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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북한 고무찬양 좀 하면 어떨까요?
[류상태의 주일편지] 대립만 하면 한반도 평화와 통일 이뤄지지 않아
 
류상태   기사입력  2013/07/05 [22:18]
1.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 중인가?

지난 6월에는 주로 전쟁과 관련된 주제를 선택하여 주일편지를 썼습니다. 상처투성이의 부끄러운 역사지만 그 원인을 냉철히 되돌아보고 해결책을 찾아내어야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고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교우님들과 아프고 슬픈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7월이 되면 교우님들과 보다 밝은 내용으로 새로운 희망을 나누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위 ‘호국보훈의 달’이 지난 지금 또다시 전쟁에 대한 글로 교우님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전쟁이 60년 전에 열전은 끝나고 휴전이 되었지만, 냉전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일 뿐 아니라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국회는 여야가 모두 찬성한 가운데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기록을 샅샅이 열람하기로 하였습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제 채면과 이익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국가 간의 약속이나 예의를 헌신짝처럼 내다버린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나라를 맡겨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특유의 솔직하고 서민적인 말투로 받지 않아도 될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조금만 어깨에 힘을 주었어도 훨씬 더 쉽게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었을 텐데, 조금만 가식을 떨었어도 훨씬 더 큰 존경과 예우를 받으며 통치할 수 있었을 텐데, 끝까지 그걸 못해 죽어서까지 욕을 얻어먹는 걸 보면서 그분이 영락없이 바보는 바보였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국정원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그는 북의 김정일 위원장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인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서민적이고 직설적인 말투와 함께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두고두고 공격의 빌미가 될 것 같습니다.

소모적인 논쟁과 분쟁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협력시대를 열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 보이지 않는 올무에 걸려 스스로 몸을 던진 불행한 대통령을 또다시 부관참시하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아직도 진행 중인 한국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범한 우리 소시민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교우님들과 한번 더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아래 글은 지난주에도 소개했던 저의 소설 <신의 눈물> 230~237쪽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위험한 몽상가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까지도 형제와 이웃으로 끌어안는 그분들이 있기에 비로소 전쟁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인지 냉철하게 생각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옮겨왔습니다.

2. 국가의 포로가 된 백성들

▲ 한반도 종교전쟁을 막기위한 류상태 목사의 고언이 담긴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정선생, 아까 보니까 인민이라는 말을 쓰시던데, 남에선 인민이란 말 대신 국민이란 말을 쓰지 않소? 인민이라는 말은 거의 안 쓰는 걸로 아는데, 정선생은 남에서도 인민이라는 말을 쓰시오?”

위원장이 국밥을 입에 떠 넣으며 한 말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씁니다. 국민이라는 말을 써야 할 때는 쓰지만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인민이라는 말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인민이 국가를 위한 부속품은 아니니까요!”

“음···.”

위원장은 다음 말을 듣고 싶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예수사람이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라와 인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라가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민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사람이라면 나라건 종교건 모든 조직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 보시오.”

“예, 하지만 역사는 나라가 인민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왔음을 증언합니다. 특히 이웃나라와 전쟁을 할 때마다 나라는 신성한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존립과 흥왕이라는 대전제 앞에서 인민의 자유와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지요. 남쪽에서 국민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나라가 인민 위에 군림하는 현상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60년 전까지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인민이라는 말을 지금 남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습니다. 북에서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쪽은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군요.”

“인민이라는 말을 국민으로 대체하면서, 인민들은 국가조직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마치 나라를 떠난 개인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고, 그렇게 인민들은 점점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국가에 예속된 존재로 전락되었습니다. 국민이라는 말을 쓰면서 인민이 죽은 것이지요.”

(중략)

“남쪽에서···. 군대를 폐지하라고 시위를 벌인 청년이 있습디다.”

식사가 끝나고 접견실로 돌아온 위원장이 꺼낸 말이었다.

(중략)

“아주 맹랑하고 무모하며, 비현실적인 친구라고 욕을 많이 먹더군요. 더러 지지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습니다.”

“구속이 됐다지요? 그 젊은이···.”

“예,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구속됐습니다.”

“음, 그렇게 되었군. 그 젊은이의 생각, 정선생은 어떻게 보시오?”

“제 생각이요···. 현실적으로만 판단한다면, 저 역시 그 청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군대를 당장 없앤다면 나라의 앞날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꿈을 지구마을의 여러 젊은이들이 함께 꾼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 어떻게 되겠소?”

“그런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기필코 이루겠다고 서로 연대한다면 말입니다. 남쪽만이 아니라, 북의 젊은이들도, 나아가 중국과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의 젊은이들이 같은 꿈을 꾸고 서로 연대하여 국제적 시위라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각 나라에 그런 젊은이들이 수백 명, 아니 수십 명씩이라도 나와 서로 연대하며 나라가 인민을 통제하는 현실을 고발하고 ‘나라에 예속된 국민’이기에 앞서 한 개인으로서, 그냥 사람으로서의 인권과 자유에 대해 지속적으로 담론의 장을 마련하여 인민들의 의식을 일깨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다고 군대가 없어지겠소?”

