 부사장으로 일했는데, 이때 세계 최대 광고주들과 맺은 돈독한 관계는 훗날 페이스북의 매출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샌드버그가 저커버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2007년 12월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한 크리스마스 파티였다. 샌드버그가 페이스북에 입성하기까지는 약 두 달이 걸렸는데, 저커버그가 쏟아 부은 시간과 열정은 대단했다. 저커버그의 계산으로 저커버그와 샌드버그는 약 50시간 정도의 미팅을 진행했는데, 어느 날은 샌드버그의 집까지 찾아와 밤늦게까지 미팅을 진행했다. 이와 관련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 이펙트』의 저자 데이비드 커크패트릭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로 일어서지 않더군요. 기자님, 책에 분명히 적어주세요. 마크는 도무지 우리 집에서 나갈 생각을 안 했어요.”

 

저커버그는 왜 이렇게 샌드버그에게 집착했던 것일까? 2007년 도입한 새로운 광고 시스템인 비콘(Beacon)의 대실패 때문이었다. 비콘은 ‘소셜 애즈(social ads)’로, 웹사이트에서 회원들의 활동 내용을 광고주들이 추적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회원들의 쇼핑 정보를 회원 친구들에게 자동으로 알려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비콘은 즉각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프라이버시 논란도 함께 일으켰고 결국 저커버그는 2009년 9월 비콘을 제거했다. 비콘 사태가 발생했을 때 페이스북의 이사 짐 브레이어는 저커버그에게 “제가 보기에는 이번 사태가 왜 우리에게 유능한 COO가 필요한지에 대한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예요”라고 말했으며, 저커버그는 이 말에 동의했다. 샌드버그는 2008년 페이스북의 ‘넘버 2’인 COO를 맡았는데,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에선 모든 것이 빨리 성장하고 있다”면서 “샌드버그는 현 시점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적임자였다”고 말했다.

 

저커버그가 샌드버그를 택한 이유에 대해선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샌드버그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자리를 탐내지 않았기 때문에 채용됐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커크패트릭은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의 CEO 자리를 욕심내지 않은 소수의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꺼내는 ‘페이스북 CEO가 되고 싶다’는 말은 곧 탈락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IT전문 매체 매셔블(Mashable) 사이트의 공동 편집장인 벤 파도 비슷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샌드버그는 약간의 조언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일상적이며 광고 판매 같은 자잘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나는 그들이 많은 논쟁을 하고 있고 그녀가 상이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짜로 그녀는 영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는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전히 저커버그가 기업의 향방에 대한 결정을 하고 있으며, 그게 전부다”라고 말했다.

 

페이스북의 고도성장을 이끈 샌드버그

 

저커버그의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구글에서 잘 나가던 샌드버그는 왜 구글을 떠난 것일까? 지금이야 SNS의 맹주로 입지를 굳혔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페이스북의 미래는 불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이 인터넷의 파워를 이용, 사람들끼리 접촉하는 방식을 바꾸는 기회를 찾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커크패트릭에 따르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을 강력한 광고회사로 만들 목적으로 회사에 합류했다. 그녀는 경영진뿐 아니라 모든 직원과 동료가 같은 목표를 향해 일하기를 원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페이스북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광고 환경 중 하나를 제공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구글에서 좁아진 입지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샌드버그는 슈미트에게 구글의 COO 자리를 원한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이미 구글은 슈미트와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으로 이뤄진 트로이카 구도가 굳어진 상태여서 샌드버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페이스북에 합류한 샌드버그는 종횡무진 활약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커크패트릭은 “회사에 부임하자마자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의 최고 광고책임자이자 영업맨이 됐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구글에 있을 때부터 광고주들과 광범위한 인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인터넷 광고의 잠재력과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샌드버그가 합류한 이후 회사 내에서 그녀만큼 박식한 사람은 없었다고 페이스북의 누군가가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 계약 건, 페이스북 애드, 서비스의 급성장에 따른 매출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회사 내에서 페이스북이 진정한 비즈니스로 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광고에 대한 뿌리 깊은 모순이 잔재했다. 그 모순의 뿌리는 제품과 사용자 경험이 가장 우선순위에 있다고 확고히 믿는 CEO에 있었다. 샌드버그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인 셈이었다.”

 

물론 샌드버그는 그 숙제를 풀었다. 이른바 ‘소비자 참여형 광고(engagement ads)’를 개발해 페이스북에 대박을 안겨 준 것이다. 이것은 그때까지 노출만을 중시하던 광고에 동영상에 댓글을 달거나, 설문조사에 참여하거나, 무료 샘플을 신청하도록 유도하는 등 “사용자가 얼마나 관여했는가”를 도입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는데, 도입 첫해에만 1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페이스북에 안겨 주었다. 샌드버그가 합류한 이후 페이스북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민재용은 “대부분의 벤처 기업처럼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페이스북은 지속가능한 사업 모델도 없이 적자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큰 물’ 구글에서 놀던 샌드버그가 회사의 COO 자리를 맡은 뒤 상황은 급변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에 광고 사업을 접목시키며 3년 만에 회원 수를 7,000만 명에서 8억 명으로 늘렸다. 곳간이 비워가던 페이스북을 연간 10억 달러의 순익을 내는 거대 회사로 탈바꿈시켰다. 또 외부 인재 영입에 박차를 가해 저커버그 주변의 부족한 인재풀을 채워 회사의 내적 발전을 꾀하는데도 노력한다.”

