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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혼으로 충전된 ‘생산적 사보타지’의 정치
[책동네]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동물혼』, 자율주의 이론가의 역작
 
이성혁
1.

▲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동물혼』(원제 Animal Spirits, 원서 출간은 2008년     © 갈무리
   또 한 사람의 자율주의 맑스주의자가 쓴 책이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는 생소한 이름인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동물혼』(원제 Animal Spirits, 원서 출간은 2008년)이 그것이다. 파스퀴넬리는 1974년생인 젊은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그의 책이 본격적으로 소개됨에 따라 현재 자율주의 맑스주의가 젊은 세대의 이론과 실천을 끌어당길 정도로 견인력이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 자율주의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이론을 통해 주로 소개되었다. 빠울로 비르노의 『다중』과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의 논문을 모은 편집서가 출판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안또니오 네그리와 그의 동료인 마이클 하트의 저작 소개에 비하면 다른 자율주의자들의 글의 번역은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년부터 프랑코 베라르디(비포)의 저작 네 권,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저작 두 권, 마우리치오 라짜라토의 단행본인 『부채인간』이 번역되는 등, 그간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율주의자들의 저서가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됨으로써 자율주의자들이 폭넓은 영역에서 다양한 이론과 실천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 번역서들의 원서들 역시 최근에 간행된 것들로, 자율주의자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 위기와 저항 운동을 어떠한 관점에서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자율주의 맑스주의자들은 2000년대 후반에 일어난 금융위기와 재정위기 분석을 통해 21세기 자본주의의 특질을 ‘전통 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독창적으로 분석하면서, 현 시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저항 운동과 코뮤니즘의 구성을 탐색해 나가고 있다. 맛떼오 파스퀴넬리의 『동물혼』 역시 이러한 자율주의 맑스주의자들의 이론적•실천적 노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한국에서 파스퀴넬리는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연구공간 L 엮음, 난장, 2012))이라는 책에 번역되어 실린 논문 「기계적 자본과 네트워크 잉여가치」을 통해 본격적인 소개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동물혼』은 프랑코 베라르디(비포)의 『미래 이후』(난장, 2013)에도 간략하게나마 호의적으로 소개된 바 있는 책으로, 같은 이름의 저작(한국에선 『야성적 충동』(랜덤하우스 코리아, 2009)이란 제목으로 번역됨)을 낸 “애커로프와 쉴러보다도 위기의 근원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포는 『동물혼』의 주장을 “사회적 생산의 가상화가 살아 있는 관계들의 필요조건들을 파괴하며, 인지노동자들의 살아 있는 에너지를 흡수하고 무력화시킴으로써 기생물의 확산을 초래했다는 것”(『미래 이후』, 220쪽)이라고 요약하고 있다.1)

   그런데 파스퀴넬리는 비포와 함께 자율주의자라고 하겠지만 비포와 의견을 달리 하는 면이 있다. 이는 비포가 자신의 현대 사회에 대한 인식에서 쟝 보드리야르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반면에 파스퀴넬리는 보드리야르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라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비포에게서는 다소 보드리야르식의 비관주의적인 의식이 엿보인다면, ‘동물혼’이라는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파스퀴넬리는 인지 자본과 같은 기생적인 시스템에서뿐만 아니라 시스템 배면에도 존재하는 다중의 야성적인 주체성 또한 강조한다.    
                           
2.

   파스퀴넬리의 보드리야르에 대한 비판은 이 책에서 「간주곡-기호의 소용돌이 속 보드리야르」라는 절을 따로 마련할 정도인데, 그 비판은 “생산 기계와의 모든 연결들을 포기하고 기호의 인식론적 유혹을 받아들”(127쪽)이는 보드리야르의 이론이 “코드의 밀실 공포증”(128쪽)에 다름아니며 “시스템에 대한 멋스러운 시체애호에 탐닉한다”(127-129쪽)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러한 출구 전략 없는 보드리야르의 공포증은 “오직 사회적 묵시록이나 자살로 끝날 수밖에 없”(129쪽)다면서, 저자는 이에 반해 “새로운 기호경제의 기생적 관계들과 비대칭들을 인식”(130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호경제는 자립해 있는 무엇이 아니고 물질적인 기생체가 붙어 있어서, “잉여는 여전히 유연하게 물질적이며, 가끔 비물질적 기호들을 통해 조직된다”(130쪽)는 것이다.            

