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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을 통해 본 장승업과 임권택
예술가는 장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ba.info/css.html'>
 
변희재   기사입력  2002/05/14 [16:41]
{IMAGE1_LEFT}과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80년대 UIP 직배가 현실화될 때만 해도 한국 영화계에는 종말론이 대두될 정도로 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당시 시장만능주의자들은 '좋은 영화를 만들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왜 한국 영화를 봐야한단 말인가?'라는 냉정한 말들을 쏟아냈었고 실제로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와 홍콩 영화보다 작품의 질적 측면에서 크게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한국영화가 십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바로 그 시장논리에서 외화를 압도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 양적 질적인 발전의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최소한 작품의 완성도만을 놓고 본다면 영화에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은 임권택이라는 큰 나무를 외면하는 못할 줄 안다.

임권택이라는 큰 나무?

한국 영화의 앞날을 예측하기도 힘든 1987년에 <씨받이>를 베니스영화제 본선에 올려놓으며 강수연이라는 월드스타를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그 뒤에 1990년 <장군의 아들>로 당시 한국영화의 서울개봉 최대관객인 60만명을 끌어들여 흥행 감독으로도 성공했다 또한 그 기록은 도저히 흥행이 될 것 같지 않았던 <서편제>로 다시 갈아치운다. 임권택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까지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작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감독이자 흥행 감독이었다. 이미 이장호와 배창호 감독의 흥행력이 크게 떨어진 시기였던 점을 감안해 보면, 지금의 한국영화의 힘의 원동력의 한 축은 임권택 감독이 맡았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후배들조차 줄줄이 시대에 밀려 영화판에서 떠난 시기에도 아직까지 70에 가까운 나이에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취화선>은 임권택 감독의 일대기인가??

임권택 감독 자신이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지만 <취화선>의 촬영현장을 100일 간 동행 취재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조심스럽게 <취화선>이 임권택 감독 자신의 삶을 그린 것 같다는 말을 한다. 특히 <취화선>의 실존 인물은 19세기 중반의 화가 장승업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볼 때, <취화선>의 장승업이라는 인물은 아마도 임감독 자신의 생각에 따라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인기에 사로잡혀 생동하는 기운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라고 묻는 장승업의 오랜 스승 김병문(김병문 역시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의 질문에 장승업은 이렇게 답한다.“일일신 우일신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처럼 저도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싶습니다. 제가 만든 그물에 제 스스로 걸리는 짓이야 하겠습니까?”?

영화의 기법 상으로 보면 <취화선>은 그 동안 임권택 감독이 추구한 영화와는 많이 다르다. 롱테이크를 기본으로 하던 그간의 영화와는 달리 <취화선>에서는 좀처럼 롱테이크를 찾아볼 수 없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짧은 에피소드를 나열해가며 예술가의 고뇌를 진지함과 해악을 깃들여 관객들에게 던져줄 뿐이다. 물론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특유의 한국의 자연미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영화의 미학적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허문영 <씨네21>기자는 거장의 새로운 시도로 후한 점수를 준다.

"임 감독은 완벽한 형식미로 모든 요소를 정제했던 <춘향뎐> 때와는 달리 이질적 요소들의 균열을 해소하지 않고 텍스트의 상처가 되도록 내버려두는 힘든 길을 택한다. 이 상처는 결함일까, 아니면 이 상처 스스로 미적 완성의 끝없는 추구와 그것의 궁극적 불가능성이라는 주제에 화답케 하는, 또다른 혁신적 시도일까. 분명한 건 세계적 절찬을 얻은 <춘향뎐>의 형식미를 뛰어넘는 좀더 깊고 다차원적인 형식의 세계를 임 감독은 탐색하기 시작했고, <취화선>은 그 첫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임권택은 또다시 아찔한 미학적 모험을 벌이며, 새로운 영화의 경지를 두드리고 있다.(<씨네21> 2002년 5월 7일)"

반면 영화평론가 강성률은 임권택만의 미학적 완성도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한국의 산천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내는 그의 능력은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 보고 있는 자체로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은 소스라칠 만큼 아름답지만, 그런 아름다움이 작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아쉬운 아름다움으로 머물고 만다. ‘취화선’은 장승업의 치열한 고뇌에 비해 너무나도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게다가 영화는 여백을 중시했던 동양화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영화 화면이나 구성은 너무나 빼곡이 닫혀 있다. 화면의 여백 속으로 들어가 같이 거닐거나, 화면의 인물 속에 동화되어 정서적 동일화를 이룰 시간을 주지 않는다.(<디지털 타임즈> 2002년 5월 7일)"?

실제로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장면과 장면이 너무 튄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또한 역사적으로 기록에 남아있지도 않은 장승업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사상파와의 만남을 작위적으로 첨부한 감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술과 삶의 관계, 또한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너무나 교과서적인 대사로 표현하는 안일함도 엿보인다. 어찌보면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왕실과 서민들의 술집을 오가는 모차르트의 다른 모습을 장승업을 통해 보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술 한 잔만 사주면 아무 곳에서나 그림을 그리던 장승업이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당시 기득권 세력이던 양반들의 취미에 봉사하고, 나중에 결국 고종의 명을 받아 궁궐에 입성했다가 다시 서민들의 술집으로 돌아가는 구도도 조금은 식상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 속의 장승업의 삶, 혹은 예술가의 삶 자체가 식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장승업의 삶, 임권택의 작품?