“물론 그런다고 군대가 당장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성세대, 즉 젊은이들의 꿈과 주장을 무모하다고 질타하던 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각국 정부에 군축방안을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하게 되지 않을까요? 무기를 줄이고 병력 수를 감축해야 한다는 새로운 현실론이 조금씩 고개를 들지 않을까요?”

“사방이 호전적인 국가로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 상황에서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고 보시오?”

“어느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그런 방안을 시행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그 젊은이들이 국제적으로 서로 연대하여 동시다발적이며 지속적으로 행동에 나선다면, 그래서 결국 대다수 인민들이 그들의 꿈을 이해하고, 동참까지는 못하더라도 지지하고 호응하게 된다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어쩔 수 없이 군축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어쩌면 아주 오랜 옛날 선각자 이사야가 꾸었던 꿈이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사야의 꿈 말이요? 나라마다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든다는 꿈, 각 민족들이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꿈을 말하는 것이오?”

“이사야의 꿈을 아십니까?”

“이사야의 꿈 얘기는 지금 네 번째 듣는 것이오. 내가 어렸을 때 선친께서 처음 말씀하셨지요. 문익환 목사님에게서 두 번째, 박명준 목사에게서 세 번째, 그리고 지금 정선생을 통해 또 다시 이사야의 꿈 얘기를 듣게 되는구려, 허허허!”

김일성의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이사야의 꿈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이천 오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꿈으로만 머물고 있소. 그 꿈을 현실세계에서 이루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가끔 있긴 했지만, 현실과 역사는 그 꿈을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들게 하고 말았소. 현실화되기엔 너무나 허황된 꿈이었기 때문이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림이 정색하고 위원장의 말에 반박했다.

“오호! 그래요? 가능성이 있다? 그래, 그 꿈이 망상이 아니라 진정 우리 사는 세상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단 말이오? 어떻게, 어떻게 말이오?”

“이사야가 계속 나와야지요. 제가 생각해도 이사야의 꿈이 너무나 허황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긴 합니다. 같은 꿈을 꾸는 젊은이들도 분명 비현실적으로 보이구요. 하지만 현실을 넘어 이상을 꿈꾸는 것이 젊은이들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꿈이 너무 무모하다면, 기성세대가 그들의 꿈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조율하고 도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계속해 보시오.”

“위원장님! 지금 지구마을에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미국에 맞서 군사력을 엄청나게 늘리고 있습니다. 그에 맞서 군사력의 균형을 이루려면 일본과 남북은 아예 나라 전체를 군대화해야 할 판입니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동북아 전체가 함께 무한정 군사력을 늘리는 선택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사야의 꿈을 함께 꾸어야 할까요? 물 좀 마시겠습니다.”

하림은 잔을 들어 급히 물을 마셨다.

“천천히, 차분하게, 그리고 자세하고 충분하게 얘기해 보시오.”

위원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병을 들어 하림의 잔에 물을 가득 채워주었다. 하림은 얼른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었다.

“고맙습니다. 물론 남북이 합의한다고 해서 당장 군축을 실행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주변 국가의 막강한 군사력을 외면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그 꿈이 실현되려면,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도 그런 젊은이들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지구마을 전체에 이사야와 같은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나타나 군대를 없애라고, 핵을 없애라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무기를 없애라고 시위를 벌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연대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젊은이들이 무모하고 미친 짓을 벌이는 것인지, 정말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지구마을을 사랑하며 무엇보다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인지···.”

하림은 다시 잔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위원장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하림을 쳐다보았다.

“시위를 벌인 젊은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혼자 꾸는 꿈은 이루기 어렵다, 하지만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가 망상에 사로잡힌 무모한 젊은이로 기억될 지, 인민과 세상을 위해 멋진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될 지는, 또래 젊은이들이,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정토세계의 도래를 염원하는 수많은 종교인들과 양심적인 인민들이, 그의 꿈과 소망을 이해하고 그 꿈을 함께 꿀 것인지 말 것인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훌륭한 생각이오.”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위원장님은 진정으로 그 청년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믿기 어렵겠지만, 선친께서도 이사야의 꿈을 꾸고 계셨소.”

“네?”

“선친께선 남북 군대의 총 인원을 각각 십만으로 줄이자고 줄곧 제안하셨소. 그건 정선생이 선친의 회고록을 입수하여 박명준 목사에게 전달해 주었으니 잘 알 것이오. 하지만 남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소.”

“그건 남으로서는···.”