   또한 파스퀴넬리는 한국에서 인기 높은 지젝 역시 출구 없는 ‘이데올로기 코드의 밀실공포증’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라고 비판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지젝주의’의 호화로운 라캉식 언어분석과 이를 통한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해 파스퀴넬리는, “오직 심리언어학적 분석에 의거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모든 환등幻燈 뒤에서 작동하는 어떠한 잉여경제 모델도 제공하지 못하는 접근법으로 정의”(281쪽)한다. 이러한 접근법에 따르면 “모든 실재는 결국 이데올로기적인 유령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흡수되게” 되며 “코드로부터의 탈출구는 존재하지”(334쪽) 않고, “모든 저항 행위가 지배체제의 코드를 강화”(335쪽)할 뿐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젝에 대한 비판은 다소 과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아마도 파스퀴넬리가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젝의 사유는 1990년대의 그것인 것 같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지젝은 코뮤니즘을 내세우고 레닌의 귀환을 주장하기도 하면서 여러 저항 운동에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파스퀴넬리의 비판은 ‘지젝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다중의 ‘반대전략’에 대해 결국 지배 담론을 굳건하게 할 뿐인 순진함을 보여줄 뿐이라고 비난한 예술 집단 <BAVO>에 맞춰진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코뮤니즘을 주창한 지젝의 최근 작업 역시 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 및 코뮨주의 역사와 현대 이론가들의 이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설과 논평에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지젝이 이데올로기 뒤에서 작동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동학을 새로이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파스퀴넬리의 비판은 여전히 적확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저작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시도하는 이론적 노력을 볼 수 없으며, 그렇기에 그는 당대에서 정치적 주체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 탐구보다는 다만 코뮤니즘의 대의에 용기를 갖고 같이 참여하자는 권유만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2)

   여하튼, 파스퀴넬리가 보기에 ‘코드의 밀실공포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보드리야르나 지젝에게서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분리의 하위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종교를 유포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파스퀴넬리는 미디어 영역들을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리해내고 있는 이들 저자들을 “코드의 감옥 안에서 모든 잠재적인 정치적 행위를 봉쇄하고 있는 전형적인 서양식 언어 물신주의의 징후로 간주될 수 있을 것”(21쪽)이라고 지적하면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인 분리의 하위종교에 이들 자신이 빠져버려서 저항의 출구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분리의 이데올로기는 이 책이 주로 조명하고 있는 세 영역에서의 이데올로기들, 즉 디지털 네트워크들과 소위 ‘자유문화주의’, 도시에서의 문화 산업과 ‘창조성’이라는 과대광고, 미디어 스케이프의 전쟁 포르노와 인터넷 포르노에 대한 히스테리적인 ‘좌익 청교도주의’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파스퀴넬리의 생각이다. 그는 “각각의 영역은 그 자신의 특수한 종류의 비대칭적 갈등을 은폐”하고 있다면서, “조르조 아감벤이 제시한 것처럼, 이러한 은폐된 분리들을 세속화하는 것이 도래할 정치 세대들의 정치적 과제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1-22쪽)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디지털 네트워크, 도시 공간의 예술화(젠트리피케이션), 미디어 스케이프라는, 육질성으로부터 분리된 듯이 보이는 비물질적인 공유지를 세속화하고자 그 공유지에 ‘서식’하고 있는 다중의 ‘동물혼’(기생체, 히드라, 독수리라는 개념적 형상들로 가시화되는)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3.
 
