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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류상태의 주일편지] 이웃종교인들의 열린 마음이 종교전쟁 피하게 해
 
류상태   기사입력  2013/10/12 [09:15]
오늘은 6~7년 전에 ‘저의 주님’과 제가 구원을 주제로 상상 속의 대화를 나눈 내용을 교우님들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저의 주님’은 ‘저의 하나님’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저의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저는 ‘교리로서의 삼위일체’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고백으로서의 삼위일체’에는 마음 깊이 공감하는 입장입니다).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 개혁을 주제로 주일편지를 쓰는 중에 어느 교우님께서 구원론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으셨고, 저 역시 그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지난 2007년 삼인출판사에서 발행한 저의 책 <당신들의 예수>에 실려 있는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약간의 수정을 거친 것입니다.)

1. 구원에 관한 대화 - 하나

자비로우신 주님,
주님께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약속해 주셨네요.

그러면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인가요?

그렇다구요?

그러면 아직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또한 기독교를 접하지 못했던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걱정하지 말라구요?

주님은 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셨다구요?

그러면 그들은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 것인가요?

역시 주님께서
값없이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구요?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데요...

그게 아니라구요?

그들은 주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뿐이라구요?

어떤 이는 ‘도(道)’라 부르며
어떤 이는 ‘이(理)’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공(空)’이라 부르기도 하며,
‘로고스(logos)’라 부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냥 ‘하늘’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구요?

나라마다 지역마다
주님에 대한 이름이 다른 것 뿐이라구요?

주님은
어버이가 제 자식을 사랑하여
아낌없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베풀듯이
그렇게 모든 생명, 모든 사람을
널리 품어 주신다구요?

그것이 구원이라구요?

그렇다면,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굳이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겠네요.

제 어머니를 믿느냐구요?

어머니를 믿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어머니가 계시고,
제가 자식으로 있으니
그냥 부모 자식으로 살아가는 거지요...

낳은 자식이니
먹여주고 입혀주셨지요.

낳아주신 부모님이니
효도 좀 한답시고
어떻게 하면 부모님 마음 좀 편케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부끄러움 없는 자식으로 살아갈까
애쓰는 것이지요.
(조금 찔리네요. 헤헤~)

바로 그것이라구요?
하나님은 뭇 생명의 어버이시라구요?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더불어
그냥 함께 살아가는 거라구요?

그걸 아는 사람은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교제하기에
구원을 누리는 것이라구요?

그걸 모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했기에
아직 누리지 못하는 것 뿐이라구요?

이제는 가서 전하라구요?
그 복음을 전하라구요?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라구요?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도
원래는 그런 것이었나요?

그렇다구요?
그런데 그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변한 것이라구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은
종교의 벽을 돌파하고
모든 이념과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라구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은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것이라구요?

아하,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바로 ‘사랑’이로군요.

아하, 그렇군요.
그래서 복음(좋은 소식)이었군요.
그렇군요...

2. 구원에 관한 대화 - 둘

주님, 한국 교회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또 무슨 발칙하고
해괴망측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냐구요?
기독교 자체가 ‘구원의 종교’라구요?

에이~
저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마땅히 되어야 할 그 기독교 말구요,
한국 교회가 만들어놓은 이 땅의 기독교를 말하는 건데요.

주님을 배반한 교리기독교,
한국 교회가 만들어놓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기독교가
구원을 받을 길이 있느냐고 여쭙고 있는 겁니다.

있다구요?
그런데 쉽지는 않다구요?
많은 껍질들을 벗겨내야 한다구요?

그 껍질은 무엇인가요?

김건모에게 배워 보라구요?
갑자기 웬 김건모...

오래 전 그가 불렀던 노래 ‘핑계’를 아느냐구요?

헤헤~ 첫 소절은 알지요.
“내게 그런 핑계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

바로 그거라구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라구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엉킨 실타래를 푸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구요?

제가 만약에
이란이나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냐구요?

그야 물론,
무슬림이 되었겠지요.

‘꾸란’이나 ‘무함마드’에 대해
어떻게 고백하느냐구요?

제가 읽어본 꾸란은
훌륭한 경전이고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 역시
훌륭하신 하나님의 예언자죠.
우리 주님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헤헤...

아, 왜 때리는 거죠?

입장을 바꾸지 못했다구요?
무슬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구요?

하, 그것 참...
그렇다면 당연히
꾸란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알라)의 말씀이며 절대계명이죠.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 역시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이겠구요.

그걸 믿느냐구요?

믿는다기보다는 존중하는 거지요.
그들의 신념이니까...

아, 또 때리시네.
알았어요, 제가 무슬림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믿겠지요.
아니, 믿슙니다. 히~

그 확신은 보편타당한 것이냐구요?

글쎄, 그게...
무슬림 입장에서는 보편타당한 것이겠지만...
그 다음 얘기는 하기 어렵네요...

죄송합니다, 주님.
완전히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애요.

