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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위안부' 망언에 대하여
[문화산책] ‘강자의 아픔’을 끌어안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
 
류상태   기사입력  2014/09/19 [19:37]

1. 감탄하지만 존경할 수는 없는 사람


매력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론 실소하게 만드는 사람,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혐오스런 감정도 갖게 하는 사람, 어떤 때는 감탄하게 만들지만 결코 존경할 수는 없는 사람이 가끔 있다. 나에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평생의 역작으로 삼는 <로마인 이야기>를 나는 매우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보다 더 재미있게 읽은 책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조금은 더 넓게 볼 수 있었다. 정치, 경제, 법률, 군사, 문화 뿐 아니라 인생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글로 만나는 시오노 나나미는 교양 있고 지혜로운 작가다. 무엇보다 그는 현상과 사물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기독교는 종교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였다.”는 말은 나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든 촌철살인의 명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에 도쿄에서 태어나서, 일본의 귀족 자녀들만 다닐 수 있는 학술원대학 철학과를 다녔다. 1963년에 동 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인 1964년에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거기서 공식 교육과정은 밟지 않고, 혼자 로마사를 연구하며 이 대작을 써냈다.


시오노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일년에 한권씩, 15권까지 내겠다고 독자들과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잘 지켜, 결국 전체 15권을 완성했다. 물론 나는 이 책을 모두 읽었다. 그것도 전권을 최소한 2번 이상, 어떤 책은 4~5번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책에 관해서는 편식이 심해 꽤 의미가 있다고, 또는 재미가 있다고 느껴지는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편이다.)


나는 지금도 이 책을 매우 괜찮은 도서로 주변에 소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 세상과 인생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기에, 특히 젊은이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수시로 실소를 금하지 못할 때도 많다. 너무나 예리하고 합리적인 성향의 작가인데, 어떤 부분에서는 급격히 균형감을 잃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로마인 이야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를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와 유대민족, 유대교, 기독교 등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저자의 예리하고 독특한 관점으로 담겨있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시오노의 해석은 은근히 반기독교적이고 냉소적이다. 기독교에 대해 그가 서술하는 내용을 접하다보면 “이런 열등한 종교에 로마제국이 정복당하다니, 기가 막혀서...”라고 혀를 끌끌 차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행간 곳곳에 흐르는 그의 반기독교적인 해석을 내가 이해하고 공감할 뿐 아니라 기꺼이 동의까지 하는 이유는, 나 역시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에 대해 유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기독교 서술에 관한 한 그의 시각과 기술이 매우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2. 로마제국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매혹된 작가의 한계


개인적으로 나는 시오노 나나미에게 큰 빚을 지고 있기도 하다. 내 대표작인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쓰면서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는 내가 로마와 기독교를 주제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로마인 이야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는 로마제국에 깊이 매료된 사람이다.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 얘기만 나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사람이 어떤 일에 깊이 빠지면 균형 감각을 잃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도를 넘어도 한참 넘는다. 평소에는 매우 이지적인 사람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 얘기만 나오면 어김없이 객관성을 잃고 만다.


이 책에서 시오노는 지금까지 웬만한 학자들이 보지 못했던 로마의 뛰어난 장점과, 대제국으로 융성할 수 있었던 원인을 탁월한 감각으로 진단한다. 마치 로마제국의 홍보대사가 된 것처럼, 로마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대변한다.


반면에 로마제국에 대항했던 세력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로마와 갈리아, 로마와 게르만, 로마와 페르시아, 로마와 유대 등 갈등이 벌어지는 현장마다 마치 종군기자라도 된 듯 샅샅이 써내려가는 그의 필설에서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이해심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언제나 로마의 정당성을 설파하기에 바쁘다. 왜 그런 것일까?


어쩌면 저자는 로마제국을 찬양함으로써 자신이 태어난 ‘대일본제국’을 변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로마제국은 천년 세월을 구가했는데, 일본제국은 한 세기도 지탱하지 못하고 망했다. 하여 실패한 제국 일본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천년 제국 로마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경외감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는 작가의 이성이 그 부분에서는 멈추어버린 것이 아닐까?


다음 구절은 당시 제국 로마의 포악성에 대한 시오노의 시각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다. “마키아벨리도 지적했듯이, 가혹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아예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 (로마인이야기 제2권 427쪽)


3. 망해가는 제국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천재의 비극인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시오노 나나미는 일본제국의 귀족가문 태생이다. 1937년생이니까 제국이 망하기 8년 전이다. 당시 조선이나 중국, 동남아 등에서 태어났다면 위안부가 끌려가는 모습을 직접 보았을 수도 있는 나이다.


그가 최근에 일본의 월간지인 <문예춘추> 10월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네덜란드 여자도 위안부로 삼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퍼지면 큰 일”이라며 “(일본 정부가) 그 전에 급히 손을 쓸 필요가 있다.”고 기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를 비롯해서, 자신들의 행태에 대해 도무지 역지사지할 줄 모르는 일본의 극우 정치인이나 역사학자, 작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오래 전, 서울의 어느 여자중학교 교목으로 재직할 때 느꼈던 점이다. 빼어나게 예쁜 여자 아이들 중에는 모든 걸 외모로 판단하는 아이들이 있다. 얼굴이건 몸매건 예쁘지 않은 아이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망가진 또 한 부류의 학생들이 있다. 천재나 수재로 태어난 학생들이다. 그들은 모든 걸 성적으로 판단한다. 그 아이들에게는 성적이 낮은 아이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아이는 차라리 평범한 외모를 갖고 태어나는 게 훨씬 낳았을 텐데... 저 아이는 차라리 수재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내면의 인간성이 저토록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을...”


우리 사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특히 엘리트층에 속해 있다는 사람들 중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하고 힘없이 사는 사람들은 천성이 게으르거나 아예 인간성이 부족한 사람, 심지어 사람 이하의 하찮은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늘 좋은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 늘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자라온 사람, 그래서 큰 시련 없이 성공한 사람일수록 평범한 삶의 가치를 놓치고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 “개나 소나...”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 특히나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로 위험한 것은, 그 무시가 자칫 경멸로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홀로코스트가 재현될 수도 있다.


아래 인용하는 글들은 모두 저자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했던 말이다. 시오노 나나미와 그의 동료들, 그러니까 일본제국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극우파 인물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인용한다.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그 지식 때문에 오히려 발상의 전환이나 비약을 방해받는 법이다.” (제3권 54쪽)


“자신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 사람은 무섭다.” (제3권 208쪽)


“지식과 교양이 반드시 지성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제5권 374쪽)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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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9/19 [19: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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