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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오색단풍과 천년 은행나무
용문사, 은행나무, 정지국사 부도 및 비와 용문산의 아름다운 경치
 
김철관   기사입력  2012/10/28 [10:59]
▲ 용문산 단풍     © 김철관
“경기도 양평 용문사로 가는 산책로의 울긋불긋한 오색 단풍에 매료돼, 깊은 황홀경에 빠졌다.”
 
 25일 저녁 양평 대명리조트에서 언론중재위원회 주최 ‘영상 사진 보도와 초상권 침해’ 세미나를 마치고, 일행들은 26일 오전 이곳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용문사와 천년 은행나무 등을 보기위해 버스를 타고 용문사로 향했다. 금요일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용문사 입구는 많은 사람들이 등산복 차림으로 북적였다.
 
지난 2010년 7월 3일과 4일 생전 모친의 생일과 조카 면회를 위해 경기 양평 한 리조트에서 1박 2일을 묶었는데, 7월 4일 모친을 비롯해 아들 한솔, 딸 단비, 형, 형수, 조카 등 가족과 함께 용문사를 찾았다. 모친은 숨이 차 주차장에서 기다렸고,  형수, 조카 함께 용문사 은행나무로 향했다. 그 때의 용문사와 은행나무의 느낌을 기사로도 남겼다. 다시 여기에 오니 1년 6개월전(작년 4월) 84세의 일기로 고인이 된 모친(고 송문엽 여사)이 많이 그리워졌다.
 
이날 친환경농업박물관 인근 주차장에 버스를 주차하고, 일행은 용문사로 향했다. 친환경농업박물관을 지나기 바로 앞 현수막에 친환경농업박물관 기획전 ‘천년 은행나무 이야기-똥낭구 엄마 원화’전(10월 5일부터 28일까지)의 한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똥낭구’라는 글귀였다. 이날 박광희 양평군 문화관광해설사는 ‘똥낭구’는 은행나무를 의미한다고 했다. 왜 똥낭구 일까? 박광희 문화관광해설사는 이렇게 말했다.
▲ 친환경농업박물관     © 김철관

“똥낭구는 용문사 은행나무를 일컫는다. 사찰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된 보호수다. 그 은행나무에서 은행 열매가 떨어지면 아주 지독한 똥냄새가 난다. 그래서 열매를 ‘똥낭구’라고 하고, 똥낭구 엄마는 열매를 맺게 한 은행나무를 일컫는다.”

박물관 정면 건너편에 무릉도원의 도연명의 시가 눈길이 갔다.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한번 뿐이네, 좋은 때 부지런히 힘 쓸지니,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친환경박물관이다. 이날 동선은 박광희(55) 해설사의 도움으로 친환경농업박물관을 지나 일주문, 볼렛길, 천년은행나무,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 및 비석 순으로 진행했다.

먼저 용문산은 1157m로 경기도에서 화악산, 명지산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 박광희 해설사     © 김철관

용문산의 본래 이름은 ‘미지산’이라 불렀다. 용문산은 ‘용이 드나드는 산’ 혹은 ‘용이 머무는 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지산을 용문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부터다.
 
용문산의 가장 높은 주봉은 가섭봉이다. 가섭봉은 부처님이 가장 아끼던 제자의 이름을 따 붙인 이름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곧장 가니 용문사 일주문이 나왔다. 용이 4구가 조작돼 있었다. 박광희 해설가는 용문사 대웅전에도 2구가 조각돼 있다고 말했다.
 
용이 우리 문화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가 전래되면서 함께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용은 상상의 동물, 상서로운 동물로 인식돼 있다. 신라는 불교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나 이차돈의 순교 후 강력히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 때 용에 대한 이해도 ‘호불용’에서 ‘호국용’으로서 왕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국가를 지키는 호국용의 대표적 상징은 신라 문무왕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동해에 수장돼 용으로 태어나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상징으로 후세에 알려지고 있다. 용은 물을 관장하는 수신이고, 농경문화의 제일 중요한 대상신이 용이다. 용을 ‘미르’라고도 표현한다. 특히 조선시대 접두사로서 용교의, 용궐, 용루, 용주(용의배), 용포 등 용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존재는 왕뿐이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이 있는데 이곳 용문사는 일주문 밖에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문은 절에 들어가는 첫 번째의 문이다. 측면에서 보면 한 줄로 보여 일주문이라고 한다. 용문사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기도 하다.  일주문을 경계로 일주문 밖은 속세, 일주문 안은 부처님의 세상, 즉 피안의 세계이다. 이곳 일주문은 지난 1982년 이선걸 스님이 중창했다. 옆에 흐르는 도랑물은 주지스님인 호산스님과 양평군의 기획으로 지난 2009년 만들어졌다.

