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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장군 지지 거부로 불교계 탄압이 10.27 법난"
[사람] 10.27법난 진상규명 공로로 총무원으로부터 상 받은 진관 스님
 
김철관   기사입력  2014/11/02 [00:11]
▲ 지난 31일 조계사에서 인터뷰를 한 진관 스님이다.     © 김철관

지난 1980년 전두환 장군의 대통령지지 성명 거부로 불교탄압이 시작됐고,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날조된 사건이 불교 10.27법난이다.

 
지난 불기 2558(2014)년 27일 오후 2시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10.27법난 제34주년 기념법회가 열렸고, 이날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진관 스님에게 표창을 했다. 진관 스님이 상을 받게 된 이유는 10.27법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사 진실규명과 인권보호에 기여했고, 10.27법난 진실규명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등 10.27법난 명예회복에 공헌한 바가 컸기 때문이다.
 
 진관 스님은 81년부터 10.27법난 진상규명운동을 펼쳤고, 34년이 된 2014년 10월 27일 법난기념일 행사 맞춰 조계사에서 정식으로 그 공을 인정한 상을 준 것이다. 바로 34년 만에 공식 활동이 인정된 셈이다. 
 
지난 31일 오후 조계사에서 상을 받은 당사자인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인 진관 스님을 만났다. 그는 10.27법난이 무슨 사건인지를 정확히 알려줬고, 진상규명을 하게 된 이유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먼저 신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10.27법난이 시작된 이유부터 설명했다.
 
“80년 10월 27일날 전두환 신군부 계엄사령부가 전국의 조계종 사찰과 천태종 사찰을 일시에 군사작전 하듯이 뒤져 마음에 들지 않는 스님들을 연행한 사건이다. 형식적인 연행의 목적은 불교계가 비리가 있다는 투서가 들어왔기 때문에 조사를 한다는 이유였다. 전국 표적자 스님 1000여명을 연행해 160명을 골랐고, 최종 추려 30여명의 스님을 범법자로 만들었다.” 
 
그는 “이런 상태에서 80년 신군부 계엄사령부는 불교계 조직을 와해시키기에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계엄군에 합세를 해 들어온 팀(스님)들이 있다. 올해로 법난이 일어난 지 34년이 됐으니 말을 한다. 탄성 스님이 계엄군의 선봉에서 들어왔다. 계엄군이 조계종의 조직을 조각을 한 것이다. 탄성 스님을 비롯해 고우 스님, 정명 스님 등이 조계종 전체를 3개월 동안 관리를 했다. 연행해 간 사람은 총무원장을 지낸 송월주 스님, 이해성 스님(도선사 주지), 유월탄 스님(강화도 전등사 주지), 탄허 스님(월정사), 월산 스님(불국사) 등이 계엄군에 끌려가 고초를 받았다.”
 
진관 스님은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해 불교계 신도들이 분노해 많이 개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렇게 계엄군들이 조계종과 천태종을 탄압을 했다. 3개월 간 신군부에서 조각한 조계사를 운영하다 3개월 후에 종단에서 첫 선거를 통해 총무원장 등 지도부를 뽑았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내려오게 됐다. 당시 내와 대학생불교연합(대불연)은 81년부터 5.18행사도 했고, 10.27일 법난 1주년 행사도 했다. 당시 두 행사에 스님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줄곧 지난 81년부터 10.27법난에 대한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제가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됐다. 82년에 경찰들이 광주 도청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도 5.18행사가 진행됐고, 나는 영혼을 위로하는 시낭송을 했다. 내가 시인이니까 시인은 당당하게 살다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82년에 조계사 대웅전에서 5.18과 10.27 법난에 대한 시낭송을 했다. 아쉬운 것은 당시 주옥같은 시를 남겨야 했는데, 당시 시낭송을 하고 불로 태워버려 하나도 없다.”
 
그는 “83년까지 이렇게 두 행사를 이어오다 84년에 승가대 학생들과 만나 10.27법난과 관련한 법회를 했다”고도 했다.
 
