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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어머니” 남자현 지사가 활약한 하얼빈을 가다
[만주에서 찾아보는 배달겨레의 혼2] 중국인에게 존경받는 독립 대모, 비석없어
 
이윤옥   기사입력  2014/09/27 [09:57]

 “네 맞아요. 이곳이 외국인 묘지가 있던 터입니다.” 남자현 애국지사가 묻혔던 무덤을 찾아 찾아간 것은  어제 9월 25일 오후로  현재 이곳은 하얼빈 문화공원(文化公園)으로 바뀌어 높다란 관람차가 돌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왕봉의 (王鳳儀, 하얼빈공전대학 수학과 교수, 81살) 씨는 당시 무덤자리를 가리키며 친절한 안내를 해주었다.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조선이 독립을 원한다는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혈서와 자른 손가락을 흰 천에 싸서 당시 하얼빈에 와 있던 국제연맹 조사단에게 보내어 조선의 독립 의지를 호소하던 남자현 애국지사 (1872∼1933) 가 이곳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2년 전인 1932년의 일이다.
 

▲ 남자현 애국지사가 묻혔던 첫번째 무덤 (하얼빈 남강 외국인 무덤 앞에서 도다이쿠코 작가와 기자)이 있던 자리로 1930년 쯤 이장되었다.     © 이윤옥

 

▲ 남강 외국인 무덤이 있던 러시아정교회 건물 앞에서 무명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이윤옥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틀경)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한 남자현 애국지사는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고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혈서를 쓰면서 까지 이러한 일을 감행한 것이었다.
    
어제 연길에서 밤기차를 타고 12시간 만에 도착한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현장으로 한국인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독립운동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지만 이곳에서 활약한 여성독립운동가인 남자현 여사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자현 애국지사는 영남의 석학인 아버지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배웠으며 19살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의 의성 김씨 김영주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 김 씨는 결사보국(決死報國) 정신으로 의병에 참여하여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이듬해 유복자를 남기고 순국했다.
    
그러자 그는 핏덩어리 유복자 아들과 늙으신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때를 기다리다 46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들어갔다.
    
이후 남자현 애국지사의 활동은 남성들도 하기 어려운 험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는데 1925년에는 채찬·이청산 등과 함께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을 기도하였으며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안창호 외 47명이 중국경찰에 잡히자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할 정도로 그의 독립의지는 확고했고 실천력 또한 강했다. 
    
맨 처음 발을 들여 놓은 요녕성과 길림성을 거쳐 하얼빈으로 진출한 남자현 애국지사는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결심을 하게 되는데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토오(武藤信義)를 처단하하는 일에 뜻을 모으고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으로 잡입 한 것이다. 이때가 1933년 초였다. 그러나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혀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고 말았다.
    

▲ 남자현 애국지사가 잡혀 6개월간 옥고를 치룬 구 일본영사관 자리에는 화원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도 잡혀 있었던 곳이다.     © 이윤옥


 

▲ 두번 째 이장한 무덤 자리를 찾는 도다이쿠코 작가     © 이윤옥

 
당시 일본 형사들에게 잡혀 유치장에 구속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일로 남자현 애국지사 역시 이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하얼빈 시내의 구 일본영사관터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남자현 애국지사가  잡혀 6개월간 고문을 받던 곳이었으나 구 일본영사관은 헐리고 지금은 화원소학교(花園小學校)가 들어서 있었다.
    
남자현 애국지사는 이곳 영사관 유치장에서 다시 살아나갈 길이 보이지 않자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자 일제는 그제야 겨우 보석으로 석방하게 되지만 이미 그의 몸은 죽음 일보 직전 상태였다.
    
