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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의 불꽃 현장 ‘국립4.19민주묘지’
[논단] 민주열사들의 장렬한 죽음이 헛되지 않는 대한민국이길 바라며
 
이윤옥   기사입력  2014/04/19 [10:45]
거리에 불붙은 4월의 혼을 보라
내가 그날 보았던
짓붉은 피의 뜨거운 여울
두 주먹에 정의를 불끈 쥔
거대한 항거를 보라

헛되이 만용을 부리지 않고
그들은 역사와 힘으로 싸웠다
핍박을 향하여 내 던진
장엄한 희생을 보라

-윤후명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4.19 힘을 보라” 가운데-
 
▲ 국립 4.19민주묘지 둘레에는 붉은 영산홍이 피어 그날의 붉은 피를 느끼게 한다.     © 이윤옥
 
오늘은 4.19혁명 54주년을 맞는 날이다. 번잡한 오늘을 피해 어제 기자는 수유리에 있는 국립 4.19민주묘지에 다녀왔다. 위 시는 4.19민주묘지 한켠 돌 벽에 새겨진 시다. 그날의 함성을 말하는 듯 피를 토해내는 노래들이 돌벽에 가득하다. 
 
돌벽 건너편에는 작은 태극기를 앞앞이 꽂아둔 그날의 희생자들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덤 둘레에는 짙붉은 영산홍이 하나둘 피어나 그날 핏빛 영혼들의 자유를 향한 울부짖음을 상기시켰다.

“정선학, 광화문 시위 도중 총상(1960.4.19.)”, “안병달, 경무대 앞서 총상(1960.4.19.)” 등 저 마다 저항의 흔적을 안고 불의에 항거하다 숨진 이들이 말없이 잠들어 있는 국립 4.19민주묘지에는 오늘 있을 54주년 기념식을 위해 기념탑 아래 식장을 꾸미느라 분주했다. 

▲ 4.19민주묘지에는 그날을 상징적으로 그린 조각상이 있다. 총을 쏘는 경찰과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고 항거하는 대학생들     © 이윤옥
▲ 4.19민주묘지 돌조각상은 총을 쏘는 경찰 뒤에 독재 권력자 상징을 넣었다.     © 이윤옥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이 발견된 게 도화선이 됐죠.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서울 서부지역에선 홍익대와 연세대가 시위를 주도했죠.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렸습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사망 21명, 부상 172명). 살인 진압은 국민을 격노시켰고, 결국 엿새 후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홍익대 총학생회장(학도호국단 학생위원장)이었던 민병천 4ㆍ19혁명공로자회 회장은한국일보(2010.1.10)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민 회장은 "문민정부에 와서 4ㆍ19가 혁명으로 복권됐지만 우리 뒷 세대들은 그 내용을 잘 몰라요. 정치인조차 말입니다. 일전엔 정부가 4ㆍ19를 데모로 폄하한 동영상을 학교에 배포했다가 장관이 우리에게 사과하기도 했죠.” 라는 말을 했다.

민 회장의 말처럼 4.19혁명에 대한 당시 대다수의 언론 보도는 ‘데모’로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독재정부는 데모를 이적행위(利敵行爲)로 간주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은 이승만 정권의 폭정(暴政)이 이적(利敵)이라고 맞섰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항거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승만 정권은 19일 오후 1시를 기해 국무원 공고 82호로 서울시 일원에 계엄을 선포한다. 이어 3시간 뒤에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주요도시에 계엄 확대를 실시했다.

▲ 1960년 4월 20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데모‘라고 표현했고 비상계엄 선포등을 보도하고 있다.     ©이윤옥

이승만 정권은 탱크부대를 앞세우고 병력을 수도 서울로 이동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수유리 국립 4.19민주 묘지의 무덤 앞 돌 비석에는 그날의 핏자국처럼 선명한 글씨로 광화문 한 복판에서의 총상을 기록해두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고려대학교 학생 3,000명은 18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안암동 교정에서 동대문, 종로, 광화문을 거쳐 국회의사당에 이르는 5킬로미터를 걸으며 데모를 감행했다. 이에 앞서 학생들은 마산 시위 중 잡혀간 학생 석방, 학문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는 1960년 4월 19일 동아일보 조간보도다. 그래서일까? 기념식이 열리기 하루 전인 어제 찾은 4.19 기념탑 앞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3,40명씩 무리를 지어 참배를 하고 있었다. 한 학생에게 물어보니 참배하러 온 고려대 학생은 2,000명가량이라고 했다. 긴 참배행렬에도 학생들은 질서 정연하게 숙연한 모습으로 불의에 저항하다 숨져간 선배들의 저항정신을 기리고 있었다.

4.19묘지 경내에는 이들 학생들 말고도 많은 시민들이 나와 공원을 산책하듯 무덤 둘레에 심어둔 봄꽃들을 보면서 4.19의 의미를 새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근처에 산다는 시민 주영순 (45살, 도봉동) 씨는 초등학생 아들에게 4.19혁명을 알려주기 위해 찾았다면서 “정부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4.19 정신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4.19 혁명 정신이야말로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지킨 민주주의의 값진 열매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 4.19민주묘지 기념탑 아래 꾸며진 기념식장에서 질서정영ㄴ하게 뫼절하는 고려대학생들     © 이윤옥
▲ 4.19 하루 전에 이곳을 찾은 대학생들이 차분하게 뫼절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이윤옥


4·19 민주혁명,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 불리는 4.19 혁명은 문민정부 때부터 혁명으로 승격되었다. 기념식 하루 전이라 그런지 기념식장을 꾸미는 작업으로 기념탑 앞은 다소 어수선 했지만 국립 4.19민주묘지는 집 근처 공원처럼 아늑한 느낌이었다. 

한분 한분 무덤을 돌아보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이 뿌옇게 구름이 잔뜩 꼈다. 하늘과는 달리 무덤 둘레에 핀 영산홍만은 붉은 빛이 선명했다. 기념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반가운 까치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무덤 빗돌에 앉아 무어라고 지저귄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문득, “가벼운 속삭임으로라도 좋다, 나에게 슬기로운 역사를 말해주려무나”라고 노래한 장만영 시인의 ‘4.19 젊은 넋들 앞에’가 떠오른다. 불의에 항거하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숨져간 민주열사들의 장렬한 죽음이 헛되지 않는 대한민국이길 바라며 영령들이 잠든 무덤을 뒤로했다. 
 
▲ "4·19민주묘지 빗돌에 까치가 앉아 있다."     © 이윤옥
이윤옥 소장은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서로 제대로 된 모습을 보고 이를 토대로 미래의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외대 박사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민족자존심 고취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말 속의 일본말 찌꺼기를 밝힌『사쿠라 훈민정음』인물과사상
*친일문학인 풍자시집 『사쿠라 불나방』도서출판 얼레빗
*항일여성독립운동가 20명을 그린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도서출판 얼레빗
*발로 뛴 일본 속의 한민족 역사 문화유적지를 파헤친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 답사기』 바보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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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4/19 [10:4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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