“당시 승가대 학생 300여명을 만나 4.19 묘지를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최초로 학생 승녀들이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됐다. 기존 스님들은 겁먹고 나오지 못할 때이다. 84년에 이런 운동을 진행하면서 광주도 방문하고, 문익환 목사(의장), 김승훈 신부(부의장), 정동익, 이부영 등 국민회의 지도부를 최초로 만나게 됐다. 그래서 국민회의 감사에 정동익과 나를 임명해 활동했다. 불교계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 없어 나를 감사로 앉혔다. 국민회의에서 좀 더 나아가 민통련이 만들어졌다. 민통련이 만들어 지면서 저항이 날로 심했고 당시 전두환 신군부도 사회운동단체들의 힘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진관 스님은 “바로 이로 인해 천주교 인권운동가와 불교 인권운동가가 만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고 도했다. 
 
“85년에 계속해 10.27법난과 5.18 규탄대회를 열었지만 당시만 해도 조계종 종단 자체에서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당한 시기였고, 10.27법난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등이 받아드려 10.27법난 국회청문회가 열렸다. 85년도 88년 올림픽준비가 한창일 때 민불연이 생겼다. 그때 민불연 활동을 하기 위한 스님을 찾으려 다녔다. 지선 스님, 청하 스님 등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 민불연 활동을 했다. 85년 86년 87년 함께하면서 계속 10.27법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87년 2월 7일 대회 때 박종철 고문사건 진상규명을 위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감옥에 갔고, 87년 6월 항쟁 때 지선 스님과 함께 감옥에 갔다. 87년 대우조선소 파업 때 노무현과 이상수 변호사 등과 공범이 돼 이소선 여사와 지선 스님 그리고 내가 마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감옥에 갔다.”
 
 
▲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진관 스님이다.     © 김철관
그는 “90년으로 넘어 오면서 그해 11월 20일 불교인권위원회를 창립했다”고 말했다. 
 
“당시 민통련 인권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민통련에 인권위원장인데 불교쪽에 인권위원회가 없어, NCC가서 어떻게 위원을 만드는가를 보고 불교인권위원회를 만들었다. 송월주, 용태룡 변호사, 한상범 교수 등이 첫 공동위원장을 맡았고, 당시 불교인권위원회를 발족해야 하는데 군사정부 눈치를 보느라 법당을 빌려 준 곳이 없었다. 그래서 동국대 정각원을 찾아 기습적으로 발족을 하게 됐다. 90년도 11월 20일날 <동아일보> 편집국장인 김중배 선생을 찾아가 불교 좀 살려 날라 애원했다. 불교인권위원회가 역사상 최초로 생겼는데, 언론에 다뤄 준 곳이 없다고 호소했다. 이튿날 <동아일보> 사회면 전면에 송월주 스님을 인터뷰했다. 국민들에게 반항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90년 이후부터 불교인권위원회가 정신대 할머니 집짓기 운동을 시작했다”고도 했다.           
 
 “당시 통도사 조실인 월하 스님이 1억 5000원을 기부했다. 부산 출신의 정관 스님이 정신대 할머니 나눔의 집 위원장이었기 때문이었고, 정신대 할머니들이 정관 스님 또래였기 때문에 노력을 많이 했다. 종정을 지낸 서옹 스님의 서체를 팔기도 했다. 서옹 스님도 정신대 할머니들과 또래였기 때문이다.” 
 
그는 “94년에 종단 개혁이 일어났다”며 “당시 사회운동 스님들이 막강해진 시기도 있었다”고 말했다.
 
“서희원 총무원장 몰아내고 10.27법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등 막강해졌다. 94년 총무원장을 잘못 뽑아, 다음 탄성 스님이 총무원장이 됐고 이어 송월주 총무원장 시대가 되면서 과거 보수적인 조직으로 원 위치했다. 10.27법난 진상규명을 해야한다고 해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는 “2000년 이후 한국일보 13층에서 10.27법난 진상규명위원회를 결성했다”며 “2005년 한국일보 10.27법난 진상규명 행사 때 삼보 스님이 칼로 할복을 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피력했다.
 
“당시 삼보 스님이 10.27법난 진상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울분에 못 이겨 행사 도중 칼로 배를 갈랐다. 총무원에서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을 주지 않으니 불교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함께 사용했다. 노무현 정부 때 과거사 위원회에다 이 문제를 제출해 10.27법난이라는 것이 정식으로 인정됐다.”
 
