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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카운트다운 돌입한 흥사단 발자취
[초점] 한국 근현대사 아우르는 한세기 활동, 새로운 조명과 재평가 필요
 
이영일   기사입력  2012/06/13 [17:34]
지난 5월 13일은 흥사단이 창립한지 꼭 99년이 되는 날이었다. 순수 국내 한국인이 설립한 NGO의 효시였으며 동포들의 발전은 물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을 위한 교육·인재 양성의 원대한 시작이었던 흥사단은, 민족의 스승, 위대한 지도자, 겨레의선각자로 추앙받는 도산(島山) 안창호 선생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경기도 홍언(洪焉), 충청도 조병옥(趙炳玉), 경상도 송종익(宋鍾翊),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평안도 강영소(姜永韶),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황해도 민찬호(閔燦浩),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등 8도 대표들로 창립됐다. 그 작은 시작이 지금 100년을 앞두고 있는 것.

▲ 제물포에서 초기 미주 한인 이민 102명을 태웠던 미국 상선 갤릭호     © 이영일
 
2013년 흥사단 100주년은 동포들의 미국 이주 110년이 되기도 하는 해이다. 1902년 12월 22일 한국인 102명을 태운 미 여객선 갤릭호가 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기착한 때가 1903년 1월 13일인 것. 이미 도산 선생은 1902년 25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 상황이었다. 그러나 1903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동포들의 이주와 막노동과 날품팔이, 소작농 등의 기구하고 비참한 생활상을 보고 학업을 포기, 동포들의 권익보호와 화합, 생활개선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던 도산 선생은 1903년 9월 샌프란시스코 시내 유다스트리트에 한인 최초의 교회 '상항연합감리교회'를 세워 동포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졌다. 거리에서 한국의 인삼 장수들이 서로 머리를 잡고 싸우는 것을 보고 새생활 공동훈련을 위해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설립,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간하는 등 동포들의 상부상조에서부터 조국의 해방을 위한 단결 고취 등 한인 사회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 공립협회는 도산 선생이 세운 미주 최초의 한인단체 한인친목회가 발전하여 설립되었다. 1열 왼쪽부터 송석준, 이강, 안창호 선생이다     © 이영일
 
1907년 신민회 조직을 위해 귀국하였던 도산 선생은 평양과 대구에 자기회관을 설립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국내 진입을 위한 훈련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05인 사건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그 유명한 거국가를 남기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마침 도산 선생이 직접 설립한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연합한 국민회(國民會), 다시 이 국민회와 1905년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에서 설립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설립되자, 도산 선생은 1912년 11월 북미와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를 비롯, 만주와 시베리아에까지 설립된 4개의 지방총회를 모아 중앙총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도산 선생은 이렇게 해외 동포들의 총단결이 이루어지자, 민족을 대표할 인재 양성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조직 구상을 박차를 기한다. 1912년, 리버사이드에서 로스엔젤레스로 온 도산 선생은 우강 송종익(宋鍾翊) 선생과 청년학우회의 이념을 계승할 단체를 구상하고 조직에 착수하여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을 창립한다.

흥사단은 당시 미주 사회의 주요 지도자였던 박용만, 이승만 등의 독립운동 전략과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무력운동과 외교운동 중심이 아닌 지식인·기독교 신자·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인격수련 중심의 운동방식이었다. 


▲ 안창호 선생이 작성한 독립운동 단계별 방략도 초안과 흥사단을 구상하면서 확립한 흥사단운동 방략도     © 이영일
 
동 년 12월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시카고에 흥사단 평안도 대표인 강영소의 역할로 흥사단 시카고 지부가 설립되었고 1922년도에는 뉴욕 매디슨 23가의 매디슨 애베뉴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흥사단 활동을 주축으로 전 미주 지역으로 활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흥사단은 미국의 3권분립 정치체제를 도입, 입법부(공의회)·집행부(이사회)·그리고 사법부(감사회)와 같은 세 기능으로 조직을 구성한다. 이는 이민 1세대들에게 미국 사회 속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쉽게 습득하고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사고를 공유하는 기능으로도 작용했다.

특이한 점은, 흥사단 단우(회원)중에 대한인국민회 소속이 많았다. 그것은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 선생이 1912년 11월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서 연유하기도 했지만, 대한인국민회가 을사조약 폐기운동·합병 반대운동 등 실천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도 동포들의 친선과 권익 도모에 소홀히 하지 않고 미국인들과의 법적 투쟁이나 노무계약·한국에서 건너오는 유학생의 입국허가나 입학허가 등 구체적인 한인사회 대변 역할을 해 캘리포니아 주정부 등으로부터 공식 법인 설립을 받는 등, 동포 사회 발전을 위한 도산 선생의 노력에 적극적 지지와 믿음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경축행사의 한장면     © 이영일
 
흥사단은 단우로 가입하는 절차에 있어 우선 단의 목적과 활동을 찬성하고 문답위원들로부터 구두시험을 거쳐 도산 선생이 직접 주례를 하는 입단식에서 선서를 했는데, 입단식이 당시 기독교의 세례문답과 유사한 형태를 띔으로서 결과적으로 당시 교회를 중심으로 확장되었던 미주 이민사회 속에서 새로운 조직을 통한 조국 독립의 열망, 나라없는 설움에서 오는 소속감 결여를 해소하는 기능을 하며 거부감 없이 흥사단의 이념이 급속히 전파되고 그 세가 확산되는 역할로 작용했다.