   이 책에 따르면, ‘동물혼’이란 기이한 개념은 케인즈가 처음 제시한 것이다. 케인즈는 “주식시장의 배후에서 투쟁하고 경기순환을 압박하는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힘들을” ‘animal spirits’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파스퀴넬리는 이들 야수적 힘들이 다중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보고, 그 힘들을 무시하거니 외면할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자기가치화’(네그리)인 사보타지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동물혼’을 케인즈와는 다른 함의와 의의를 가진 긍정적인 개념으로 전환시켜서 다중의 대안적인 주체성을 모색하는 데에 핵심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빠올로 비르노의 ‘악’에 대한 논의를 따라서, 파스퀴넬리는 ‘동물혼’ 개념이 “인류의 양가적이고 갈등적인 본능을 인정”하면서 “비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생산의 삶형태적 무의식을 드러”(50-51쪽)내리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혼을 지닌 동물들의 몸을 “그 신체의 모든 변이들-인지적, 정동적, 리비도적, 신체적[변이들」속에서 기술되는 다중들의 생산적 엔진”(51쪽)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산 노동의 또 다른 이름”인 ‘동물몸’에 대해 지적 담론이 “무지한 채로 있는 동안, 자본주의는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돈을 흡수하고 제국은 그 동물적 에너지를 제국적 경호의 힘으로 전환”(51쪽)해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동물몸’과 ‘동물혼’은 실천적으로도 반드시 인식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에 그는 ‘동물혼’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다중이 선하다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동물력이 자본주의의, 아니 더 나아가 새로운 파시즘의 어두운 재료가 되기 전에 생산적인 동물력을 회복”(53-54쪽)하는 것을 이 책의 목적으로 삼은 파스퀴넬리는, “데모크라시[민주주의, 민중-정치]democracy는 데몬크라시[악마-정치]demoncracy로, 즉 공통적인 것을 다스리기 위한 자연적 본능들의 양가성을 긍정하는 정치로 대체되어야 한다”(54쪽)는 독특한 생각으로까지 나아간다. 파시즘으로부터 다중의 악마적 측면을 구해내어 자기가치화의 힘으로 전화시키자는 파스퀴넬리의 생각은 매력적이면서도 악에 지나치게 접근한다는 면에서 위험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렇다고 그가 악을 찬양하는 심미주의나 낭만주의로 빠진 것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그는 비르노가 “‘과잉충동’을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의 해독제로, 하나의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는”(65쪽) 방안을 사유하면서 끌어온, 악을 환대함으로써 악을 ‘억제’한다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카테콘’ 개념을 수용한다. 

   파스퀴넬리는 ‘카테콘’ 개념을 “권력의 현재懸在적이고 잠재적인 내용을 포착하고, 자기의 독을 바꾸어 누그러뜨릴 수 있는” 권력과 욕망의 양가적인 “머리 둘 달린 존재의 모델”(69-70쪽)로서 받아들인다. 이를 보면 그가 다중의 동물혼을 활성화하고자 하면서도 그 동물혼에 내재되어 있을 독성을 찬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책이 의도하는 바는, “자연적 본능들이 어떻게 과학 기술 기반의 보다 비물질적인 형태들 속에서조차 현대 생산의 물질적 토대의 일부를 이루는지 연구”(테크노크라시의 합리성 역시 “대중들의 본능적 충동들만큼이나 동물적”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하는 동시에 “포획의 국가 장치보다는 동물혼의 자율적이고 생산적인 힘을 강조하는 것”(77쪽)이다.