그러자 여사는 유복자인 아들 영달(英達)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건네면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유언하게 되는데 이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김구, 이승만 선생에게 이를 전달하게 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은 남자현 애국지사가 남긴 유언으로 1933년 8월 22일 그는 60살을 일기로 머나먼 땅 하얼빈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 이 자리가 두번째 이장한 자리로 지금은 화단만이 덩그마니 남아있다. 다알리아 꽃이 붉게 핀 화단 앞에선 기자 모습     © 이윤옥

 

▲ 남강 외국인 무덤이 헐려 두번째로 이전한 무덤자리는 현재 문화공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거의 유원지화 되어 있다. 이곳 안에 러시아정교회 건물 남아 있고 이 앞이 외국인 무덤이었으며 1958년에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따라 무덤을 없앤 것으로 보인다.     © 이윤옥

      
남자현 애국지사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조선 독립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는데 그가 단식으로 숨지자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신도시로 개발되는 바람에 이장되어 현재의 문화공원(文化公園)으로 옮겨졌다.
    
조선족 출신으로 자전거를 타고 항일유적지 현장을 찾아 중국 곳곳을 찾아 헤맨 강용권 씨는  그의 책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에서 1992년 6월 26일 남자현 무덤을 찾아 하얼빈 남감 무덤을 찾아 보았으나 이미 이전했음을 알고 현재 문화공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당시 문화공원에 이장했다는 무덤은 유원지를 만드는 바람에 제대로 관리가 안되고 있었고 강용권 씨가 나뒹구는 비석들을 훑어 보았으나 남자현 애국지사 비석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찾아 갔던 1992년으로 부터 22년이 지난 어제 현재는 이곳이 무덤이었는지도 알수 없을 만큼 공원화 되어 버렸고 무덤자리에는 화단만 덩그마니 조성되어 있었다. 아무런 팻말도 없이 말이다.
    
82년 전 남자현 애국지사가  맨처음 묻혔던 하얼빈 남강 외국인 묘지는 급격한 개발의 길로 들어섰음을 고층 빌딩들이 말없이 증언하고 있는 가운데 도다이쿠코 작가와 기자는 옛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이곳을 찾아 나섰으나 쉽사리 증언해줄 만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당시에 있던 러시아정교회(동정교회, 東正敎會)건물이 남아 있어 그 위치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 붉은 다알리아 꽃이 곱다. 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남자현 애국지사의 넋을 달래주는 것 같아 마음이 찡하다. 두번째 무덤자리지만 지금은 화단으로 꾸며져 있다.     © 이윤옥


  
문제는 두 번째로 이장한 곳이었다. 두 번째로 이장한 곳은 완전히 유원지화한 공원으로 이곳에 무덤이 있었을 것이란 상상은 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러시아정교회 건물이 남아 있어 다행히 무덤자리를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마침 이곳을 지나던 전직 하얼빈공전대학 수학과 교수 출신의 왕봉 씨의 도움으로 예전 이곳이 무덤이 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자현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찾아 하루 종일 발품을 판 도다이쿠코 작가와 기자는 구 일본영사관 터와 두 곳의 외국인 무덤자리를 확인하고는 공원 한켠 화단 벤치에 그만 주저앉았다. 다알리아 꽃이 활짝 핀 화단 자리가 외국인 무덤자리였다니 분명 이곳 어딘가에 남자현 애국지사의 넋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가슴이 찡하다. 올려다 본 가을하늘은 푸르른데 눈앞에는 높디높은 관람차만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흔적 없이 사라진 무덤이 야속하여 화단에 앉아 우리는 “독립은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라고 하던 남자현 애국지사의 유언을 오래도록 곱씹어 보았다. 할 수 있다면첫번째 무덤터와 두번째 무덤터에 작은 안내판이라도 세워놓았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윤옥 소장은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고 이를 토대로 미래의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외대 박사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민족자존심 고취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밝힌『사쿠라 훈민정음』인물과사상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항일여성독립운동가 20명을 그린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도서출판 얼레빗
*발로 뛴 일본 속의 한민족 역사 문화유적지를 파헤친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기』 바보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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