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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의 날, 나는 작은 차가 좋다
[류상태의 주일편지] 일상생활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문제부터 해야
 
류상태   기사입력  2013/05/31 [19:39]
오는 6월 5일이 환경의 날이라는 걸 아시는 교우님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가 환경문제로 큰 고통을 겪는 지역이 아니라는 점도 있겠지만 현실참여보다 교리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는 한국 교회의 풍토에서는 이 문제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아직까지는 환경문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의 불편과도 바꾸지 못하는 사소한 것으로 인식되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오염문제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우리 아들딸들이 성인이 되는 다음 세대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여 오늘은 사흘 후로 다가온 환경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 기독교신앙과 환경문제를 주제로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제가 작은 차를 선호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대부분의 경차 이용자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이유를 들 수 있겠습니다. 작은 차가 큰 차에 비해 경제적이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작은 차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차가 작으면 작을수록 비교적 환경오염을 덜 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 중에 자동차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완전 무공해 자동차가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대량생산되는 자동차 중에 공해를 전혀 유발하지 않는 자동차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배기량이 작은 차일수록 대체로 에너지 소비도 적고 오염물질도 덜 배출합니다.

제가 작은 차를 좋아하게 된 추억의 사건을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십여 년 전에 친구 교목들과 함께 로마를 여행하다 콜로세움 근처에서 목격한 일입니다. 부부로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작은 차에서 내리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머리가 하얗게 세셨지만 곱게 늙으신 두 분과 작고 예쁜 차가 퍽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로마의 거리에는 그렇게 작고 예쁜 차들이 꽤 많았습니다. 하여 가이드에게 경차가 많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이탈리아가 페라리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명차를 만드는 나라이지만 아마도 전 세계에서 경차 비율이 가장 높을 것이라며, 로마에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적지라 시민들 스스로 환경문제에 민감하여 경차를 더 많이 애용하는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차에 무리한 지출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차격이 인격’이라는 말도 등장했었지요. 하지만 자동차는 그때나 지금이나 운행하면 할수록, 그리고 덩치가 크면 클수록 대체로 에너지도 많이 소비하고 오염물질도 많이 배출해내는 고약한(?) 물건입니다.

로마여행을 계기로 저는 경차 마니아가 되었습니다. 이후 십년이 넘게 경차를 타면서 제 마음은 물론이고 일상생활도 더욱 자유롭고 편리해졌습니다. 고급차를 타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사라졌고, 오히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가장 좋은 차를 가장 경제적으로 이용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차에 관한 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때의 로마여행은 기독교 유적을 돌아보는 성지순례의 한 부분이었지만 제 인생의 한 부분을 자유롭게 해주었기에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행은 사소한 부분에서도 우리 인생에 다양한 영감을 줄 수 있기에 저는 젊은이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지갑을 몽땅 털어서라도 여행을 떠나라고 권합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햄릿>에서 주인공인 햄릿의 삼촌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겉치장하는데 함부로 지갑을 열지 마라. 그러나 여행을 위해서라면 지갑이 허락하는 대로 돈을 써도 좋다.” 이 편지를 읽는 교우님 중에 젊은이들이 있다면, 셰익스피어가 권하는 이 말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흘렀습니다. 다시 차 문제로 돌아와 생각을 좀 더 나누고 싶습니다. 경차는 안전문제에 취약하지 않느냐고 주변에서 염려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법규를 잘 지키고 안전운전을 생활화하는 것이 튼튼한 차를 타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튼튼하고 성능 좋은 차를 타는 분일수록 주변의 이륜차나 보행자 등을 더욱 배려하고 안전운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차를 타보지 않은 사람이 어쩌다 제 차를 타면 금방 사고가 날 것처럼 불안해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차는 생각보다 약하지 않고 불편한 점도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짐칸이 좁아 가족끼리 나들이할 때 다소간 아쉬운 점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불편을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운전하기도 편하고 주차하기도 좋으며, 각종 혜택도 주어져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더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작은 차를 탈 수는 없겠습니다. 체격이 크거나 식구가 많은 사람은 큰 차나 다인승 승합차가 필요하겠지요. 사업상 고급 승용차가 꼭 필요한 분도 있겠고 그냥 개인의 기호가 다르기에 다양한 차들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차를 선택하건 예수사람이라면 환경문제도 고려하여 선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2. ‘창조질서회복’은 환경문제 이전에 신앙의 문제