하지만 진관 스님은 “당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스님들을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을 하다보니 역할도 못했던 총무원이 알아서 10.27법난 관련 1500억원의 보상비를 가지게 됐다”고도 했다.
 
“과거사위원회에 까지 노력한 스님들보다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스님들이 나서 돈(보상)이 나오니 서로 하려고 했다. 결국 보상을 서울로 결정해 1500억을 조계종 총무원에서 현재 보관하고 있다.”
 
▲ 지난 10월 27일 법난 34주년을 맞아 진상규명 공로로 총무원장 명의 표창을 받은 진관 스님(오른쪽)이다.     © 김철관
그는 “지난 2005년도에 10.27법난에 대해 국가가 인정하고 보상이 됐다”며 “바로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10.27법난 진상규명운동을 한 나를 인정하고 이제야 총무원장 명의의 표창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관 스님은 “김영삼 정부 10.27 진상규명 청문회 때 당시 고초를 당했던 스님들이 담합을 해 아무도 청문회에 나가지 않았다”며 “청문회에 나가 '저기에 앉아 있는 전두환이가 우리를 탄압했다'고 했으면 보상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날 지관 스님은 불교계가 나아갈 방향도 제시했다, 한 마디로 국가 불교가 돼야 불교도 살고 국민도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가야, 신라, 고구려, 백제 등은 국가가 관리하는 불교였다. 지금도 불교 자체가 국가불교라야 한다. 국가와 불교가 함께 가야 하는데, 국가가 위기 때마다 불교탄압이 있어 왔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피인 아내의 도교를 받아 드리면서 불교 자체가 혼란이 와 고구려가 멸망의 길을 자초했다. 신라가 분열됐을 때는 불교도 어려웠다. 백제 때도 거칠부 때문에 왕이 힘을 못 써 불교가 역할을 못했고, 고려 때도 왕권이 불교와 함께 하지 않고, 대신들의 힘이 막강할 때 불교도 쇠퇴했다. 
 
조선 때도 30년 여년을 집권한 중종이 반정을 하고 임금이 됐을 때 조선은 임금의 나라가 아니라 신하의 나라라고 했다. 성리학과 함께 하면서 왕의 불교는 안 되다는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쳐 신하 불교를 만들었다. 이 때 왕권불교에서 신하불교로 전략하면서 승과제도를 폐지했다. 15년을 집권한 명종 때 황후에 의해 왕 중심의 불교를 회복시켜 30여 간 없어졌던 불교를 다시 회복시키는 계기가 됐다. 명종 아들이 집권하면서 신하불교로 다시 돌아가 불교가 쇠퇴했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선조가 신하 중심 불교로 돌아갔다.”
 
진관 스님은 “과거 불교가 왕도 정치를 표방했을 때 제대로 돌아갔고 불교가 바르게 갔다”며 “오늘 날은 대통령 중심에 맞는 불교를 해야 불교가 지탱할 수 있다”고 말했다.
 
“70년 동안 이 나라는 미국식 기독교를 접목시키면서 과거 불교를 단절시켰다. 이제 미국식 기독교 정치세력을 막아내야 한다. 그리고 불교 자체에서도 융성한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 불교계가 철학, 문학, 예술 등을 활성화시켜 맞대응을 해야 한다. 현재는 맞대응을 못하고 밀려 있다. 앞으로 학문을 하는 승녀 1000명을 만들어야 제대로 된 불교를 만들 수 있다. 우리 민족과 역사와 함께 하는 불교로 거듭나야 한다. 왕권불교 때 융성했던 불교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불교계가 중국, 태국 등과 동남아시아권 불교운동에 주도적으로 연대를 해야 한다”며 “기독교는 로마,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와 연대를 하고 있는데 불교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81년 첫 10.27법난 진상규명운동을 시작해 2005년 국가가 인정하고 보상을 받을 때까지 혼혈을 쏟은 불교인권위원회 대표인 진관 스님은 10.27법난, 5.18광주사태, 국가보안법 철폐 등 사회운동을 하다 수많은 옥고를 치렀다. 지난 87년은 박종철 열사, 6월 항쟁, 노동자대회 등에 참여했다가 연거푸 세 번에 걸쳐 구속이 되기도 했다. 96년 김영삼 문민정부 때도, 99년 김대중 국민의정부 때도 각각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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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11/02 [00:1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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