거꾸로 이러한 한인 교회가 독립운동과 건국을 대비한 인재 양성에 있어 흥사단 단우들의 훈련장소로 매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도산 선생의 흥사단 단우 교육방법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조직훈련방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사단은 독립운동의 지원과 물자보급 등의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흥사단 함경도 대표인 김종림을 주축으로 1917년 샌프란시스코에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설립 캘리포니아 쌀 농사에 주력했고, 1920년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 공군 조종사를 훈련시키기도 했다. 또한 국내에는 수양동맹회·동우구락부·수양동우회등의 조직과 중국에 원동위원부 등의 흥사단 조직들을 건설하는 한편 해외 여러 군데로 나뉘어져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아 통일된 상해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에 자금지원을 하는 등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 흥사단 함경도 대표 김종림이 설립하고 흥사단원 곽림무가 훈련을 맡아 재외 한인들을 국민군으로 편성하고자 한 한인비행학교 훈련생의 모습. 사진 좌측 네번째가 임시정부 노백린 군무총장     © 이영일
 
흥사단은 1913년도부터 1917년도까지 집중적으로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의 동포 등을 대상으로 흥사단 운동을 전파하여 나갔으며 1915년에는 안창호 선생이 직접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가 동포 노동자들을 위로하면서 조직강화를 꾀하였다. 

 흥사단은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미국내 중국인들의 협력을 통해 독립의연금 모금을 추진하였다. 흥사단 경기도 대표인 홍언 단우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오레곤·워싱턴·유타·아이다호 등지에 산재해 있던 중국인 상인 교상(僑商)들로부터 기부받은 자금을 독립운동 기금으로 조성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직접 "미국에게 보내는 한국인의 호소"라는 글을 써 시사주간지 네이션(The Nation)에 게재하여 약 12,600$를 거두는 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또한 3.1운동 이후 미주 여러 지역의 여성단체들이 모여 결성된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뒤에서 후원하기도 하였다.
 
▲ 3.1운동 소식을 접한 흥사단원들과 미주 한인들은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자유한인대회를 열고 세계만방에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한인독립연맹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들고 시가 행진을 전개했다. 시위대 앞에는 미국인들의 군악대가 앞장을 서고 있다     © 이영일
 
그러나 흥사단은 가장 궁극적 목적인 인물양성을 위한 교육 및 동포들과 한국인 유학생(新渡學生)을 대상으로 흥사단원으로 입단시켜 훈련을 시켜 나가는데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중에는 조병옥(趙炳玉), 장리욱(張利郁), 오천석(吳天錫), 이용설(李容卨), 최희송(崔熙松)등 쟁쟁한 인물들이 많은데, 장리욱 박사의 경우 1912년 미국 유학중에 일부러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는 도산 선생을 찾았고 1917년에는 여름 중부 캘리포니아의 다뉴바(Dinuba)농장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던 중 도산 선생과의 문답을 통해 흥사단에 입단했다. 그 이후 장리욱 박사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925년 듀북대학 졸업생이 되었고 나중에 캘리포니아에서 흥사단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흥사단은 1920년까지 미주에서 150여명의 단우를 확보하여 동맹독서·동맹운동·동맹 작업·동맹저축등을 통해 단우 각자의 수련과 동지적 결속에 힘썼다. 이렇듯 흥사단은 초기 미주 한인 사회속에서 한인 사회의 단결과 미국 사회 속에서 정착하는데 정신적인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는데 크기 기여했다. 그 이면에는 도산 안창호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으나, 그 자신 스스로 자신의 정치적 사고가 총결집된 조직 "흥사단"의 주요 핵심 단우였기에 그의 모든 활동은 흥사단 정신에 입각하여 사고되고 계획된 흥사단 방략에 따라 진행되었음은 실로 대단한 운동가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 1916년 흥사단 연례대회 장면.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보이며 사진 오른쪽이 도산의 부인 이혜련 여사이다. 건물 중앙에 흥사단의 영어 약자인 YKA (Young Korean Academy)와 건물 오른쪽 한문으로 興士團이 새겨져 있다     © 이영일
 
이러한 흥사단의 창립 100년은 독립운동사, 시민운동사, 청소년운동사, 평생교육사적 등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의의를 갖는다. 특히 1963년부터 흥사단이 전개한 청년학생운동 조직 '흥사단 아카데미 운동'은 군부독재 타파와 민중의 자각, 지금의 민주화에 이르는 거대한 물줄기에서 시민운동의 태동에 대단한 자양분 역할을 하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지금은 아카데미 회원수가 급격히 축소되었으나 지금의 흥사단은 청소년 육성과 인권, 투명사회, 통일운동으로 그 관심사를 집중하고 있다.

조국 독립과 미국 한인 동포들의 권익 보호,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오고 있는 흥사단이 100주년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가운데, 새로운 조명과 현대사적 재평가,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숨은 역할이 빛을 봄으로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다시 새로운 100년에 도전해 가는 모습을 지켜 볼 일이다.
경희대NGO대학원에서 NGO정책관리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과 문화일보 대학생기자, 동아일보e포터 활동을 했고, 시민의신문에서 기자 교육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중앙일보 사이버칼럼니스트, 한국일보 디지털특파원, 보도통신사 뉴스와이어의 전문칼럼위원등으로 필력을 펼쳤다. 참여정부 시절 서울북부지방법원 국선변호감독위원, 대통령직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국무총리실 삼청교육피해자보상심의위원등 다양한 민간위원을 역임했다. 2015년 3월, 사회비평칼럼집 "NGO시선"을 출간했고 각종 온오프라인 언론매체에서 NGO와 청소년분야 평론가로 글을 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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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6/13 [17: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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