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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하여’ 사는 삶, 왜 사느냐고 물으신다면?
[류상태의 주일편지] 우리 인생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류상태   기사입력  2013/04/06 [09:07]
지난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내오면서 너무 무거운 주제로 편지를 드린 것 같아 교우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하여 오늘은 교리 문제는 잠시 덮어두고 우리 삶의 문제로 돌아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인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1. ‘~ 위하여’ 사는 삶에 대하여

누군가 교우님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살 거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할 수 있겠지만 왜 사느냐고 물으면 얼른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참 생각하다 먹기 위해 산다거나 그냥 태어났으니까 산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에는 죽지 못해 산다는 분들이 많더군요. 살기 싫은데, 살맛도 없고 사는 재미도 별로 없는데, 매인 게 많아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이 있고, 자식이 딸려 있으니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왜 사느냐고 물으면?>이라는 주제로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 물음에 대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했습니다. “(좋은) 대학가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발표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대학가기 위해 산다는 학생은 대학가면 죽어야 되겠네요. 대학가기 위해 사는 거라면, 대학에 갔으니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성공하기 위해 산다는 학생은 좀 더 오래 살 수 있겠군요. 인생의 성공이라는 건 대학가는 것 보다는 좀 더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나 이 학생 역시 자기가 바라는 성공을 이루면 죽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겠네요.”

왜 사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하게 되면 우리 인생은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많은 교우님들, 특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독실한 교우님일수록 곡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다는 뜻인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일어나는 비극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2. 우리 인생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며칠 전, 신문을 통해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중학교 성적이 석차 상위 2% 안에 들어야 입학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경북지역 자율형사립고에서 전교 1등도 했던 고교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입니다. (한겨레신문, 2013.03.28.)

위의 기사를 보도한 신문은 4월 2일자 기사에서 “서울에서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두는 학업중단 학생이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3구의 학업중단 학생은 계속 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는 내용의 기사도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의 일부를 조금 더 소개하겠습니다.

“1일 입시업체 하늘교육이 2009~2011년 3년간 서울시내 일반 고교 학업중단자를 분석한 결과, 전체 학생 가운데 학업중단 학생이 차지하는 학업중단율은 강남구가 2.4%(1408명)로 1위를 기록했다. 서초구는 학업중단율이 2.3%(825명)로 2위였고, 송파구는 1.9%(1183명)로 공동 5위였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공부와 성적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여 학업을 중단하거나 스스로 생을 접는 안타까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언가 이루어내지 않으면 우리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업적주의가 낳은 결과가 아닐까요?

제가 교직생활을 시작한 첫 해, 고입연합고사 성적 발표를 며칠 앞두고 목숨을 끊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벽제화장터에서 한 줌 재가 되어 나오는 기막힌 모습을 보며 대답할 수 없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공부 때문에 네가 산 거냐? 네 인생을 위해 공부를 한 거냐?”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들이, 부모님들이, 어른들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학생들이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장난삼아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공부도 못하는 게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생긴 게 왜 태어났니?” 사람을 외모와 성적으로 평가하는 세태에 짓눌린 자신들의 슬픈 현실을 억지웃음으로 푸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삶 자체의 가치 때문에 산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제 삶이 의미 있어지는 것이 아니구요.

“(좋은) 대학가기 위해 산다.”는 대답이 진실이라면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을 경우 살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야 내 인생이 가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별 볼일 없는 인생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학생에게는 입시 실패가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학교공부가 재미있고 노력할수록 성적도 오르는 학생이라면 학업을 계속 하여 자신의 꿈도 이루고 사회에도 봉사하며 축복받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노력한다고 다 성적이 무한히 오르는 건 아닙니다. 한 학급에 30명의 학생이 있을 경우, 모두가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으로 산출하면 일등 하는 학생과 30등 하는 학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고, 분명히 재능과 관심은 다른 분야에 있는데, 이놈의 사회가 오로지 성적과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기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고 괴롭기만 하다면, 대학으로부터, 또한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아이들을 놓아주는 건 어떨까요?

이스라엘의 지혜서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능력을 비교하면 다 죽고 개성을 비교하면 다 산다.” 대학도, 돈도, 명예도, 결국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일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우리 모두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사회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을까요?

성적 때문에 고민하며 학업에 대한 부담으로 힘들어하는 자녀를 두신 부모님께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을 잡고 “엄마 아빠에게 중요한 건 성적이 아니라 너 자신”이라고, “네가 엄마의 아들로, 아빠의 딸로 이렇게 커가는 것 자체로 엄마 아빠는 기쁘고 행복하다.”고 웃으며 말씀해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3. ‘내 모습 이대로’ 소중하게 받아들이기

현대인은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많이들 지쳐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우님들 중에 “나는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그래서 허무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 계신지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을 책임감 없이 막 살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우리 사회가 교우님의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받아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아왔기에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건 개인의 책임이고 당사자가 부끄러워해야 할 문제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오히려 그렇게 살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며, 국가의 도덕성과 경영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도 없지만, 나는 하늘 아래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회상하실 수 있다면, 인생을 훌륭하게 잘 사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세속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실패한 인생일 수 있겠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삶을 귀하게 여기실 것이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혹 학력이나 재력 등 외부적인 조건으로 교우님을 평가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호쾌하게 비웃어주십시오. 사람 자체의 소중함을 모르고 외적인 조건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물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비난하거나 미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 사람의 속물성, 즉 그 천박한 말과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마음껏 비웃어주셔도 괜찮습니다.

늘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로 사셨던 우리 예수님도,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이웃들을 품어 안아야 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외부적 조건으로 그들을 평가하고 무시하며 정죄하는 것을 보시고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또한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그 속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수많은 제자들 앞에서 그들을 호쾌하게 비웃어주셨습니다.

‘타타타’라는 제목의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타타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본래 그러한 것’이라는 뜻인데, 한자로는 여여(如如, 같을 여)라고 표기합니다.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 순리를 거스르지 말고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삶 자체가 소중하기에, 그 귀한 삶을 향유하라고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시면서 무엇을 이루셨건, 또한 얼마나 가지셨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삶 자체로 우리는 모두 귀합니다. 소중한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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