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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런 궁상 VS 저런 궁상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5/07 [14:57]
{IMAGE1_LEFT}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걸어 혼자 극장에 가서 야한 영화를 보는 것, 궁상맞음의 극치라 하겠다. 결혼을 하지 '않는' 이들이 싱글을 고집하는 논거로 제시하는 것의 하나가 결혼과 더불어 필히 감수해야 하는 일상의 궁상맞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다. 유하의 두 번째 장편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궁상맞음이 싫어 결혼이라는 제도적 틀을 거부하는 한 남자와, 그 남자와의 궁상맞은 불륜 속에서 행복의 원천을 발견하려 애쓰는 한 여자 사이에 펼쳐지는 기이하고 앙증맞으면서도, 농밀하고 끈적끈적한 러브스토리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영화관=연애공간이라는 등식이 사람들 뇌리에 확고한 고정관념으로 틀어박혀 있다. 따라서 영화로 호구지책을 삼지 않는 일반 관객이 극장에 혼자 간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더욱이 비 내리는 밤의 나홀로 입장객의 경우 관람할 영화를 선택하는 것보다 관람 여부 자체를 결정하는 것이 훨씬 곤혹스럽기 마련이다. 애인이나 연인과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온 사람들 틈에 끼여 눈치를 보며 서 있다가 티켓 창구 앞이 한가해진 틈을 잽싸게 골라 매표소 직원에게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X관 X회 한 장만 주세요”라고 얘기할 때의 그 쑥스러움과 궁상맞음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헤아리기 어렵다.

경험은 사람의 얼굴가죽을 두껍게 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혼자 영화 보러 다니는 것이 어느 정도 몸에 익으면 외려 쌍쌍이 커플 지어 온 관람객들에 대한 우월감마저 차츰 체질화되면서, 진정한 영상미학의 창달과 영화산업의 지속적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영화관을 데이트 장소로 인식하는 대중의 오도된 인식에 경종을 울려주고자 극장좌석을 전부 남녀 부동석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농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쯤 되면 궁상으로 단련된 에고의 뻔뻔스러움이 거의 예술의 경지로 승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90년대초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불나방처럼 몰려들던 족속들의 대다수는 지금쯤 견실한 가장과 조신한 현모양처로 전향해 있을 것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 등장했던 주인공들의 후일담으로 해석 가능한 이유다. 공교롭게도 두 편의 여자 주인공 모두 엄정화다. “바람 부는…”에서 상큼하고 뇌쇄적인 매력을 선보였던 데뷔 초기 엄정화는 “결혼은…”에서는 한층 원숙하고 농염한 톱스타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짙은 화장과 두터운 분장에도 불구하고 눈가에 잡히는 잔주름을 가리기에는 TV 브라운관에 비해 영화의 스크린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다시 1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이란 수작을 만날 수 있다. “바람불어 좋은 날”의 공간적 배경이 한창 개발붐이 일던 강남으로 설정된 것에 착안한다면, “바람불어…”로부터 발원해 “바람부는…”를 거쳐 “결혼은…”로 이어지는 20년을 관류하는 내러티브의 전개에서, 동시대 젊은 군상들의 망막에 투영된 한국사회의 변화의 울림이 미세하게 손끝에 감지된다.

일단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주인공 준영(감우성)과 연희(엄정화) 둘 다 좋은 건수를 찾아 압구정 골목을 배회하던 한심한 청춘들이었다고 상정하자. 같은 공간을 헤매던 시절의 두 사람은 좀체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 같다. 준영이 만 원짜리 몇 장을 달랑 들고 즐비하게 늘어선 값비싼 업소들의 가격표를 눈으로 열심히 응시하며 구겨진 주머니 안에 남은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의 잔액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계산하던 축이었다면, 연희는 가진 것도 변변치 않으면서 거리를 얼쩡거리며 압구정 물을 흐리는 가난한 외지 출신 인간들을 경멸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복하고 윤택한 가문의 딸내미였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시간이 흘러 친구 결혼식장의 하객으로 우연히 마주쳤을 때, 두 사람의 경제적 계급에는 본질적으로 큰 변동이 없다. 다만, 준영은 좀더 리버럴한 성향의 대학교 시간강사로 개구리 뜀뛰기 식의 신분상승을 이루었고, 연희는 사랑의 맛에 조금은 눈 떴으면서도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는 철두철미 조건으로 승부하는 중산(상)층 집안의 노처녀로 변해 있을 따름이다.

표면적으로 연희와의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준영이지만, 준영으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하도록 이끄는 배후의 동인은 경제적 궁핍에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궁상스런 일상에 대한 연희의 본능적 두려움과 계급적 거부감이다. 연희가 준영을 궁극적인 인생의 동반자로 간주했다면 맞선 첫날 여관으로 직행하는 대담하고 솔직한 도발은 저지르지 않았을 터이다. 준영을 안전거리 밖으로 떼어놓는데 성공한 연희는 평생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는 의사인 남편에게 신랑의 입맛에 딱딱 달라붙는 된장찌개와 매운탕을 끓여주는 정숙하고 현숙한 아내이자, 밤이면 적당히 흥분하는 요부로서 봉사한다.

