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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제국에 대한 교회의 저항운동
[류상태의 주일편지] 성서는 미래 예언없어, 우리 선택이 미래 만들어
 
류상태   기사입력  2013/08/03 [09:07]
지난 7월 21일 주일부터 ‘묵시문학’을 주제로 교우님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요한계시록의 성격과 메시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몇 가지 견해에 대하여

지난 주일편지의 결말 부분에서, 예민한 시대에 예민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진리를 감추어 표현’한, 즉 묵시문학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글이 검열에 걸려 폐기처분되는 일을 막고, 당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어 읽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다니엘서와 마찬가지로 묵시문학서입니다. 주전 2세기에 살았던 다니엘서의 저자가, 자신이 살았던 그때 그 시절 그곳에서 일어났던 ‘현실문제’에 부딪혀 고민하다 환상과 예언의 형태를 빌어 묵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듯이, 요한계시록의 저자 역시 같은 동기로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공동번역성서에는 ‘요한의 묵시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은, 표면적으로는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의 책이라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지만, 속뜻은 기록된 그때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마적 세력에 대해 경고하고, 핍박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며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권면하는 책입니다.

제임스 칼라스가 지은 책 <요한계시록>(박창환 역, 컨콜디아사 발행)에 의하면, 계시록은 주로 네 가지 견해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온 해석은 말세론적 견해(The ‘End of history’ View)로, 계시록이 세상 종말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는 성서 전체가 지향하는 것과 방향이 같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이 모두 세상 종말에 관한 기록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계시록이 예수님 당시부터 세상 종말까지를 시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역사적 견해(The ‘All of history’ View)입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의 특정 기록이 어느 시대의 사건을 묘사하는지 알 수 있다면, 세상 종말의 때를 계산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 16장이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운동을 묘사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의 생각이 맞다면 21장에 기록된 종말은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종말을 판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저자의 의도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 한반도 종교전쟁을 막기위한 류상태 목사의 고언이 담긴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계시록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선한 세력과 사탄의 악한 세력과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초역사적 견해(The ‘Above history’ View)인데, 이 생각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초역사적으로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이 서기 1세기 말 당시 로마 황제의 탄압에 고통 받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지방의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는 희망의 메시지라는 견해는 오늘날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과거적 견해(The ‘In that history’ View)로, 일부 보수적인 학자를 제외하고는 현대 신학자 대부분이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2. 검열을 피하기 위해 선택된 묵시언어

요한계시록의 기록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록 당시의 정치사회적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시록은 서기 90년대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이때는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로 황제 신격화와 거국적인 기독교 탄압이 자행되던 시기였습니다.

계시록 본문에 의하면, 저자인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었으나 교계 최고의 지도자로서 쓰러져 가는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영감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읽혀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악한 황제이며 로마는 적그리스도”라는 노골적인 표현을 쓰면 편지는 유통될 수 없습니다. 불온문서로 분류되어 발견 즉시 폐기처분될 것이며 편지를 소지한 사람은 물론 전달한 사람까지도 중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의 편지가 폐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검열관의 눈을 피할 방도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자들은 모르고 하나님의 백성들만 깨달을 수 있는 묵시의 언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수많은 상징적 표현으로 쓰여진 이유는 바로 이런 역사적 정황에 기초합니다.

그러면 로마 당국자들은 모르고 하나님의 백성들만 알 수 있는 묵시적 상징과 기호가 무엇일까요? 저자는 그가 채택한 여러 묵시 기호와 상징들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숫자철학을 활용했습니다. ‘14만4천’이라는 숫자는 대표적인 묵시언어입니다. 아래 본문은 저자가 어떻게 숫자를 이용한 묵시언어를 통해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는 어린 양이 시온 산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물 소리와도 같고 요란한 천둥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하늘로부터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그 소리는 거문고 타는 사람들의 거문고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그 십사만 사천 명은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구출된 십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닙니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들은 아무런 흠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4:1~5절, 공동번역).