“잘 알고 있소.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오. 선친의 명령에 따라 비교적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북과는 달리 남에서는 군대를 통해 먹고사는 수많은 입들이 있으니 그들이 자신의 밥통이 뺏기는 걸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오. 하지만 만약에 말이오. 북남이 군축협상을 해서 단계적으로 국방비를 절반으로 줄이게 된다면, 양쪽 경제는 비상할 수 있을 것이오. 요즘 남측 대학생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등록금 반값 인하도 즉시 실현될 수 있을 것이고 말이오.”

“그럴 것입니다. 위원장님께선 진정 그렇게 하실 뜻을 갖고 계신 것입니까?”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정선생을 이렇게 위험한 길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오.”

위원장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긴장감이 돌았다.

“정선생, 선친과 나를 만난 목사들은 여생을 편하게 보내지 못했소.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결코 무익하진 않았다고 생각하오!”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림도 따라 일어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 평화를 위해 계속 일해 주시오. 이 사람을 믿지 못해도 좋소. 아니, 믿지 마시오. 이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오. 이념과 조직의 노예가 된 사람이니까. 그러니 그런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선생 같은 분들이, 인민을 위하여, 오직 인민을 위하여, 북과 남이 해야 할 일을 찾아주시오. 그리고 부디···. 몸조심 하고, 건강하시기 바라오!”

위원장이 하림의 손을 굳게 잡았다. 하림도 두손으로 위원장의 손을 맞잡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 것일까!

3. “공산주의는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분들에게

위의 내용은 소설의 일부분으로 물론 허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저의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아마도 저의 이 글을 읽고 망상에 빠진 비현실주의자로 보는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 종북좌파로구나.”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주류 기독교인들은 지난 60년 동안 늘 반공의 선두에 섰습니다. 제가 ‘주류 기독교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기독교인 중에도 이념에 매이지 않고 이 땅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며, 앞장서 독재와 싸워온 예수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늘 소수였고, 아직도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반공이라는 이념에 갇혀 있습니다.

보수적인 교회일수록, 그리고 대형교회를 이룬 성공한(?) 목회자일수록 반공을 절대이념처럼 떠받들며 지금도 “북은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없고, 공산주의는 무신론에 기반하고 있기에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목회자들과 그분들의 신념에 동조하는 교우님들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북에 있는 사람들도 사람입니다. 전쟁을 두려워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려면 단점과 함께 장점도 보아야 합니다. 단점만 찾아내면서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건 모순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1989년 봄에 북한을 다녀오신 후, 그해 6월 26일 방북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하셨습니다.

“분단 45년, 나는 이 45년이라는 것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얼마나 못났으면 남들이 들어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어놓은 선, 그게 뭔데 지우지 못하고 1백만의 군대를 남쪽과 북쪽에서 무장시켜 그것이 지워질세라 지키고 있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래서 실정법을 어기면서 평양에 갔다 왔다. 45년 비극의 수치를 씻어내고 45년 분단의 비극을 청산하고 싶어서 갔다 왔다. 무엇이 잘못인가?”

목사님은 출옥하신 후, 북한을 고무하고 찬양했느냐고 묻는 검사에게 이런 말씀을 했노라고 회고하셨습니다. “담당검사에게 내가 그랬지. 그래 찬양하고 고무했다. 맨날 욕하고 그러면서 통일이 되겠어? 상대방의 좋은 점을 자꾸 찾아내 찬양 고무해야 하지 않겠어!”

우리도 문익환 목사님처럼 이제는 북한을 고무찬양 좀 하면 어떨까요? 가능하면 그쪽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면서 칭찬 좀 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먼저 길이 참아가면서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저쪽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대놓고 ‘용공’을 하면 저쪽도 언젠가 대놓고 ‘용자(자본주의의 장점 받아들이기)’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뭘 모르는 거라구요? 저 사람들의 흉계에 말려드는 것이라구요? 저 사람들은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구요? 철저히 경계해야 된다구요? 우리가 계속 그렇게 말하고 그런 생각에 매어있으면, 그러면 저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며 “미제국의 괴뢰는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북의 백성들을 세뇌시키지 않을까요? 그러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언제 이루어지나요?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우리 예수사람들이 이념의 전제를 내려놓고 형제를 형제로, 이웃을 이웃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요? 그랬다가는 저들의 계략에 말려 금방이라도 잡아먹힐까봐 두려운 것일까요? 국력이 저쪽보다 수십 배나 앞서있다면서 그렇게도 자신이 없는 것일까요?

저놈들 손에 부모가 돌아가셨다구요? 형제와 친구가 죽어나갔다구요? 제 얘기는 절절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그분들 가슴에 못을 박는 거라구요?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요? 저쪽에도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을 터인데, 서로가 그 아픔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하면,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죽을 때까지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은 그냥 내다버려야 하는 것인가요?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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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7/05 [22:1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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