 

저커버그와 샌드버그의 찰떡궁합

 

샌드버그와 저커버그는 상상 이상으로 죽이 잘 맞는 사이다. 예컨대 2010년 10월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은 페이스북의 성공에는 탁월한 대인관계 능력을 갖춘 샌드버그의 공로가 크게 작용했다고 보도했다. 다소 내성적인 성격의 저커버그가 웹사이트와 시스템에 집중한 반면 샌드버그는 비즈니스 구축과 확장, 대외 관계, 정책 분야를 담당하는 이상적인 ‘역할 분담’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대성공을 일구었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이사회의 일원으로 전 『워싱턴포스트』 회장이었던 도널드 E. 그레이엄도 비슷한 평가를 한다. 그는 “저커버그-샌드버그 ‘커플’은 (회사의 불확실성을 제거한) 제일 큰 비결”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샌드버그를 ‘저커버그의 가장 가치 있는 친구’이자 ‘조력자’로 보지만 일각에서는 그런 수준을 뛰어 넘어 ‘페이스북의 성인 감독관’이나 ‘저커버그의 큰 누나’로 보기도 한다. 이런 시각은 구글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에릭 슈미트의 역할에 빗댄 것이다. 슈미트가 버르장머리 없는 악동(惡童)과도 같았던 젊은 창업주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을 보좌 혹은 감독하며 구글을 일군 것처럼, 샌드버그 역시 아이디어와 패기는 넘쳤지만 사업 경험이 전무했던 저커버그를 컨트롤하며 페이스북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저커버그는 자만심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데 비해 다소 순진한 구석이 적지 않은 인물인데, 이에 반해 샌드버그는 대인관계에서 노련한 편이다. 『페이스북 이펙트』의 저자 데이비드 커크패트릭은 2009년 저커버그가 구글의 공동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만난 자리에서 페이지에게 왜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지를 비롯해 상대방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양한 질문을 하려고 하자 샌드버그가 저커버그를 꾸짖듯 그런 질문은 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샌드버그는 기자를 다루는 데도 능숙하다고 했다. 샌드버그가 페이스북에 입사했을 때 저커버그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저커버그와 찰떡궁합을 과시하고 있지만 샌드버그가 저커버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프라이버시 제로’의 ‘투명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저커버그는 SNS시대를 맞아 자기노출과 프라이버시 노출을 강조하지만 샌드버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굳이 공개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샌드버그의 말을 들어보자.

 

“마크는 진심으로 투명하고 열린 사회, 열린 세상에 대한 비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비전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마크는 사람들이 더 공개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합니다. 그에게는 목표를 향한 수단 이상이지만,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저커버그와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고 있는 샌드버그조차 저커버그가 추구하고 있는 ‘투명 사회’를 확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페미니즘을 위한 치어리더라고 말할 것”

 

앞서 말한 것처럼 샌드버그는 성 차별 문제에도 관심이 깊다. 샌드버그는 힐러리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발언도 수시로 하는데, 이는 아마도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 샌드버그는 의회에서 인턴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미국 정계의 거물이었던 팁 오닐 전 하원의장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기회가 생겼다. 샌드버그는 “오닐 전 의장은 나를 보고 와서 머리를 토닥이더니 내가 보좌하고 있는 지역 의원에게 ‘예쁘군요’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오닐은 샌드버그를 보고 딱 한 마디 물었다고 하는데, 그건 “넌 치어리더(pom-pom girl)니?”였다. 여권 신장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훗날 샌드버그는 “만약 팁 오닐이 살아 있다면 내가 페미니즘을 응원하는 치어리더라고 그에게 대답할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샌드버그는 2013년 3월 『린 인(Lean In)』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린 인’은 “기회에 달려들어라”라는 뜻으로 “여성들은 기회 앞에서 멈칫하며 주저한다(pulling back when we should be leaning in)”는 비판이 담긴 말이다. ‘린 인’은 2010년 사회적 강연 TED에서 했던 말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샌드버그는 여성들을 향해 “자신의 사회적 이력을 쌓는 과정에서 움츠리지(lean back) 말고 과감히 앞으로 나아가라(lean in)”고 주문했는데, 이 발언이 큰 호응을 얻자 본격적으로 성 차별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2011년 5월 17일 뉴욕에 있는 버나드 여자대학 졸업식에서 샌드버그는 사회가 여전히 남성위주로 이뤄져 있고, 자신도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한 후, “남성들이 더 야망이 있다. 야망의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성취의 격차도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경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달려들고 세상을 경영하겠다는 야망을 품기 바”란다고 했다.