   파스퀴넬리에 따르면, ‘데몬크라시’란,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청교도주의’에서처럼 다중의 동물적 활력(에너지)을 제거하지 않고, 다중의 양가성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정치다. 그것은 “머리 둘 달린 윤리의 분자적인 다이어그램”(70쪽)인 ‘카테콘’을 제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구축과 제조는 ‘분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불안정하다. 그래서 그는 “비르노는 마침내 다중이 가장 불안정한 동물, 즉 자기파괴적 본능들과 자기조직화 형태들-갈등으로서의 언어와 제도로서의 언어-에 의해 교차되는, 그렇지만 두 극들 사이에서 일종의 포스트모던적 결정 불가능성에 의해 분절되는 갈등적 히드라라고 선언”(68쪽)했다고 비르노를 인용한다. 이에 따르면, 다중은 머리 둘 달린 독수리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머리를 잡아먹으면서 스스로 증식하는 히드라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파스퀴넬리는, 미셸 세르에게서 빌려온 ‘기생체’라는 개념적 동물 형상에 대해 논하고 있다. “기생체는 경제와 과학기술의 비대칭성들을 위한 분자적 모델을 제공”하며 “경제의 상이한 지층들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들을 이해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모델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서, “경제, 지식, 과학기술의 생물학적 뿌리들을 미생물의 수준까지 내려가 기술함으로써 비르노의 시각을 확장”(86-87쪽)하는 개념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기생체 되기’가 주목되는데, 그 기생체는 “새로운 공유지에 대해서도 역시 금융적 술수를 부림으로써 시장을 부패시키는, 투기와 지대의 신흥 체제”에서 “다중의 산 노동을 착취”(88쪽)한다. 그렇지만 그는 “기생체의 신진대사를 기술하는 것은 또한 정치적 행동의 새로운 좌표를 암시”(88쪽)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전술적 동맹에서 전략적 사보타주로 이동하는 또 하나의, 정치적으로 양가적인 다이어그램”(89쪽)을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는 언급을 잊지 않는다.           

4.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개념적 동물형상들-기생체, 히드라, 머리 둘 달린 독수리-이 현대 자본주의와 정치의 동학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상술하고, 이에 저항하는 사보타지의 문법은 무엇일 수 있는지 모색한다. 이 글에서 파스퀴넬리의 복잡한 논의를 모두 소개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제시하고 있는 저항에 대한 논의를 간략하게 소개해보기로 하자.

    파스퀴넬리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극단적으로 찬양하는 디지털리즘을 비판하면서, “자율적인 공유지라는 전술적인 개념”을 모색한다. 그에 따르면, 자율적인 공유지에서는 공통적인 재화의 생산적 활용을 허용해야 하며 거대 회사들의 착취로부터 공통적인 재화를 구출해야 하고, 비물질적인 공유지와 물질적인 공유지 간의 비대칭성과 물질적 생산에 가해지는 비물질적인 축적의 영향을 인식해야 하며 그 공유지를 역동적으로 구축되고 방어되어야 하는 혼성적 공간으로 간주해야 한다.(149-150쪽) 또한 그는 힘들의 복합적인 매트릭스인 “새로운 공유지를 구축하고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행위”는 “지대에 대립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가치 축적의 사보타주”(196쪽)라고 주장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지대는 부동산 투기를 통해 창출되기도 하는 하는데, ‘가치 축적의 사보타지’는 이러한 토지 지대에 대항하는 것이디고 하다. 부동산 투기는 데이비드 하비가 이론화 한 “물리적 장소의 ‘집합적 상징자본’과 관련”(188쪽)된다. 도시의 상징자본을 높이기 위해서 문화산업과 예술을 통한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이른바 ‘창조도시’-이 이루어진다. 지대를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문화산업인 도시의 젠트리피케이션 아래에서, ‘인지노동자들’은 창조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파스퀴넬리는 더욱 창조적이 되기 위해 경쟁하여야 하는 그들의 상황에 대해 ‘비물질 내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비물질 내전’은 “지적 공유와 디지털 공유지라는 그 모든 수사에도 불구하고, 인지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갈등들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그 개념은 “불안정 노동자들, 특히 젊은 세대들의 일상생활”과 “삶(소위 삶정치적 생산, 삶의 형태들의 생산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경향들과 생활양식들)”에 의해 생산된 상징자본과 관련되면서 “현대의 상품 안에 둘러싸인 사회관계들의 폭발”(231쪽)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창조 도시’에서의 비물질 내전 상황에서 상징자본에 대한 다중의 저항 형태는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 창조성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창조적으로 되지 않는 것이 저항 행위일 것인가? 그러나 파스퀴넬리는 “창조산업들과 겨루기 위한 것으로서 자율적인 ‘사회적 산업들’을 상상”(275쪽)할 수 있다고 한다. “부는 ‘반反 시장’의 자본 축적의 여지가 없는 인간적인 시장들의 층위에서 생산될 것”이며 “자율적인 생산을 자기조직화하기 시작”하는 ‘사회적 산업들’은 “지적 생산의 착취가 아니라 물질적이고 생산적인 공유지의 경제에 기초”(276쪽)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하는 사보타주는 이러한 사회적 산업과 연계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기계를 파괴했던 ‘러다이트’ 운동과는 달리 “가치는 파괴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산되고 재분배”(279쪽)되는 ‘창조적 사보타주’다.3)

