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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김시습의 삶과 수락산의 정취
수락산 가을 산행..자연과 역사 느껴
 
김철관   기사입력  2013/10/19 [17:43]
▲ 수락산 바위     © 김철관
도시의 복잡한 생활을 뒤로하고 수락산 산행에서 산과 바위, 맑은 물 등 자연과 함께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의 올곧은 삶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바위로 둘러싸인 수락산, 아직 가을 오색단풍이 물들지는 않았지만, 바위와 푸른 산,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주인공이며, 생육신으로 잘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의 혼과 삶을 느낄 수 있는 산행이어서 너무 좋았다.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1번 출구에서 소방서를 지나 은빛아파트 방향으로 가면 수락산 입구가 나온다. 그 입구를 따라 쭉 올라가면 등산길의 정석코스인 깔닥고개 쪽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수락산역에서 은빛아파트를 끼고 좌측인 식당 덕본집 방향으로 가면 오솔길이 나오고 그쪽 방향을 쭉 따라 가면 매월정(梅月亭) 쪽으로 향하는 수락산 등반길이 나온다. 이번 산행은 정규 코스(수락산입구-깔닥고개- 매월정)가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코스(수락산입구-계곡길(개울골)- 매월정)를 택했다.

▲ 수락산에서 내려다 본 의정부     © 김철관
오솔길 따라 개울골이 나오고 그쪽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 세조 때 생육신으로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을 기리는 정자 ‘매월정’이 나온다.

18일(금요일) 오전 10시 30분 수락산역 은빛아파트를 끼고 개울골을 통해 수락산 등반길에 올랐다. 직장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함께 하는 체련대회의 성격이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산행이었다. 주최 측에서 약 한 시간 산행코스를 잡았고, 그에 맞춘 산행 프로그램이 개울골을 따라 매월정을 종점으로 하는 코스였다. 현재 강원도 설악산은 단풍놀이가 한창이라지만 수락산은 그리 오색단풍이 물들지 않았다.

단풍은 구경할 수 없었지만 산행하기에 너무 좋은 화창한 날씨였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산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개울골 갈림길’ 이라는 표시판이 나오고 그곳 능선에서 경기도 의정부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멀리 도봉산 정상도 보였다. 이곳을 조금 지나자 의정부 쪽을 향한 멋진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바위를 대상으로 의정부시가 나오게 사진을 촬영했다. 장군처럼 우뚝 서 도시(의정부)를 지키는 바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 수락산     © 김철관
▲ 김시습의 시     © 김철관
바위능선 몇 곳을 통과하니, 반가운 정자인 종착지 '매월정'이 나왔다. 누군가 버리고 간 ‘고양이’가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었고 ‘아웅’하면서 나를 반기는 듯했다. 고양이의 깔끔한 모습을 보니,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왜 이런 깊은 산에 누가 고양이를 버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정자에 오른 탓에 함께 걸었던 동료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나 둘씩 모습을 나타내고, 낙오자 없이 모두 매월정에 모였다. 먼저 와 매월정에서 쉬고 있던 등산객들이 우리 일행이 차츰차츰 늘어나자 자리를 비켜줬다. 매월정 주변에는 김시습이 쓴 시를 이곳저곳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먼저 주변 시들을 일일이 읽어 봤다. 구절구절 마음에 와 닿는 시들이 김시습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 매월정     © 김철관

수락산의 남은 노을
김시습

한점 두점 떨어지는 노을 저 멀리
서너마리 외로운 따오기 돌아온다
봉우리 높아 산허리의 그림자 덤으로 본다
물 줄어드니 정태낀 물 드러나고
가는 기러기 낮에 맴돌며 건너지 못하는데
겨울 가마귀 깃들려다 도로 놀라 난다
하늘은 한없이 넓은데 뜻도 끝이 있나
붉은 빛 머금은 그림자 밝은 빛에 흔들린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누구일까. 세조 왕위 찬탈에도 단종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떠돌이의 삶을 영위했지만 배운 것은 반드시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훗날 율곡 이이는 김시습을 가리켜 ‘백세의 스승’이라는 칭송하기도 했다.

김시습은 3살 때 한 시를 지어 동네 신동으로 불리었고, 궁궐에 까지 소문나 당시 세종대왕은 어린 김시습을 불러 여러 가지 주제를 주고 시를 지어보라고 했는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세종이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김시습은 세종대왕이 총애한 신동이었다.

김시습은 21세 때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몰아내는 왕위 찬탈에 격분해 그동안 읽었던 책을 모두 불태웠다. 이후 머리를 깎고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으로 스님이 됐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은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린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은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돼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사람들이지만, 생육신은 살아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하며 벼슬길을 권하는 세조의 부름을 거역한 사람들이다. 
 
▲ 기념촬영     © 김철관
김시습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 거열형을 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현재 묘가 있는 노량진에 매장한 사람이다. 세조가 두려워 아무도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을 때 사육신의 시신을 하나하나 바랑에 담아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묻었다.

지방을 떠돌던 그는 성종(2년, 1471년) 때 서울로 올라와 주변 수락산에 은거한다. 바로 수락산 내원암 인근에서 10여 년간 생활을 했다.

매월당을 기리는 이곳 정자(매월정) 주변은 아니었지만 수락산이란 테두리 내에서 김시습은 생활을 했다. 주로 경기도 별내면에 있는 절 내원암 주변에서 집을 짓고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매월정에 모여 김시습을 생각하며 산행 동료들이 가지고 온, 돼지 족발에 막걸리 그리고 떡(쑥떡, 모시떡)과 과일, 영양갱과 초콜릿, 매실차, 솔차 등을 마구 먹고 마셨다. 땀을 흘리며 산행 끝에 먹은 음식은 꿀맛 그 자체였다. 정자 주변에서 홀로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에게 족발이며, 떡을 던져 주니 순식간에 먹어 치운 모습도 정겹게 느껴졌다. 음식을 먹은 후 매월정(팔각정)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 수락산 계곡의 웅덩이     © 김철관
그리고 곧바로 깔닥고개 쪽을 향해 하산행을 시작했다. 깔닥고개를 지나 하산 길 주변 개울가 웅덩이에 수정처럼 맑게 고인 물을 보면서 가정, 직장 등 도시생활에서 찌든 동료들의 복잡한 마음을 정화시겨 주길 간절히 바랐다. 이번 등산길에서의 새로움이란 산과 정자, 바위, 물 등 자연과 어우러져, 생육신 김시습이라는 인물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스스로 본류에 뒤섞여 흐르기를 거부하고 독창적인 삶과 문학을 창조했던 매월당 김시습의 발자취가 수락산에 남아 있어 그 정기를 조금이나마 경험했다는 사실이 이번 산행에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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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0/19 [17:4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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