{IMAGE2_RIGHT}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에 맞닥뜨린다. 영화의 화자는 분명 준영이다. 당연히 화면에 보여지는 영희는 준영이 바라보는 일면적이고 부분적인 연희다. 준영의 가시범위를 벗어난 연희는 오로지 준영의 상상으로 조형된 연희다. 이 점을 간과한 관객은 연희에게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준영에게 보여지는 연희야말로 인위적으로 가공된 가상의 연희다. 준영은 사랑에 굶주린 여자로 자신을 포장한 연희의 이러한 눈속임에 시종일과 농락당하고 철저히 유린된다. 연희가 제공한 옥탑방에서 준영은 연희에게 사육되는 귀여운 애완동물에 다름 아니다. 두 사람은 관계는 경제적 조건(집안의 재력+본인의 수입)에 의해 공급과 수요곡선이 결정되는 대한민국 결혼시장의 공식적 거래망을 벗어난 암거래나 밀거래 관계라 하겠다. 여기에서 누구에게 남근이 존재하는 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경제력을 앞세운 연희의 주류적 가치의 공세에 무력하게 상처 받는 준영의 처연한 영혼의 상흔이 도드라질 뿐이다. 영화의 텍스트에서 준영을 흠모하는 어린 여대생 제자의 구애도 별로 순수한 성격의 사랑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부잣집 여식들에게 하층 계급의 청년들은 동일한 계급적 층위의 남성들보다 종종 강하게 섹스 어필하는 성적 호소력을 가질 수는 있다. 물론 그런 남자들에 기대어 평생 솥뚜껑 운전이나 하라면 내가 여자라도 신발 들고 도망가겠다. 가끔씩 먹는 콩나물밥이 연희에겐 별미이겠지만 죽는 날까지 계속 콩나물로 짜여진 식단만 대하고 살아야 한다면 그건 고문이다. 연희가 해준 콩나물밥 대신 라면을 먹어 버린 준영의 행동을 단순한 몽니로 치부할 수 없는 소이다.

영화를 교직하는 철학적 메커니즘과 심리학적 기제를 꼼꼼히 따지기 위해 영화의 원작소설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원전과 비교하면서까지 의미를 길어올려야 할 정도로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 함축적이거나 서사구조가 복합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만교의 원작소설보다는 달포 전에 개봉된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과 대조하는 것이 이 영화를 더욱 재미있게 즐기는 감상법이다.

두 작품 모두 소소한 일상을 중심적 코드로 설정한 혐의가 짙다. “생활의 발견”이 지리멸렬함에 대한 세밀한 소묘라면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궁상맞음에 관한 비밀스런 일기다. 영화를 보면서 유하가 홍상수 영화의 암컷 버전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불온한 상상이 자꾸만 꾸역꾸역 올라왔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영화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실제적으로 연희다. 택시비보다는 여관비가 싸겠다고 말하는 대목을 제외하고, 준영은 연희의 페이스에 줄곧 끌려다닌다. 쇼핑을 다니고, 신혼여행(?)을 가고, 옥탑방을 얻고, 심지어 연희가 남편과 살 집구경까지 하는 그의 처지는 결혼이란 제도권에 편입되기를 단호히 거부한 영원한 '재야'치고는 지나치게 궁상스럽다.

‘궁상’이란 표현이 특정한 상황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혼자 라면을 사들고 휘적휘적 옥탑방으로 향하는 준영의 뒷모습 만큼이나 작년 연말 아는 여자의 생일선물을 고르기 위해 서점을 두리번거렸던 내 뒤통수 역시 무척이나 궁상스러웠을 것이다. 고심 끝에 결국 그 여자에게 선물한 책은 김규항의 ‘B급 좌파’였다. 상고 출신인 그녀에게 무척이나 생소했을 김규항이란 이름 이상으로 갑자기 책을 선물한 나 역시 그 여자에게는 몹시나 생뚱맞은 존재였을 것이다. 낫살 먹은 인간의 구차스런 궁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테니까.

결혼이 인생의 파멸로 직행하는 죽음의 레이스인지, 행복한 삶에 도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열락의 코스인지 미경험자인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신 없이 오르는 전세값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는 친구의 축 처진 어깨에서, 발신자 확인서비스로 전화를 건 사람이 와이프임을 확인하고 단호히 핸드폰 전원을 꺼버리는 선배의 짜증스런 표정에서, 집만 벗어나면 결혼반지를 빼버리는 후배의 뻔뻔함에서 결혼은 미친 짓이지 않을까 하는 구체적인 물증을 얻는다.

그렇지만, 거리를 지나가는 예쁜 아가씨의 노란색 우산에서,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집사람이 정성스럽게 싸준 동료의 도시락에서, 거래처 사람이 꺼내 보여주는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망울이 담긴 스티커 사진에서 결혼이 결코 미친 짓은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심증을 포착한다.

가진 것 없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나 같은 녀석과의 인연맺음이 미친 짓이 아니라고 독하게 마음먹은 미친 제비(燕)와의 운명적인 조우가 있기 전까지 아무튼 나는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확신범으로 머물러야 할 듯하다.

* Off The Cinema : 영화를 보러 간 극장은 대부분의 좌석이 두 명이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붙어 앉는 커플석으로 이루어진 상영관이었다. 두 사람이 좌정하는 자리에 나 혼자 죽치고 앉아 있으니 완전 운동장이다. 여자들도 알게 모르게 차지하는 스페이스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발견하고 혼자 킥킥대며 웃었다. 필름이 돌아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홀로 그 넓은 공간에 궁상스럽게 푹 파묻혀 있자니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한 하이에나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저 커플석에 와이프를 데려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난 거의 없다고 본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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