▲ 용문사 일주문     © 김철관
 용문사로 향하는 산책로를 ‘볼렛길’이라고 부르는 데, 길옆에 흐르는 도랑물 자연수는 맑고 깨끗하다. 흐르는 물결과 물결 안에 비치는 단풍은 멋진 그림을 연상케 한다. 이날 산책로 주변은 온통 단풍으로 만개했다. 아름답고 멋진 광경이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가을의 향취를 물씬 풍기는 듯했다.
 
도랑물은 용문산 깊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고, 자연수였다. 여름 휴가차 이곳에 들른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맨발로 걸어간다고. 물론 신발로 걷는 사람도 있다.
 
한참 걷다보면 볼렛길 옆 캐릭터 그림 3점이 나온다. 그중 하나는 양평군 캐릭터인 ‘물사랑’이고, 이는 양평의 맑은 물을 지키는 수호신을 컨셉으로 물의 모습을 의인화해 형상화했다고 알려졌다. 캐릭터의 역동적인 동작은 활기차고 신선한 양평인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하나는 양평군 로고인 ‘은행잎’이다. 은행잎은 아름다움, 향기로움, 자유로움의 상징이다. 마지막 로고인 ‘새와 나뭇잎’이다. 새는 활기참을 의미하고, 나뭇잎은 청정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천년 고찰 용문사로 가는 길은 볼거리가 많다.
농업박물관 입구에서 약 1킬로쯤 왔을까. 드디어 거대한 천년 은행나무가 녹색과 노란으로 물들어 위엄을 자랑했다. 이곳 관람자들은 은행나무 촬영에 혼혈을 쏟았다.

▲ 용문사 은행나무     © 김철관
천연기념물 30호인 은행나무는 열매가 많이 열기로 소문나 있다.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로도 잘 알려져 있다. 1100년에서 1500년으로 수령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는 41m이며 흉고둘레는 14m이다. 은행나무의 탄생설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심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의 설은 신라의 고승이었던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세워 놓은 곳에 뿌리가 자란 것이라고 알려졌다. 이 은행나무를 천왕목, 호국영목으로 불리고 있다. 은행나무를 천왕목이라 불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용문사의 사천왕문이 없어 그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 앞 비석은 이를 잘 확인시켜준다. 또 호국영목이라 불리는 이유는 나라의 큰 변란이나 경사가 있을 때 윙윙 소리로 울며 길흉을 예고해 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종황제가 승하했을 때도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 8.15해방과 6.25전쟁 때도 윙윙 우는 소리를 인근 주민들이 모두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신비스러운 나무를 나무꾼이 자르려고 하자 청명했던 날씨가 갑자기 캄캄해지고 천둥번개가 치며 소낙비가 쏟아져 기겁을 하고 도망갔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907년 일본군이 의병의 은거지였던 이곳 용문사를 비롯해 상원사, 사나사 등에 불을 지르고 다시 와보니 용문사는 불에 타고 없었고, 은행나무만 그대로 살아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이 잘라 없애려 톱을 대자 천둥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자르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호국영목으로 부르고 있다. 나무 옆에 그 흔적인 아픈 상처가 옹으로 남아있다. 지금까지는 구전이나 전설에 따르는 것이지만 과학적인 것도 있다.
▲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임원 기념촬영     © 김철관

천년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지난 1983년 설치한 90m높이의 피뢰침이 존재한다. 피뢰침 높이에서 45도 각도 이내에 나무가 있어야 은행나무를 보호할 수 있다.
 
 은행나무는 봄에 잎이 나고 꽃을 피워 열매가 맺는 동안 1일 수분량은 2000리터 정도가 소요된다. 옆의 계곡물로 수분공급은 충분하지만 영양분이 문제였다. 영양분은 어디에서 공급 받은 것일까. 바로  30미터 옆 해우소(화장실)가 있는데 이곳에서 공급을 해준다고 한다. 다른 나무에 비해 200배 이상의 산소를 공급해 줘야 한다. 은행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서로 마주봐야 한다. 은행나무의 수꽃가루는 100리 이상을 날아다닌다. 은행나무의 암꽃은 10리 이상의 수꽃가루를 흡입할 수 있다. 과거 1가마 정도의 은행을 수확했는데 이제 그 규모가 더 늘어 현재는 5가마 정도를 수확하고 있다. 은행나무 밑 땅에 그물망이 깔려 있는데 현재 그곳에 은행 열매들이 많이 떨어져 있다. 어느 정도 다 떨어지면 그물만 걷으면 수확이 간편하기 때문에 그물망을 설치해 놓았다.
 