   그래서 “창조적으로 되지 않기가 그들의 모토”인 <BAVO>의 ‘지젝주의’는 “정치적 명령이 창조성의 이데올로기 다이어그램에 머물러 그 언어를 강화하고 이는 것처럼”(281쪽) 보인다고 비판된다. 이에 반해, ‘생산적 사보타주’는 “(새로운 광고 캠페인에 유리한) 저항riot의 상상계들이 아니라 가격들을 낮추고 특정한 도시 지역들을 자본 식민화에 불리하게 만들기 위한 상상계의 저항들riots을 목표로”(286쪽) 한다. 또한 그 사보타주는 “지대의 가치-사슬이 약화되고 가치가 가치 생산자들을 위해 재배치됨에 따라, 즉각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또 공통적인 것을 구성할 것”이며, “특별히 오늘날의 가치화 및 금융화 과정들을 표적으로”(288쪽) 삼을 것이라는 것이 파스퀴넬리의 전망이다.4)

5.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구성하면서 다중의 자기가치화를 행하는 ‘생산적-창조적’ 사보타주는, 자본주의적 지대와 금융에 의해 가치가 착취되는 메커니즘 자체에 저항하는 행위다. 파스퀴넬리는 이러한 저항이 ‘저항의 상상계’가 아니라 ‘상상계의 저항들’을 생산하고 조직-“유로메이데이가 불안정 노동자들로부터 통일된 상상계를 생산하는 일을 해 냈듯이”(288쪽)-하는 일을 통해 행해진다고 본다. 『동물혼』의 마지막 장인 4장, ‘머리 둘 달린 이미지’는 바로 ‘상상계의 저항들’을 모색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흥미로운 시각적 이미지 이론을 펼쳐 보이고 있는 이 장에서, 저자는 ‘전쟁 포르노’에 대항하기 위해 ‘전쟁 펑크’의 상상계 생산을 제시하고 있다.  

   파스퀴넬리는 “집합적 상상계가 디지털 다중의 야수적 본성을 쉽게 표현”하며 “스펙터클은 동물본능들의 직접적인 표현”(297쪽)이라면서, 벤야민을 따라 “오늘날 정치적 주체성의 회복은 집합적 상상계의 공간에서 현재懸在적이고 잠재潛在적인 경제들에서, 이미지의 새로운 과학기술들에 의한 집단적 신체의 신경감응innervation에서 생겨날 수 있을 뿐”(299쪽)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이미지는 환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환영[유령]일 뿐”이라고 보는 견해에 맞서, “이미지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으로 인식하려는 여하한 시도”(336쪽)를 꺾고 “이미지의 정치적인 차원에서 시작해서 이미지의 새로운 지위를 규정”(335쪽)하고자 한다.