아니까 다행이라구요?
거기까지도 충분하다구요?
이제 그들에게 배웠냐구요?

주님, 제가 볼 때는...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는데요.

뭐가 문제냐구요?

꾸란이 위대한 경전이긴 하지만
오류가 전혀 없다는 건 좀 동의하기가...

그들의 믿음을 존중하라구요?

물론 존중은 해야겠지만
그렇다면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 역시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아니라구요?
뚜렷한 차이가 있다구요?

그들이 꾸란의 예언이나
하나님(알라)을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공갈협박하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냐구요?

음... 없습니다.
그들의 경전에는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쓰여있더군요.
우리 기독교를 형제종교로 품어주는 것 같았구요.

솔직히...
꾸란의 가르침이
성경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기도...

꾸란의 어떤 말씀에
그토록 은혜(?)를 받았냐구요?

“진실로 너희의 종교는 하나이니라.”

대학 다닐 때 종교철학 과목을 공부하면서
교수님이 내 주신 숙제 하느라고 마지못해 읽었지만
꾸란의 그 구절을 보고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두렵지 않았냐구요?

두렵고 무서웠어요.
기독교와 유대교를 형제로 품는
그 너그러움이 한없이 부럽고 존경스러우면서도
그런 생각을 갖는 걸 주님이 싫어하실까봐...

지금은 어떠냐구요?

이슬람교의 본래 정신이 가진 풍요로움과 평화를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해 좀 안타깝지요.
이슬람 원리주의와 현실세계에서 발생하는 테러리즘을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깝구요.

그렇지만, 주님.
무함마드가 위대한 예언자라는 데에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지만
그에게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여
절대기준으로 삼는다든가
꾸란의 정신 뿐 아니라
문자 하나하나에 매이는 듯 한 그들의 신앙은 좀...

여전히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형제종교를 판단하고 있다구요?
다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구요?
그들이 성경과 주님을 어떻게 보겠냐구요?

음... 그들은 당연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지만
오류가 없을 수는 없겠고...
주님도 위대한 예언자이지만
신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은 우상숭배...

그들의 인식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구요?
제가 무슬림의 교리로부터 자유롭듯이
그들도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교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라구요?

세세한 지식이 없더라도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 조직 안에 갇힌 전문가보다
더 냉철하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구요?

흠... 동의할 수 있겠네요.

기독교의 지독한 독선과 배타성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구요?

교리적 전제에 매어있는 것,
이전의 전통이나 교리를 의심하지 않거나
의심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그토록 위험할 수 있다구요?

▲ 한반도 종교전쟁을 막기위한 류상태 목사의 고언이 담긴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종교의 독특한 신념체계와 고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을 만민에게 적용되어야 할
보편타당하며 객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여
다른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에게 적용하고자 하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정신적 문화적 폭력이 된다구요?
인간세상에도 큰 갈등을 불러오게 된다구요?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런 큰 갈등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선한 이웃들 때문이라구요?
다행히도 불교나 천주교,
또한 소수이지만 이슬람교나 다양한 우리 민족종교가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구요?

그들 이웃종교인들의 열린 마음, 열린 태도가
한반도를 종교전쟁으로부터 구원한 것이라구요?

그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해야 한다구요?
또한 마음 깊이 사죄도 해야 한다구요?

그런 다음에야
기독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다시 논해보자구요?

그전에는
기독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구요?

[지난주 주일편지에 더하여]

지난주에 드렸던 <평신도 교우님들, 교회개혁의 주체로 나서 주십시오!>를 보시고 ‘평신도’라는 용어가 적합지 않다고 지적해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 용어가 소위 ‘성직자’라는 단어와 대비되어 교우님들 일반을 피지배계급으로 인식시키는 부작용이 있다는 지적은 옳다고 생각됩니다.

하여 저도 이 용어의 사용을 최대한 피하고 있으며 주일편지에서는 항상 ‘교우님’이라고 표현해왔습니다. 하지만 직업종교인과 명확하게 대비되는 용어로는 ‘신도, 신자, 교인, 교우’ 등의 단어보다 ‘평신도’라는 용어가 훨씬 뚜렷하게 그 의미를 표현합니다. 성직자나 목회자 등으로 불리는 직업종교인도 ‘신도, 신자, 교인, 교우’가 될 수 있지만 ‘평신도’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라는 말은 아마도 스스로를 ‘성직자’로 구분한 직업종교인들이 자신들을 제외한 ‘신자 일반’을 하향평준화시키고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무보수로 교회에서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교우님과 직분을 맡지 않은 교우님 등 ‘직업종교인을 제외한 교우님들 전반’을 지칭하는 가장 명확한 개념의 용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평신도’라는 용어에 담긴 차별적인 뜻이 사라지면서도 그 의미는 명확히 할 수 있는 적절한 대안용어가 만들어지고 사용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용어로 인해 마음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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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10/12 [09:1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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