은행나무 관람을 마치고 바로 앞 용문사로 향했다. 대웅전이 보였다. 대웅전에서는 스님의 염불과 불경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지난 647년 신라 진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 신덕왕(913년) 때 대경대사 여염의 창건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친히 행차해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 용문사 경내     © 김철관
오직 역사 최초 기록은 고려말 우왕 4년 1378년 정지국사 (김)지천이 개풍 경천사에서 대장경 한질을 가져와 대장전 3칸을 짓고 옮겨 보관했다고 돼 있다. 특히 세조의 어머니이자 세종의 비였던 소헌왕후가 사망한 후 세조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던 차에 꿈에 모친이 나타나 ‘나를 위해 불상 2기와 보살상 8위를 조성해 용문사에 모셔라’고 했다고 전해지고 있고, 세조의 명에 의해 대대적인 불사를 하게 됐다고 알려지고 있다.
 
지난 1893년 고종 30년은 304칸의 대사찰로 300여 승려가 거처했다. 이렇듯 용문사는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시대에도 그 면면히 유지해 왔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웅장했던 옛 모습은 일제 침략기 1907년 정미의병 때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잿더미로 변했고 현재의 모습은 지난 1982년 이선걸 스님이 조상했다.
 
용문사 대웅전, 범종각, 삼성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 등 경내를 관람하고 용문사 뒷산 200미터 여 거리에 위치한 정지국사 부도 및 비석으로 향했다. 가는 산길 주변 나무의 휘항 찬란한 단풍과 맑은 공기에 매료돼 주체할 수 없는 참 기운을 느꼈다. 시간이 촉박해 천천히 갈 수만은 없어 아쉬움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다.

▲ 정지국사 부도     © 김철관

▲ 용문산 단풍     © 김철관

붉고 아름다운 단풍이 연신 똑닥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했다. 직접 보는 환경보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잡힌 환경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이리 저리 앵글을 잡아 봤지만 시간이 없어서인지 사진으로 표현이 잘 안됐다. 평소는 실제 환경보다 사진으로 보는 의사환경이 더 나았는데  이날 치고는 실제 본 단풍이 사진 속 단풍보다 더 낫게 보였다. 박 해설사가 빨리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약 200미터 정도의 뒷산 길을 올라가니 정지국사 부도가 나왔다. 정지국사 부도 및 비는 보물 제 531호로 지정돼 있다. 정지국사는 고려말 고승으로 속명이 김지천이다. 그는 30세인 1353년(공민왕 2년)에 무학대사와 함께 중국 연경으로 들어가 인도승이었던 지공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지공스님의 법통을 잇고 있는 나옹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스님은 1356년(공민왕 5년)에 중국 연경에서 귀국해 명산을 두루 다니면서 수행을 했다. 스님은 말이 적고 근엄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스승이었던 나옹스님에게 가르침을 함께 받았던 무학대사는 조선의 왕사로서 크게 이름을 떨쳤으나, 스님은 벼슬이 싫어 도에만 정진했다고 역사에 기록돼 있다.
 
지천대사(정지국사)는 개풍군 경천사에서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와 대장전을 짓고 개풍 경천사에 보관돼 있던 구씨원각대장경 한질을 가져와 옮겨 보관했으나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소실됐다. 지천대사는 천마산 적멸암에서 1395년 62세로 입적했고, 다비를 하자 많은 사리가 나와 제자 조안 등이 태조 7년인 1398년에 부도와 비를 세웠고, 나라로부터 정지국사로 추존 됐다.
▲ 정지국사의 비     © 김철관
정지국사 비석은 부도에서 산 아래로 70m 떨어진 곳에 있다. 정지국사 비석의 찬조자 명단과 정지국사의 공적에 대한 내용이 당시 성리학자였던 권근의 글로 새겨져 있다. 정지국사 비석에 기록된 내용 외 관련기록이 아직 없다. 하지만 개국초기부터 철저한 유교중심사회였던 조선 초, 스님의 흔적을 새겼다는 것에서 정지국사 인품이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함께한 양평군 박광희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이 컸다. 마지막으로 그는 “1973년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양평은 수도권의 상수원보호지역으로 각종 규제로 묶이게 됐다”면서 “그래서 양평은 친환경농업으로 살길을 전환했고 전국최초로 친한경농업박물관을 갖게 됐다”고 양평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부탁했다.
 
정지국사 비석을 끝으로 다시 주차장인 친환경농업박물관으로 행했다. 도착하자 버스에 올라타 이곳에서 30여분 떨어진 정약용 선생의 묘와 생가, 실학박물관 등을 관람하기위해 그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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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10/28 [10:5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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