   파스퀴넬리는 “사랑과 신체의 ‘동물혼’에 연결되어 있는 환상에 대한 공통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을 인식”(346쪽)하는 아감벤을 따라서, “삶의 각 측면(신체, 섹슈얼리티, 언어)을 분리된 영역으로 가져가”는 자본주에 대립하여 분리들의 “구성constitution을 재배치하거나 그것과 ‘노는’ 방법을 아는 행위”(351쪽)인 ‘세속화’를 실천적 과제로 제시한다. 그는 아감벤이 “자본주의적 분할의 근본적인 사례인 포르노”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포르노가 포획했던 가능성을 다시 주장하는” ‘역逆세속화’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에 따른다면 ‘아부 그라이브 미디어 스캔들’과 같은 ‘전쟁 포르노’5)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말을 할 수 있을 테다.

   파스퀴넬리는 현재 “전쟁의 상상계를 향한 전쟁 포르노의 병적인 물신주의”가 새로운 개인미디어에 의해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 직접적으로 연결”(369-370쪽)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전쟁 포르노에서 우리는 리비도와 미디어, 욕망과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는 이러한 밀접한 [쌍둥이] 신체를 발견”(371쪽)할 수 있으며, 전쟁 포르노의 이미지들은 다중의 악마적인 면인 동물적인 에너지를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 포르노의 이미지들에 대한 대항문화의 청교도적인 비판이 가해지곤 하는데, 이에 반해 파스퀴넬리는 그러한 청교도적인 자기검열에서 벗어나야지만 “미디어스케이프의 망각된 신체들의 창조적인 재조립을 시작할 수 있다”(376쪽)고 주장한다. 즉 “비극적인 방식으로 전쟁 포르노를 활용”하여 “최소한 상상계의 영역에서는 어떤 종류의 동물혼을 고무할 수 있으며 전쟁 포르노를 전쟁 펑크로 바”꾸는 작업, 그래서 전쟁 펑크의 “급진적인 이미지들을 합법적 방어의 무기로 활용”(376-377쪽)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파스퀴넬리는 그 예로서 크리스 코르다의 비디오 <나는 보고 싶다>를 언급하고 있다. “구강성교와 자위의 포르노 장면이 축구와 야구 경기들 및 유명한 9•11 이미지들과 뒤섞”(377쪽)이고 있는 이 비디오에 대해 파스퀴넬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이 비디오는 미국 사회의 가장 저열한 본능들을 응축하고 재투사한다. 스펙터클, 전쟁, 포르노, 스포츠를 결합하는 지하의 공통 지반, 세계에 자신의 실재적인 동물적 배경을 노출하는 이미지들의 난장. 전쟁 펑크는 리비도적 폭탄과 급진적인 이미지들을 전지구적 상상계의 심장부에 투하하는 B52 폭격기들의 대대이다.(378쪽) 

   한편, 파스퀴넬리는 이 인용문 뒤에 ‘리비도적 기생체들’이라는 한 절을 더 덧붙이면서 책을 끝내고 있다. 이 절 역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간략하게 언급해두기로 한다. 그는 이 절에서 “무한한 유동flux의 학파 다른 한편으로 제한된 리비도의 학파 사이에”6) “바타유와 초과에 대한 그의 인간 충동[개념]을 놓”고는, 평형을 파괴하면서 초과하여 “표류하는 리비도의 잉여”(388쪽)가 인터넷 포르노와 같은 미디어의 리비도적 기생체들에 의해 어떻게 축적되는지 라짜라토의 『비디오철학』이라는 책에 의거하여 살펴보고 있다. “결코 ‘비물질적이지’ 않”은 “기생체들은 언제나 우리의 유출들을, 만질 수 있는 무엇인가로 변형”하는데, 가령 “인터넷 포르노는 리비도적 흐름을 화폐로 전환”하고 “리비도를 전기로 변형”하기도 하는 식으로 “리비도적 잉여의 축적은 화폐, 관심, 가시성, 스펙터클,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상품들로 쉽게 전환된다”(399쪽)는 것이 그 고찰의 핵심 내용이라고 하겠다.   

6.

