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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시민,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크룩생크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새롭게 발명해야
 
김영철   기사입력  2014/05/09 [23:56]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까?

정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정치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통해 정치에 참여할까? 바바라 크룩생크가 쓴 책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를 읽으며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 바바라 크룩생크가 쓴 책 <시민을 발명해야 한다>. 권력에 대한 해부서     © 갈무리
크룩생크는 ‘누가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가?’하는 측면이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하는 측면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권력에 대한 소유를 강조할 경우, 권력은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어 있을지라도 존재하는 것이며, 권력을 가진 통치자와 권력을 갖지 않은 피치자를 구분하듯이 권력을 소유한 쪽과 소유하지 않은 쪽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어느 당이 정권을 장악할 것인가?’, ‘국민들은 투표를 하고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것’ 등의 말들은 권력의 작동과정보다는 권력의 소유 측면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권력의 작동과정을 강조한다는 것은 어떤 말일까?

크룩생크는 '주체의 용법을 개조'하는 푸코, '타자의 권력과 권위에 종속된 사람으로서의 (예속)주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토크빌 등을 참조하며 주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주체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하는데, 그런 주체는 자기 행위의 주인이자 다른 사람의 권위에 종속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적인 시민이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워 보여도 그러한 자유는 권력의 작용에 좌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민주주의란 시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에도, 한편으로는 통치자이며 한편으로는 피치자인 주체의 이중성 개념이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소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행위의 주인이면서도 종속된다거나, 권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종속되면서도 행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그렇지만 권력 작동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적절한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함으로써 대상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상태를 고려해야만 하므로 권력은 대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의 대상 역시 권력에 강제되면서도 자율성을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유의 관점에서 보느냐, 작동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을 아주 다른 것으로 보게 된다.
 
크룩생크는 민주주의 통치에서 주체의 이중성 개념과 함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이 권력의 작동과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여긴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정치적인 것이라고 하면 국가를 떠올리게 되고, 사회적인 것은 국가와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에 의하면 19세기에 사회적인 것이 출현하는 상황에서 권력은 음주, 성, 사교, 인구, 화폐 등과 같은 개인의 습관, 욕망, 관심, 일상이라는 사소하고 평범한 영역에 도달하게 되었고,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구성하고 규제하게 되었다. 복지에 관한 것을 예로 들면 복지제공자와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돕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형성하며, 이들의 욕구를 채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투입하고, 그 욕망은 설득과 포섭의 도구로 변모하는데, 그렇게 되어서 사회 구성의 기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해관심사의 억제가 아니라 그것의 생산이 된다.

실업이나 빈곤, 범죄, 국민 건강, 재난 등 갖가지 것들이 사회문제라는 이름으로 정치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을 떠올리면, 사회적인 것이 정치인 것이라는 필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주체들의 욕망이 생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들이 강제되면, 욕망이 조작되거나 왜곡되는 등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노동자라는 이름과 근로자라는 이름이 아직까지도 갈등의 선상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주체의 정체성은 문제의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 같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권력의 작동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그 작동 과정에서는 발생하는 긴장관계와 저항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욕망과 주체를 생산하는 것, 즉 시민들이 스스로를 새롭게 발명함으로써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크룩생크의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공감하게 된다. 

* 글쓴이는 다중지성의 정원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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