임권택 감독이 화가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70년대부터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소재는 장승업이 아니라 김홍도였다. 김홍도와 같이 이름난 화가가 지금으로 말하면 포르노그래피라 부를 수 있는 춘화도를 그렸다는 진위여부를 영화를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다 장승업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는 바로 그가 임금의 명을 어기고 궁궐을 도망갔다는 점 때문이었다. 임감독은 정성일씨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맞아요. 기억이 나요. 정성일씨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사실 내가 장승업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78년경이었어요. 그때야 장승업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지. 다만 이 사람이 나라의 임금이 그림을 그리라는 데도 그게 싫어서 뛰쳐나갔다는 게 내 마음에 들었어요. 그때는 그런 게 속 시원한 시절이었으니까."?

{IMAGE2_RIGHT}임권택 감독은 정치적으로 문화 운동을 한 사람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등 군사 정권 시절에도 그냥 장인의 정신으로 묵묵히 영화만을 만들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격정의 시대에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의 눈으로 그 역시 알게 모르게 정치적인 소재를 다룬 적도 있었다. 바로 1985년에 감독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영화 <길소뜸>이다. 1983년도에 전 국민의 눈물을 자아냈던 이산가족 찾기 운동과 <길소뜸>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길소뜸>이 신파의 눈물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이산가족 상봉을 소재로 한 영화라면 당연히 "오빠! 누나!" 하며 영화 속 배우들만 울고 관객은 억지 웃음을 지으리라 생각하면 오판이다. <길소뜸>은 당시로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냉정하게 분단의 현실을 성찰하는 영화였다. 실제로 임감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를 기획하고자 했었다. 북한의 현실 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지만.                    사진 출처 : 씨네21

장승업이 가상의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사상에 눈길을 주는 장면을 보면 꼭 <길소뜸>을 만들었던 임권택 감독이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밤을 새서 촬영하고도 장소를 옮겨 다시 찍는 장인의 눈에도 사회와 현실을 보는 눈을 감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임금의 명을 어기고 도망친 장승업과는 달리 임권택 감독은 대통령의 덕으로 <서편제>라는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흥행기록을 세우기도 했었다. <서편제>가 국민영화가 된 데에는 그때만 해도 전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김영삼 대통령의 공식 관람이 큰 기여를 했었으니까. 또한 <서편제> 이후 조정래 원작의 <태백산맥>을 영화화하기도 했었다.

사실 <태백산맥>은 원작을 뒤바꾸며 가장 잘 만든 반공영화라는 말까지 들어 임권택 감독은 역대 그의 작품 중 가장 혹평을 받기도 했었다. <씨받이> 이후의 임권택만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실망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이미 1979년에 <깃발없는 기수>라는 또 하나의 반공영화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물론 <깃발없는 기수> 역시 "때려잡자 공산당!"의 수준의 영화는 아니었다. 그는 그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휴머니즘을 놓치지 않는다. 그의 장인정신과 인간애는 언제나 건재하다.

예술가는 장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태백산맥> 이후 임권택 감독은 <노는 계집 창>에 이어 <춘향뎐>을 만든다. 사실 <춘향뎐>이야말로 오로지 영화의 미학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그의 장인정신이 가장 빛을 발한 영화이다. 음악을 영화로 바꾸어낸다는 것은 장르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취화선> 역시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봐야 한다. <취화선>은 그림을 영화로 바꾸어 낸 작품이다. 정성일의 동행취재 기사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세로가 긴 동양화를 가로가 긴 스크린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 많은 그림과 철저하게 설계된 세트, 그리고 수십 년 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익힌 한국의 풍경을 한 편의 영화로 조화시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아무리 영화적 이론에 뛰어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젊은 작가주의 감독이라 하더라도 감히 제작할 엄두도 못 내는 소재이다.

<취화선>의 장승업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역시 대사로 풀어내니 어색하긴 하지만 장승업에게 보다 서민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진솔한 그림을 그리라는 김병문에게 항변하는 말은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만 하다.

"어차피 희망이 안 보이는 서민들이 제 그림이라도 보며 위안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 아닙니까?"

의미심장하게도 <취화선>의 결말은 장인들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도예공장에서 마무리 된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오직 불덩이 속에서 보다 나은 도자기만을 만드는 장인들 틈에서 장승업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준다. 도공과 화가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왜 도공은 도자기만 잘 만들면 되는데 화가(영화 감독)는 삶과 사회 속에서 방황하고 좌절해야 할까?

역사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장승업의 죽음을 <취화선>에서는 장승업이 도자기를 굽는 화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임권택은 아직 살아있다. 어차피 도공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던 오래된 충무로의 도제 시스템에서 영화 감독으로 성장한 임권택으로서는 작가보다는 장인의 직업이 더 체질에 맞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산업적 영향력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한국 영화를 움직은 파워 15위에 선정된 임권택이 살아있는 이유이다. 이제는 꼭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들 수 있는 환경이 한국의 영화계나 그 자신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가? 금강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 장승업과 달리 임권택은 현실에서도 신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치열하게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신선과 장인은 같은 선에 서 있고, 그러한 장인의 존재 역시 예술계에서는 분명히 필요하다.

* 취화선 공식홈페이지 안내 : http://www.chihwase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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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5/14 [16:4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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