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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만든 영화 '카트'의 불편함
[정문순 칼럼] 배급사가 있는 '카트'는 시민단체용 영화가 아니다
 
정문순   기사입력  2014/12/04 [11:13]

가입한 사회단체에서 단체 관람을 추진하여 <카트>를 본지 며칠 후, 회원으로 있는 다른 시민단체에서도 <카트>를 관람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날짜만 다를 뿐 상영 장소, 시간도 똑같다. 우리 지역에서는 단체들을 중심으로 ‘카트’ 공동 관람이 붐처럼 일고 있다. 운동 단체들 사이에서는 이 영화를 꼭 봐주어야 한다는 암묵적 약속이라도 있는 듯하다.
 
<지슬>이나 <두 개의 문>도 그랬듯이 작품성 높은 독립영화의 경우 사회단체들이 공동 관람을 추진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런 행동에는 이 좋은 영화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이나, 상업적 영화의 홍수 속에 우리라도 안봐 주면 영화가 외면당하지 않을까 하는 조급함이 깃들어 있다. 물론 <카트>의 경우 독립영화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영화 내용상 독립영화의 성격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파업을 이렇게 빼어나게 만든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카트>는 만듦새가 깔끔하고 기름기가 쏙 빠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대결 구도를 그리는 작품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선과 악, 약자와 강자, 우리 편과 남의 편 등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도식의 유혹도 없고, 객관적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도 기울지 않는 미덕이 있다. 일하던 공간을 농성장으로 삼아 같이 먹고 자며 서로 격려하고 동지애로 뭉쳤지만 끝내 대오를 이탈한 동료를 서운해 하기보다 “네가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한 파업 주동 노동자의 모습도 감동을 준다. 평자들은 이 부분에 유념하여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매애에 관해 분석하기도 한다.
 
해고-조직화-파업-공권력의 침탈-대오 이탈-재결집 등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눈물, 흥분, 감동, 분노, 배신감 등의 격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아마추어 영화의 경우 이를 거르지 않고 관객에게 곧바로 호소하는 손쉬운 접근법을 선택한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 때까지 얼마든지 뜯어고칠 수 있고, 역량 있는 작가와 배우들을 동원할 수 있고, 제작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등 제작사의 자본력이 뒷받침된 영화라면 관객의 눈물을 짜내려고 유치하게 애쓸 필요가 없다. 관객의 정서적 동선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그들의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능력,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는 영화가 아니라 꼭 필요할 때 감정을 움직이는 영화라는 반응이 나오게 하려면 굴지의 노련한 제작사가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 드라마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갖추고 있고 당대 한국의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상징하는 노동자 파업은 독립영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업을 다룬 무수한 독립영화들 중 우리가 기억할 만한 것은 매우 드물다. 상업영화 <카트>에 와서야 파업, 그것도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대로 다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돈 없는 독립영화가 감당하기 힘든 어떤 한계를 입증해 주는지도 모른다. <카트>가 보인 군더더기 없음과 깔끔함이 돈 없이 열정으로 덤비는 독립영화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경지라면 결국 돈의 힘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트>는 상업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므로 관객의 흡인력을 이끌어낼 만큼 잘 만들어낸 것은 분명하지만, 불필요하다 싶은 가지를 쳐내는 깔끔함이 지나치다 보니 놓치거나 외면한 것들도 적지 않다. 영화의 소재가 된 이랜드 노동자 파업은 2008년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2년 연속 근무한 기간제 노동자의 경우 정규직이나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 회사가 마트 계산원 업무를 외주화한 데서 발단했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답시고 만든 법이 되레 비정규직을 궁지로 모는 모순을 알지 못하는 관객들이라면 영화에서 나오는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일개 회사만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 이랜드 노동자들이 500일이 넘는 기록적인 파업을 통해 불완전하나마 승리를 거둔 것은 이랜드 노동자들의 자체 역량만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면 노조 경험조차 없는 미조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어떤 결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한 대형 마트의 계산원 여성노동자들과 양심적인 남성 정규직 관리자에게만 시선이 머물러 있다. 영화가 당대의 노동 현안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 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함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영화는 생활비 벌려고 취업했다가 갑작스런 해고로 파업할 수밖에 없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넘어서지 못하며, 그런 점에서 영화의 초점은 우리 시대 가장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계급이자 가장 첨예한 사회 갈등을 담보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라 자신이 가족 생계를 떠맡고 있는 서민 여성들의 소박한 생존권 투쟁이다.
 
또 주요 인물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적 구조 때문에 불가피한 점은 감안하더라도, 파업이 몇몇 사람의 주도로 이루어진다고 설정한 것도 노동운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카트>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감응력은 있지만 사회 현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역량은 부족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상업영화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카트>에게 쏟아지는 한국영화 사상 비정규직 파업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라는 평가가 온당한지도 알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이야 틀리지 않지만, 자본은 자신과 태생적으로 적대적이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라도 돈이 되니까 그들을 기꺼이 다룰 뿐이다.
 
실리콘을 주입하여 코를 우뚝하게 성형한 상업적 배우가 마트 계산원을 연기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소재는 더 이상 독립영화만의 전담 영역은 아니다. 가난한 독립영화만이 감당하기에는 비정규직 문제가 비등점을 넘은 탓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상업영화이기에 파업을 실감 나고 설득력 있게 만들 수 있었던 영화를 시민단체들이 앞다투어 열심히 보아 주는 풍경은 씁쓸함을 자아낸다.
 
<카트> 영화를 걱정해 줄 시간에 아까운 독립영화 하나라도 더 살려주는 건 어떨지. <카트>는 굴지의 배급사를 끼고 있는 영화다. 적어도 상업영화의 홍수 속에 묻힐까봐 걱정해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영화를 재벌 소유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는 것에 흥분해야 할 정도로 우리네 문화적 역량이 취약한 것일까.<카트>를 시민단체용 영화로 만듦으로써 작품의 운신을 좁히게 만드는 행태는 그다지 온당하지도 않거니와 <카트> 스스로도 흡족해하지 않을 것 같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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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12/04 [11: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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