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상태의 참예수를 찾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민족과 국가의 벽을 넘어 세계시민으로 살아가기
[류상태의 주일편지] 민족주의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사해동포주의
 
류상태   기사입력  2013/08/15 [23:04]
오늘은 지구마을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품어야하는 예수사람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민족갈등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교우님들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1. 일본의 파렴치함을 꾸짖기 전에

지난 7월 28일에 열린 축구 한일전에서 우리 응원단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현수막을 내걸어 논란이 되었습니다. 일본 응원단이 내건 욱일승천기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기에 경기장의 응원도구로는 부적절했듯이, 우리 응원단이 내건 현수막 역시 그 내용에는 공감하지만 응원도구로는 부적절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인적인 폭염이 한반도를 뒤덮었던 지난 주간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하고 규탄하는 광복절 특집 기사와 프로그램들이 매스컴의 주요 공간을 장식했습니다. 국가건 개인이건, 가해자는 절절한 아픔을 겪지 않았기에 자신의 행위를 쉽게 잊을 수 있지만 피해자는 당한 아픔과 상처를 그리 쉽게 잊을 수는 없습니다.

하여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해 반성할 줄 모르는 현 일본 정치인들의 파렴치한 언행에 대해 우리가 피해국 백성으로서 분노하며 반성을 촉구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의 파렴치함에 분노하듯이, 30~40년 전 한국이 베트남에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도 똑같이 아파하고 사죄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일본의 잘못을 호되게 질타하시는 분들 중에는, 1960년대에 우리가 애꿎은 이웃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조차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그곳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분들을 편견과 냉대로 대하고 있는 우리 한국사회의 슬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문제를 자세히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 베트남과 한국 사이에 벌어졌던 역사적 갈등문제를 자세히 짚는 것은 그 분야에 정통한 학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저는 민족과 국가의 벽을 넘어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실현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2.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단일민족국가임을 자랑해왔습니다. 단군신화가 말하는 우리 한민족은 하늘의 정기를 이어받은 한 시조로부터 순수혈통을 이어받았고, 이 ‘한민족의 순수성’은 흰 옷을 즐겨 입는 전통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 한민족은 ‘순결한 백의민족’으로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 ‘순수혈통의 백의민족’은 반만년에 걸친 외침에도 꿋꿋이 민족정기를 지켜왔으며, 몇 차례 위기는 있었지만 결국 자주독립을 지켜 오늘에 이르렀다는 자랑스러운 역사의식을 공유합니다. 단군신화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가운데 이 ‘순결한 단일민족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는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좀 더 냉철하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결코 우리 한민족이 순수혈통으로 이어져올 수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가 이 땅에 존속하는 동안 인류문화와 더불어 끊임없이 존재해왔고, 아마도 역사의 최후까지 존속하게 될 전쟁이란 괴물은 ‘순수혈통’이라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갖는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일차적으로 힘을 가진 자의 사상과 문화와 혈통이 침략당한 자에게, 다음 단계에서는 승패를 떠나 양자 간의 문화와 혈통을 상호 유입 내지는 융합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그런 전쟁을 수없이 겪어왔습니다.

삼국시대 중국과의 전쟁, 이후 말갈족과 여진족으로 이어지는 북방민족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지역분쟁, 몽골에 의한 고려 침탈, 조선 시대에 들어 7년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과 이어진 병자호란, 게다가 일제의 강탈 36년으로 이어지는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만남과 교류 속에서 순수혈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3. 한민족의 정체성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에 있습니다.

우리가 민족 정체성과 관련하여 진정으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이민족의 피가 대량으로 섞여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그 험난한 역사를 거쳐 오면서도 그들의 문화에 잠식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흡수통합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지켜왔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지를 가져야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생물학적 혼혈문제로 본격적인 몸살을 앓게 된 것은 한국전쟁과 그 이후, 즉 UN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직후부터입니다. 그러면 이전부터 타민족과의 혈연적 교류가 꾸준히 이어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별 문제가 되지 않다가 한국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표면화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전쟁 이전까지 이민족과의 교류로 발생한 혼혈문제는 주로 동아시아 내에서 발생했기에, 피부색이나 머리 모양 등 외형상으로는 거의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혼혈아가 태어나더라도 사정을 아는 동네 사람들 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한민족’이라는 혈연(?)공동체 안에 쉽게 흡수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6개국의 UN군이 참전한 한국전쟁으로 백인과 흑인의 피가 한반도에 유입되었고, 외형적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그 특징은 ‘한 민족 한 혈통’을 자랑해왔던 우리 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적극적인 개방의식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결과로 야기된 것이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하여 잔인하고 무모한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 사회에 등장한 ‘얼굴 검고 입술 두터운 아이들’은 ‘순결한 백의민족’이라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방해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더구나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편견까지 작용해 흑인 혼혈인들이 겪는 고통은 백인 혼혈인들의 경우보다 더욱 아플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선언이 지금도 유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혈통이 생물학적으로 순수해서가 아니라, ‘한민족’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얼굴색이 어떻건 부모의 출신지가 어디건 상관없이, 한민족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은 모두 ‘우리 민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민족주의보다 우선해야 할 사해동포주의

지금 우리나라에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노동자들이 들어와 있고,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정착한 다문화인도 많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차별에 시달리기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 물리적인, 즉 혈통적인 표시는 거의 사라지고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한민족으로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를 물려가며 여전히 그늘진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가장 많은 아이들은 우성 유전인자를 가진 검은 피부의 아이들일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하루 빨리 극복하고 근본부터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리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이란 없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수혈통을 가진 단일민족론은 사실도 현실도 아니며, 지난 역사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래도 굳이 혈통의식이 필요하다면, 저는 ‘인류혈통의식’을 갖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인류 역사는 혈통의식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가 사해동포주의, 즉 인류애 정신보다 앞설 때 어떤 비극을 가져왔는지 뚜렷이 증언합니다.

민족의식은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필연적으로 배타주의를 낳게 됩니다. 우리는 세계 역사를 통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과 독일을 통해, 어떻게 배타적 민족주의가 국수주의와 제국주의로 발전해 인류역사를 유린했는지 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의 순기능은 ‘개방형 민족주의’로 향할 때 꽃필 수 있습니다. 개방형 민족주의란, 민족주의를 사해동포주의의 하위개념으로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구마을 모든 민족은 자기 민족보다 ‘인류’라는 상위개념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며, 민족주의는 그 상위개념을 부정하거나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추구되어야 합니다.

단일민족임을 내세우는 지구마을의 모든 국가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와 뜻을 함께 하고자 하는 이웃들에게 공동체의 문을 활짝 열어놓는 ‘개방형 민족주의’로 향할 때, 또한 ‘다름’을 ‘틀림’이 아닌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공존하고자 노력할 때, 민족주의는 사해동포주의와 조화를 이루며 상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일본에는 제국주의의 침탈을 반성하고 위안부 문제에도 적극 나서 국가 차원의 반성과 보상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운동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야말로 사해동포주의에 눈을 뜬 세계시민일 뿐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들어 베트남 문제에 대해 진지한 반성과 보상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늦었지만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꾸준히 모색하는 류상태 목사     ©대자보
이렇게 자기가 속한 민족공동체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도 사해동포주의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를 평화의 세계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사람들이 앞장서서 그런 세계시민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며, 또한 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배타적 민족주의나 특정 종교이념에 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포하셨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안아주셨으며, 당시 사회의 비주류였던 서민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3/08/15 [23:04]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