   이 책의 저자는 변모하고 있는 당대의 자본주의의 문화와 정치 체제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동물혼’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급진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사유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걸어가면서 묻는다’는 사파티스타의 태도를 이어받는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어떠하고 현재 길이 어떻게 놓여 있으며 다른 길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이 세계 안을 걸어가면서 묻고 생각할 때 다른 세계는 유물론적으로 사유되고 상상될 수 있을 것이다.7) 『동물혼』은 그러한 유물론적 사유와 상상력을 힘껏 발휘한 한 젊은 자율주의 이론가의 역작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거나 이미 접어든 왕년의 자율주의 투사들의 최근 발간된 책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자율주의자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두면서도, 야성적인 ‘동물혼’에 천착하여 대안적인 사고와 저항의 방향을 사고하는 것에서 젊은이다운 혈기를 느꼈던 것이리라. 그러나 동물혼의 저항적이고 구성적인 힘을 얻기 위하여 동물성의 또 다른 면인 파시즘에 지나치게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허나 현재 세계의 젊은이들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올바름’에 어떤 전망을 두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한국에서도 다수의 젊은이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논리로 자신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486 세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8) 더 나아가 인지자본주의 체제에서 고통 받고 있는 젊은이들 중 일부는, ‘일베 현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디지털 파시즘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라도, 한국인 역시 파스퀴넬리의 주장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강력한 선동시라고도 할 수 있는 「도시 카니발리즘 선언」도 일독해보라는 권유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 매력적인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명령문으로 끝나고 있다.     

도시 포식자들이여
부자들을 먹어라!


1) 한편, 비포에 따르면 파스퀴넬리는 2000년대 초 ‘레콤비난트’라는 메일링 리스트를 같이 만들었던 실천 활동의 동료이기도 했다고 한다.(『미래 이후』, 276쪽)

2) 지젝과 함께 방한했던 알랭 바디우 역시 새로운 코뮤니즘의 이념과 진리의 정치를 내세우고 있는데, 파스퀴넬리의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 같다. 네그리는 바디우의 ‘코뮤니즘 가설’에 대해 “맑스주의 없는 코뮤니즘”이라고 말했다는데, 올바른 지적 아닐까 한다.    

3) 파스퀴넬리는 “우리 자신이 이제 기계가 되었기 때문”에 “기계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285쪽)하다고 덧붙인다.

4) “집단적 가치에 대한 공격의 보다 설득력 있는 사례”로서 파스퀴넬리는, 네그리가 “노동계급의 특수한 부분이 파업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전체 생활이 중지되”고 “도시 전역의 가치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가치 생산을] 전도시”(286-287쪽)킨다고 논한 바 있는 ‘메트로폴리스적 파업’을 들고 있다. 
 

5) 소설가 발라드를 따라 파스퀴넬리는, 미디어가 전쟁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것은 리비도 경제와 관련되는 것으로 “한 편의 스너프 영화가 전지구적 상상계의 화면 위로 투사”(368쪽)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6) 글의 전후 문맥 상 유동 학파는 속류화된 들뢰즈/가따리주의를, 제한된 리비도 학파는 비포의 이론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7) 그래서 ‘멈추어라, 생각하라’라는, 지젝이 현재 내걸고 있는 ‘모토’는 좀 공허하다고 생각된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란 말인가? 물론 그 말은 즉흥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전반적인 상황을 깊이 숙고-헤겔과 맑스와 라캉을 버무려서-하고 행동의 방향을 찾자는 뜻일 테다. 하지만 그러한 숙고를 위해서 꼳 멈추어야만 하는 것일까? 길을 가고 있어야 길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나아갈 바에 대한 사유를 더욱 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젝 열풍의 효과는 무엇일까? 권력에 의해 주어진 길을 어떻게든 걸어야 하는 노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멈추어라’라는 명령이 주는 상상적인 위안 아닐지?

8)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486세대에 대해 기득권을 다 가졌으면서도 훈계 투의 거룩한 말만 하는 ‘꼰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 글쓴이는 문학평론가입니다.

기사입력: 2013/10/18 [11:01]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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