 

이후 샌드버그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성공의 열쇠로 ‘야망’을 거론하며 여성들도 야망을 키워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는데, 『린 인』은 이런 내용을 구체화 한 책이다. 샌드버그는 책의 서문에서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기는 했지만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다. 자기 계발과 관련, 유익하게 읽히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자기 계발서도 아니다. 경력 분야에 대한 조언을 실었지만 경력 관리에 대한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페미니즘 선언서도 아니다. 물론 어느 정도 페미니즘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여성만큼이나 남성에게도 용기를 주고 싶다”고 말했지만, 『린 인』은 샌드버그 스스로 “(출간 뒤) 안 들어본 비난이 없다”고 털어놨을 정도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옹호론자들은 세계 최대 SNS의 2인자로 올라서기까지 여성으로 겪었던 경험을 소개하며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며 페미니스트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남보다 화려한 ‘스펙’과 배경을 가진 그가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노력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반 여성 직장인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고위직에 여성이 드문 현실을 두고 여성들에게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 것은 사회에 여전한 유리 천장(승진에서 보이지 않는 성차별)의 문제를 여성의 책임으로만 내몰았다는 지적이었다. 앤-마리 슬로터 프린스턴대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쓴 서평에서 “책에는 벽에 붙여놓을 만한 구호와 좋은 생각들로 가득하다. 문제는 그녀가 여성 내부의 장애물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비판했다.

 

샌드버그를 둘러싼 ‘잇 걸’ 논란

 

이런 비판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린 인』에서 샌드버그는 성공한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편견 때문에 여성들이 기회가 생겨도 주춤거리거나 뒤로 물러서는 일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언론인 섕커 베댄텀(Shankar Vedantam)이 세계적으로 최초의 여성 지도자들을 묘사한 경멸적 표현을 수집해서 발표한 적이 있다면서 “여성은 성과로 인정받을 때조차 우호적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는 ‘여전사 아틸라(Attila the Hen)’, 이스라엘의 첫 여성 수상인 골다 메이어(Golda Meir)는 ‘내각의 유일한 남자’로 불렸다.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전 미국 대통령은 인도의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를 ‘마귀할멈(the old witch)’이라고 불렀고, 대중은 독일의 현 수상인 앙겔라 메르켈을 ‘철의 여인(the iron frau)’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회의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기 위한 일환으로 샌드버그는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여성끼리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샌드버그는 “서로 보호해주는 여성이 많아질수록 상황은 개선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이 늘 그런 것은 아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회운동의 내부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운동가들이 열정적인 데다가 각자의 입장과 해결책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이 어리석게도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일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악수조차 거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 많은 활약을 한 두 사람이 손잡고 일했다면 어땠을까? 여성의 권리를 훨씬 크게 신장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이어 샌드버그는 “여성끼리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전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는 ‘다른 여성을 돕지 않은 여성에게는 지옥에서도 특별한 자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했다. 여성끼리 돕지 않는 행동에 따른 결과는 개인이 고통을 겪는 수준을 넘어선다. 여성 동료에게 여성이 품는 부정적 견해는 종종 객관적인 평가로 받아들여지고, 남성의 견해보다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며 이렇게 말한다.

 

“여성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여성을 경시하는 문화를 내면화해서 다시 내보낸다. 결과적으로 여성은 성차별주의의 피해자에 그치지 않고 가해자도 될 수 있다.”

 

샌드버그가 ‘페미니스트의 치어리더’가 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그래서일까? 샌드버그는 ‘감사의 말’에서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스타이넘의 비전과 능력에 대한 찬사를 보낸 후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내가 그녀의 말을 자주 인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혁명을 내면화하자(Internalizing the Revolution)’라는 표현은 글로리아가 한 말로, 그녀가 쓴 책의 제목 『내부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Within)』을 응용한 것이다.” ‘혁명을 내면화하자’는 『린 인』의 ‘서문’이다.

 

샌드버그를 둘러싼 가장 큰 논란 가운데 하나는 그녀를 ‘잇 걸(It Girl)’로 보는 시각이다. 2012년 5월 한 블로거가 『포브스』에 「셰릴 샌드버그는 킴 폴레이제이(Kim Polese)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실리콘밸리의 잇 걸(It Girl)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면서 불거진 것이다. 그는 초기 기술 분야에서 활약했던 사업가 킴을 1990년대 중반의 ‘선각자’로 묘사하면서 진정한 의미로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지만 “시기와 장소가 맞아 떨어졌고, 젊고 아름답고 말을 잘했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폴레이제이가 셰릴 샌드버그에게 좋은 경고가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잇 걸’은 섹시한 젊은 여자를 일컫는 말로, 한마디로 말해 샌드버그가 미모와 육체적 매력 덕을 봤기 때문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는 게 블로거의 주장인 셈이다. 샌드버그에겐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편견 어린 시각은 비단 샌드버그뿐만 아니라 실력과 함께 미모를 겸비한 성공한 여성에게 따라붙는 낙인이기도 하다. ‘잇 걸’을 둘러싼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잇 걸’에 대한 편견이 적지 않은 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점에서 ‘잇 걸’에 대한 본격적인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14년 11월 호에 실렸습니다.


기사입력: 2014/12/17 [20:45]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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