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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에 없는 남자, 왜 B에게 분노하지 않나?
[시평]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다
 
류상태   기사입력  2011/12/22 [05:10]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A씨 사건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우연히 친구들 모임에서 사진을 보았다는 지인의 얘기에 의하면, A씨가 이 아픔을 딛고 다시 사회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하루 빨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야 할 이 얘기를 다시 거론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결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수많은 편견 속에 갇힌 A씨들(이런 편견에 의한 희생자 다수)과 우리 사회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1. 기독교 성서에 나타난 A씨 이야기

기독교 성서 요한복음에는 A씨 사건과 비슷한 소재의 이야기가 나온다. 흔히 '간음 중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야기'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8장 1~11절에 수록된 이야기다. 내가 '사건'이라고 하지 않고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이것이 예수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일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앞뒤 문장과 어울리지 않게 생뚱맞게 등장하는 이 이야기를 성서학자 대부분은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끼워넣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이 이야기의 주요 의도는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의 너그러움'을 강조하는 데 있다. 하지만 성서는 시대의 산물이기에 그 시대가 갖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이야기도 시대의 한계,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의 편견에 그대로 젖어 있다.

우선 이 이야기에서 상대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왜 여인만 홀로 남아 곤욕을 치르고 있는가? 사내는 체포되기 전 도망갔기에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건이라기보다 이야기일 가능성이 큰 이 기록에서 사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어디서나 늘 이런 문제에서 남자는 빠지는 것이 상례다.

양식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여인을 두고 혼자 사라진 남자에 대해 더 분노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이야기를 소재로 설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중에 사라진 남자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설교자나 청중의 대부분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성서의 기록에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교리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시각에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그는 당시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서 공개처형하게 되어 있는 사건임에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함으로써 여인을 곤궁에서 구하는 지혜와 너그러움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 다음 말까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현대 사회에 적용하면 현대인의 삶과 자유는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수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소위 간음한 여인은 용서했으나 간음 자체의 유죄는 인정한 셈이 된다. 그러면 예수와 성서가 동시에 인정하는 간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당시의 문화적 한계 그대로, '결혼하기 전의 성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여기서 '결혼하기 전의 성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엄격한 기준이 옳은가 그른가, 또한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적정한가를 논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다. 그건 그냥 그 시대와 문화의 산물일 뿐이다. 이천 년 동안 문화와 역사의 진화를 거쳐 온 현대인이 당시의 한계에 사로잡히는 것 자체가 비극일 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단지 성서의 예수 역시 그 시대와 문화의 아들이기에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과,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성서를 읽는 현대인들은 이천 년 전의 시대와 인식의 한계를 그대로 담고 있는 성서를 절대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를 깨닫고 성서를 비평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에서 '살부살조'(수양을 하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이고 먼저 깨달은 자를 만나면 그도 죽이라는 뜻, 즉 이전의 어떤 전제에도 매이지 말라는 가르침)를 말하듯이 기독교도 '살신살서'(교리에 사로잡힌 신과 예수도 죽이고 시대의 한계에 사로잡힌 성서도 죽이는)의 노력이 필요하다.

2. 다시 A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먼저 짚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사건에서, 당사자의 명예를 고려하여 실명을 거론하지 않고 A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A씨가 아니고 A양인가? 그가 미성년자인가? 사회적인 또는 객관적인 죄를 지었는가? 결혼하기 전에 성행위를 했으니 성서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간음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종교인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가해자를 B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에게는 B군이라고 하지 않고 B씨라고 말한다. 왜 가해자인 남성은 '씨'이고 피해자인 여성은 '양'인가? 웃기는 일이 아닌가?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 표현 자체에 언론인을 포함한 현대인들 대다수도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성'과 '식'은 생명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생존본능이다. 이 문제로 누군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개인의 선택에 대해 자연은 어떤 제약도 가하지 않는다. 다만 책임을 물을 뿐이다.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상한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지만 그건 당사자가 져야 할 개인적인 책임일 뿐 도덕이나 윤리를 거론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음식을 훔쳐먹으면 사회적 범죄가 되고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A씨 사건 이전의 두 사람의 문제는 그저 두 개인의 선택에 의한 당사자의 일일 뿐이다. 사회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있으면 당사자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이 개인적인 문제를 사회에 던져 한 사람이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누가 범죄자인지는 명백하다. 이 문제에 관한한 A는 철저한 피해자일 뿐이다. 욕을 먹어야 할 사람도 B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도 B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A에 쏠려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거의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정말 개떡같은 사회다.

3. B에 대해 분노하는 사회에 살고 싶다

B는 사악하고 비열한 범죄자다. 그가 억울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정당한 법적 절차를 밟아 해결해야 할 문제다.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사회에 이런 식으로 폭로하는 것은 일방적 폭행일 뿐이다. 그런데 현재도 과거에도 이런 일에서 B는 늘 혹독한 비난에서 제외되었으며 희생자만 고통을 받아왔다. 정말 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사회가 아닌가?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다시 벌어진다면 B는 중벌을 받아야 하며 사회에서 매장되어야 한다.

A씨들(A씨를 포함한 사회적 편견의 희생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희생자일 뿐이다. 사회적 편견, 특히 끊임없이 당신들을 괴롭혀온 무지하고 비겁하며 관음증에 사로잡힌 많은 남성들이 만들어낸 괴상한 문화의 피해자들일 뿐이다. 우리는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하고 지갑을 빼앗긴 희생자를 비난하는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누가 뭐래도 비난을 받을 놈은 당신들이 아니라 강도다.

강도를 보고도 방관하거나 그에게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강도질을 방관하거나 은연 중에 협조한 비겁하고 무책임한 사람이다. 아니, 간접적으로 피해자에게 발길질을 한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당신의 관심을 B에게 돌려라. 그런 사악한 사람이 우리 사회에 발을 붙히고 살 수 없도록 말하고 행동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딸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A씨는 당당히 일어나라. 당신의 선배들 중에 모든 편견을 실력으로 극복하고 당당히 이겨낸 분들이 있지 않은가? 당신도 다시 일어서라. 당신은 편견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사람들이 비웃거든 같이 비웃어줘라. 편견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맞장구치는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니까.


류상태 선생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이후 20여 년을 목회자, 종교교사로 사역했지만, 2004년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 이후 교단에 목사직을 반납하였고, 현재는 종교작가로 활동하면서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교양으로 읽는 세계종교] [소설 콘스탄티누스] [신의 눈물]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당신들의 예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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