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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권리에 대하여
[류상태의 문화산책] 생명의 존엄을 단지 생존시간의 양으로 잴 수 있는가?
 
류상태   기사입력  2014/11/05 [12:23]

지난 11월 1일, 미국의 한 젊은 여성이 존엄사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악성 뇌종양을 앓던 그는 존엄사법이 허용된 오리건 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자신이 예고한 대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29년의 짧은 생을 마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존엄사 논쟁이 세계적으로 다시 들끓게 될 것 같다. 내가 이 논의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는, 나에게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 두 가지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통해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 생명의 존엄을 단지 생존시간의 양으로 잴 수는 없다


13년 전, 나는 건강하시던 아버지와 갑자기 사별했다. 당시 일흔을 막 넘기신 아버지는 아침 이른 시간에 운동을 하시다 쓰러져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신 채 불과 몇 시간 만에 운명하시고 말았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아버지께서 응급차로 병원에 실려 가셨을 때는 이미 정상적인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의사는 환자의 출혈이 심각하여 이미 뇌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수술이 성공하여 생명을 건진다 해도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90%를 넘는다고 말했다. 이런 상태에서 수술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족들이 빨리 상의하여 결정해 달라고 했다.


아들 5형제 중에 나를 제외한 형과 아우들은 일단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하지만 나는 수술을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아버지는 그 날 정오를 넘기자마자 숨을 거두셨다. 나는 지금도 수술을 포기하자는 내 말에 “너 아들 맞냐?”고 질책하는 듯했던 형과 아우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기억한다.


내가 수술을 반대한 이유는 평상시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소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없게 된다면 기꺼이 죽음을 택하고 싶다고 하셨다. 병으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면, 또는 누군가에게 의탁해야만 살 수 있는 처지가 된다면, 기어갈 힘만 있어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만일 아버지께서 의식이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틀림없이 수술을 거부하시리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나는 기꺼이 불효자식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뿐더러 내게도 아버지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같은 선택을 해달라고 가족과 지인들에게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은 6년 전에 겪었다. 어느 노인요양원에서 상담사와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나는 회복될 수 없는 병을 얻어 인생의 말년을 힘겹게 보내고 계신 어르신들의 처절한 삶을 보았다. 그곳엔 평균 연령 80이 넘은 어르신 120여 분이 계셨는데, 그분들을 만나며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한 어르신에게서 “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죽고 싶어. 정말이야. 내일 아침밥에 약을 넣어줘.”라는 애절한 말씀을 매일 아침마다 들었다. 치매에 걸려 어린아이의 의식을 가진 분 중에는 차라리 그 말년이 행복해 보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걸을 수도 없고 배변도 조절할 수 없어 요양보호사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의식은 온전한 어르신들 중에는 하루 빨리 이생에서의 삶을 접고 싶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시는 분들이 많았다.


2.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게 아닐까?


노인요양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사람이 존엄하게 살 권리도 충족되어야 하지만 존엄하게 죽을 권리도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투명한 논의를 방해하는 것이 종교, 특히 기독교인 것 같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은 오랫동안 신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아예 죽음에 대한 인간의 선택권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발칙한 도발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죽음을 자주적으로 선택할 권리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에 들어섰다.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건강상태에서 그 존엄성이 박탈당한다면, 존엄한 삶의 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연로하여, 또는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은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 수 없는데도, 당사자의 의사도 무시한 채 물리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삶의 질보다 단지 삶의 양, 즉 생존시간의 연장에만 의미를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생명의 존엄성이란, 단지 물리적인 생존시간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사람답게, 존엄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자연 상태라면 벌써 생을 마감했을 건강 상태에 있는 분들, 매일 매일을 고통으로 신음하는 분들, 또한 이제는 그만 생을 접기를 갈망하는 분들을 여전히 현대 의술에 의탁하여 본인의 의사는 무시한 채 물리적으로 연명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존엄하게 살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관점을 넓혀 생각해 보면, 지금 지구마을은 인간이라는 특종 생명체의 과다생존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나는 존엄사 문제를 바로 이 문제, 즉 지구마을의 생태 불균형 문제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잠시,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 한 마디를 소개하고 싶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지. 그런데 주변을 가차 없이 파괴하면서 오로지 자기 생존에만 집착하는 놈들이 둘 있어. 하나는 바이러스고, 또 하나는 인간이야...”


지금 인간이 지구의 자원을 무한정 사용하며 풍요를 누리는 대가로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생존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심지어는 소멸되고 있는가? 인간은 단지 경제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소나 돼지, 닭, 오리를 때로는 수만, 심지어 수십만 수백만씩 생매장하기도 하지 않는가? 인간이 이들의 생명을 이렇게 거둘 권리가 있는 것인지,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는 종교인들, 특히 인격신을 믿는다는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 앞에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지구마을에서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은 단지 인간의 풍요와 안락과 쾌락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심지어 동물을 사랑해야 한다며 육식을 금하거나 반려동물 보호운동을 펴는 사람들도 애견을 키우기 위해 성대수술과 중성화수술을 시키는 등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가 아닌지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지구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를 이렇게 다루면서도 생명의 존엄성을 말하고 ‘신의 영역’을 논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생명의 존엄성’을 단지 인간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신 앞에 정당한 것일까?


‘신의 뜻’을 늘 말하는 인격신 신앙인들에게 묻고 싶다. 신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일까? 진정으로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은 그가 창조하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종의 무한 번영을 추구하거나, 백세 시대를 앞당기려는 노력이 인간에게는 ‘생명존중’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지구마을의 생태균형을 깨뜨리며 다른 생명체에게 파멸을 불러 온다면 그것이 과연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체의 이기적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때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신의 뜻을 받드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3.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어떤 생명체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는 것,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신이 정한) 자연의 이치라면(필요 없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신은 예외라 치더라도),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는 것은 ‘존엄하게 살 권리’를 더욱 충족시키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제가 아닐까?


앞서 언급했듯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주적인 선택, 즉 존엄사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이면에는 종교권, 특히 기독교권의 절대적인 거부감이 크게 작용된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큰 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존엄성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존엄하게 살 권리도 마땅히 누려야 하지만, 존엄성을 훼손당하면서까지는 살지 않을 권리, 고통스럽게 살지는 않을 권리, 나아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서도 이제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존엄성이란, 양적인 것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 나는 정말 이 문제는 내 선택을 존중받고 싶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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