유대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14만4천’이라는 숫자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면, 또한 유대문화를 이해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 숫자 안에 담겨있는 상징과 의미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 숫자는 바로 <12(구약의 12지파)*12(신약의 12사도)*1,000(10*10*10, 영원, 무한 상징) = 144,000>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묵시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12지파로 대표되는 유대인이건, 12사도로 대표되는 이방인이건, 환난을 이기고 신앙을 지키기만 하면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묵시적 상징을 도입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는 저자의 의도는 아래와 같이 편지의 서두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느님께서 곧 일어날 일들을 당신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리스도에게 계시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당신의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려주셨습니다.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것, 곧 내가 본 모든 것을 그대로 증언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 일들이 성취될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요한계시록 1:1~4a)

위의 본문을 통해 볼 때, 저자는 매우 가까이 다가온 긴박한 미래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이천 년이나 지난 오늘날의 종말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주장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편지를 쓰는 요한의 눈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상징에 나타난 의미는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일곱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완전함, 충만함’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산재해 있던 모든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며, 교회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묘사하는 것은 당시 교회가 갖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진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자는 대표적인 일곱 교회를 수신자로 지정함으로써 자신의 글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 모든 교회에 해당하는 편지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계시록의 저자는 ‘1,000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통치’와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며 나중’ ‘666’ 등의 묵시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묵시언어가 갖는 뜻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또 한 천사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늙은 뱀이며 악마이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끝없이 깊은 구렁에 던져 가둔 다음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 년이 끝나기까지는 나라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또 많은 높은 좌석과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을 잘린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

유대인들은 ‘무한’을 표시할 때 어떤 수에 10을 곱하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숫자 천은 <10*10*10>으로 영원함을 뜻하며, 문자 그대로 천 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히 통치’를 의미하는 묵시언어입니다.

계시록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666’ ‘짐승’ 등이 있습니다. 666이라는 숫자는, 지난 20세기 말에는 바코드를 의미한다 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바코드 사용을 거부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와 단어는 당시 로마의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계시록의 저자가 직접 그의 이름이나 직함을 언급할 수 없었기에 사용한 묵시언어였습니다. 다음은 그에 해당하는 본문들입니다.

“그리고 둘째 짐승이 권한을 받아서 첫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그 우상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도 하고 또 그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죽이게도 하였습니다. 또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낙인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표시하는 숫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 외에는 아무도 물건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리한 사람은 그 짐승을 가리키는 숫자를 풀이해 보십시오. 그 숫자는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그 수는 육백육십육입니다.” (요한계시록 13:15~18)

‘6’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수이며 완전과 충만을 의미하는 ‘7’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여 ‘6’은 하나님의 차원에 도달하려는 불완전하고 건방지고 교만한 수이며, 하나님의 충만을 침범하는 수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저자가 ‘짐승을 가리키는 숫자’라며 제시한 666은 6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로마제국의 악한 세력이 극에 달했음을 나타내는 묵시입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에 대한 교회의 저항운동으로 탄생된 묵시문학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사용한 묵시가 오늘날 모두 해독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천년 전에 소아시아 지방의 성도들이 알고 있던 상징들 가운데에는 오늘날의 신학자들이 해석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요한계시록을 묵시가 아닌 예언으로 이해하려는 풍조와 함께, 해독되지 않는 상징과 기호들에 대한 억지 해석으로 인해 많은 무리가 발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만 하면 모든 비밀을 계시로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이,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의도와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무시한 채, 자신의 주관적 견해와 상상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하여 가르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기록 의도와 목적은 당시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로마의 권세는 잠깐이며, 영원한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곧 그들을 몰아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므로, 모든 환난을 잘 참고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묵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해해야 하며, 상징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또는 지나치게 영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꾸준히 모색하는 류상태 목사     ©대자보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또한 성서에,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가 예언하는 미래의 세계는 결코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성서가 바라보는 궁극의 목표는 예수사람들의 믿음과 참여로 완성되어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악과 불평등, 압제와 핍박이 종말을 고하고, 사랑과 정의,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새롭게 열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처럼 성서는 역사의 종말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지만, ‘미래의 운명’을 예언하지는 않습니다. ‘정해진 운명’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미래를 만듭니다. 우리가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세계를, 폭력을 심으면 폭력의 세계를 낳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예수사람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앞장서서 하나님 나라의 주체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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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8/03 [09:0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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