우리는 ‘환경’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지만, 정작 환경문제에 지대한 관심과 위기를 느끼고 있는 분들은 그 용어를 잘 쓰지 않으려 합니다. 환경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 또는 배경으로 자연을 보는 인간중심적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사람이 중심이고 환경으로 자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전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가 ‘환경보호’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지만, ‘보호’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사람을 보호하고 품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를 사람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제 멋대로 훼손하면 결국 그 대가는 사람들에게 정확히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환경보호’라는 말보다 ‘생태계보존’이라는 용어를 써야한다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동물이나 식물 뿐 아니라 미생물까지 포함해서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활양태를 존중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무생물, 심지어 돌맹이 하나까지도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기에 사람이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며 ‘생태’라는 용어의 한계를 짚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환경’이라는 말보다는 ‘자연’이라는 표현을, ‘보호’라는 말보다는 ‘보존’ 또는 ‘보전’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보존’ 또는 ‘보전’이라는 단어에도 ‘보호한다’는 의미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자연에 함부로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보호’라는 말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보편화된 용어를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까지 바꾸어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문적인 문제는 전문가들이 좀 더 연구하도록 맡기고, 우리는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내용에 동참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환경보호, 또는 자연보전에 해당되는 말로 ‘창조질서회복’이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단지 환경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도 봐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파헤치고 훼손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작품을 제 멋대로 파괴하는 것이기에 창조질서를 해친 신앙적 범죄행위였다는 자각과 함께, 이제는 그 훼손된 창조질서가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우리 예수사람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신앙의 의지가 ‘창조질서회복’이라는 용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문제가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자각은 예수사람으로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 용어 역시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용어가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진 이웃에게는 오히려 불편을 주거나 소통의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기에, 교회 안에서는 적극적으로 ‘창조질서회복’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교회 밖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환경보호’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이웃종교의 생명존중사상 배우기

이제 교우님들과 함께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우리 기독교 전통에서는 오늘날 제기되는 환경문제를 넘어, 생명체는 물론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자연존중사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일 뿐이고 사람을 그 피조물의 으뜸으로 보는 것이 성서의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환경문제와 더불어 주목할 말한 부분을 성서에서 찾는다면, 예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주셨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들에 핀 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신다고 말씀하셨고,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풀잎 하나, 작은 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기르시는 소중한 생명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말씀하셨다고 기록된 다음 문장을 환경문제와 연관하여 주목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도 버리지 말고 남은 조각을 다 모아들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요한복음 6장 12~13절, 공동번역.)

하지만 위의 본문은 굶주리는 이웃을 생각하여 음식을 귀히 여기고 낭비하지 말라는 말씀이지 환경을 생각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존중심이나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성서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고 한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서와 기독교 전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웃종교 특히 동양종교가 갖는 생명외경사상을 본받고 배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 본문을 문자 그대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파괴해온 지난날 우리 기독교의 과오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신앙의 원형은, 이 세상은 죄악에 빠져 어쩔 수 없으니 죽고 나서 천국에 가야 한다는 ‘공간적 하늘나라 신앙’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민중들의 손을 잡고 시작하신 ‘현실개혁적 하나님나라 운동’입니다. 하여 기독교는 교리중심의 현실도피적 신앙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를 밝고 맑게 만드는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운동이 되어야 하며, 앞으로도 계속 현실개혁적인 종교운동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양종교인들 중에는 이러한 기독교의 역동적 운동성에 매력을 느끼고 배우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예수사람들도 우리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미물로 취급해온 작고 힘없는 생명체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엄성과 연관성을 가르치는 동양의 이웃종교들, 특히 불교의 생명존엄사상을 기꺼이 배우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종교 간에 서로 배우고 소통하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미국의 유니온 신학대학원 석좌교수인 세계적 석학 폴 니터 교수는 “부처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라고 고백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더욱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생명체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연계성과 존엄성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빌려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하나님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들이 서로 연관되고 의존되어 있습니다. 하여 우리가 깨어있기만 하면, 종이 한 장에서도 우리는 구름을 볼 수도 있고, 물소리와 새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종이는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무는 비가 없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비는 구름이 없으면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이 한 장에서 구름과 비와 나무도 볼 수 있고, 또한 물소리와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이 한 장 속에는 흙과 햇빛과 달빛이, 또한 공기와 이슬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딸이나 아들을 두신 교우님들은 자식들의 얼굴과 걸음걸이 또는 습관이나 행동거지에서, 교우님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습관들을 보고 느끼실 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교우님의 자매님이나 형제님의 얼굴과 걸음걸이에서도 부모님의 얼굴과 걸음걸이를 보고 느끼실 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또한 부모님을 있게 해 주신 조부모님도 계시며, 조상님들이 모두 다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안에는, 이런 모든 분들을 있게 해 주신 존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세계를, 그리고 우주를, 모두가 서로 어울려 있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4. 환경수칙 정하기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우리 하나님과 연결된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환경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환경수칙’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지키려 노력한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환경보호운동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꾸준히 모색하는 류상태 목사. 최근 한반도 종교전쟁 해법을 다룬 <신의 눈물> 출판     ©대자보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우선 이 편지를 읽으시는 교우님들께서 환경의 날인 6월 5일을 전후하여 가족회의를 여시고 자녀들과 충분히 의논하여 ‘우리 집 환경수칙’을 정하시면 좋겠습니다. 5~10가지 정도로 환경수칙을 정하고 모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놓으십시오. 이렇게 가족 구성원이 뜻을 모으면 혼자 결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뜻있는 일을 하고자 할 때마다 가족이 함께 모여 자주 회의를 열고 뜻을 모으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유익을 가져옵니다. 우선, 가족들이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좋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이해할 수 있으니 좋으며, 아이들의 발표력 또한 향상될 것이므로 학업성적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우님들께 부탁드립니다. 우리 예수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 머물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창하고 어려운 사회문제를 생각하기 이전에,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문제부터 실행에 옮겨주십시오.

만일 교우님들께서 제가 제안한 대로 해보신다면 가정의 화목에도 도움이 되고 환경도 보호하여 이석이조의 보람을 느끼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네요. 더욱 몸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빌며...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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