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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자 교만하지 말고, 받는 자 비굴하지 말고
[우석훈의 초록공명] 한국 부자와 미국·프랑스 부자의 차이점
 
우석훈   기사입력  2011/09/02 [14:45]
 
주는 자는 교만하지 말고, 받는 자는 비굴하지 말고…
 
이 말은 이계안이 자주 쓰는 바람에 나도 배운 말이다. 표준 경제학에서는 세상 모든 것들이 거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지만, 그렇게 거래로 설명되지 않는 행위들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야근수당이나 특근수당 같은 것이다. 진실은 그럴지 아닐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임금은 노동생산성에 비례한다고 한다. 그러나 특근수당은 아예 없거나, 있으면 평균적 임금률보다 높다. 이걸 일종의 증여와 역증여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계약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 행위를 설명하려면, 평소에는 없던 뭔가를 갖다 붙여야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경제 행위에, 거래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거시경제학에서는 이걸 그냥 ‘가계(house-hold)’라고 표현한다. 엄마, 아빠, 자식들로 구성되는, 평균 가구율 3.7 정도 되는 사람들의 집합이 가계 혹은 소비자라고 하는 한 단위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 내부에서는 왜 증여가 발생하는가, 이런 복잡한 건 경제학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우리 식으로 내리사랑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기적 유전자의 가설’ 이후로 진화심리학이 한바탕 휩쓸고 간 이후로, 유산 상속은 어느덧 유전자의 합리성 같은 것으로 치장되었다. 부모의 유전자의 특징이 다음 대로 이어지는 게 당연하듯이, 재산도 같이 넘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는 게 이런 주장의 요체이다.
 
빌 게이츠가 자식에게 얼마를 주는 게 맞느냐, 이런 게 한 때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재단을 만들면서 자신의 재산은 전부 사회에 환원한다고 하였고, 재단의 운영도 영구적인 게 아니라 사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 써버리고 해소되는 것으로 하여서 화재가 된 적이 있었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는 않겠다고 평소에 말했던 걸로 아는데, ‘먹고 살만큼만’ 주는 단위가 100억 정도이다.
 
우와 100억, 싶겠지만, 국제적으로 이 돈은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은 돈의 기본 단위이다. 무기거래상들이 한 껀 했을 때 받는 수수료가 이 정도 돈인 걸로 알고 있다. 이 정도 돈이면, 평생 킬러들이 따라붙어도 감당할 만한 정도의 돈, 그 수준이다.
정상적인 직장인이 평생 성실하게 살고, 기집질 안 하고. 크게 아프지 않았고, 그리고 또… 기타등등의 경우에 5억원 안팎의 돈을 가지게 된다. 평균 임금 5천으로 잡고, 30년 일하고, 소득의 1/3을 저축하였다고 가정하면, 대충 이 정도 된다. 이렇게 총비용을 놓고 생각하는 걸 항상성 소득 가설이라고 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대부분 이게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골프장도 다니고, 상층부와 결탁을 하게 된다. 혹은 이 돈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투기도 하고 증권도 하게 된다. 확률적으로는, 결국 망하게 된다.
 
욕심을 절제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이제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가늘고 길게’ 전략을 선택하게 된다. 안 쓰고, 안 먹고. 이런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이 나고, 투기를 하기로 맘 먹은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게 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정의롭지 않은 경제이다. 불행히도 한국이 지난 10년이 이랬다. 서울을 기준으로 하면, 2001~2002년 사이의 어디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 은행에서 돈 빌려서 집을 산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는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졌다. 물론 아직도 집을 정리 안하고 부동산 불패를 믿었다면, 이제 세상은 공평해진다. 2003년 이후에 자기 돈이 절반이 안되었는데, 은행 끼고 집산 사람은, 아마 좀 어려워질 것 같다.
 
불로소득이라고 표현한다면, 불로소득을 둘러싼 국민경제의 내의 한 판 싸움이 이제 클라이막스로 가는 셈이다. 한 번만 더 하자, 나 아직 집 못 팔았어, 이런 세력이 하나. 집값 내려가면 나쁠 게 뭐가 있나, 지금은 너무 비싸쟎아, 이런 세력이 또 하나.
 
투기해서 돈 벌고, 그걸로 자식들에게 물려주어, 대대손손 이렇게 함 살아보자, 진짜 원초적인 정글의 논리인 셈이다.
 
참, 딜레마인게, 그런 데 이런 사람들 내에서 증요의 경제가 더 강하다는 점이다. 고위공직자 사모님들이 계주로 끼어있는 강남의 대형 계조직은, 지하경제로 보는 눈이 하나가 있고, 증여의 경제로 보는 눈이 하나가 있다. 원래 한국 특유의 계는 증여의 경제라는 시각으로 분석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런 공동체의 정신이나 돌봄은 하나도 남지 않고, 상류층끼리의 결탁 네트워크 그리고 세금을 내지 않는 금융거래, 전형적인 지하경제이다.
 
골프비 서로 내주는 관계, 이런 것도 증여의 관계이다. 조금 더 넓게 가면, 추석 때 떡값 돌리는 걸로부터 시작해서, 시시철철 돌고 도는 닥스 넥타이처럼. 닥스 넥타이는 거의 현금 같은 거라서, 선물을 받으면 상표도 뜯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선물하고, 그렇게 해서 끝없이 돌아간다.
 
한국에서 부자들은 더 끈적끈쩍하게 서로 선물하고, 서로 밀착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를 재생산하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코털만한 거 하나 선물할 때에도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더 각팍해진다. 증여? 이미 부자들은 자기들끼리 충분히 증여하고 있쟎아?
 
곽노현이 상대 후보에게 주었다는 2억원도, 상층부의 증여의 일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먹고 죽을 돈도 없다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증여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흔히 부자들은 자본가라서 더 자본주의적으로 살아가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끼리의 공동체 혹은 전통적 유대관계,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싶다. 없는 사람들이 십원이라도 깎을려고 상인적 관계에 집중하고, 부자들은, 최소한 자기들끼리는 완전히 호혜와 환대의 공동체다. 그 안에 어떻게든 좀 끼어볼려고, 사는 집이라도 강남! 자기 대에는 그렇게 못했더라도 자기 자식들만큼은 부자 친구들 만들어준다고 되지도 않을 전략으로, 정말로 피똥 사면서 강남으로 기어들어가는 가련한 중산층! 정말 그 영혼마저도 가여운 것 아닌가?
 
결혼식 혼수에서 장례식 부주까지, 전형적으로 증여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딸이 결혼 안한다고 하면, 당장 엄마는 평생 결혼식에서 내가 낸 돈이 얼마인데, 그런 소리부터 먼저 듣는다. 증여는 아름다운 마음, 그런 거 아니라고 원시사회에서도 그런 거 아니라고 마셀 모스가 한참 전에 지적한 적이 있었다. 선물에는 영혼이 붙어있고, 이걸 자기가 가지려고 하면 저주가 내릴 지어다!
 
주고, 받고, 돌려주고, donner, recevoir, rendre라는 증여의 정식은 무시무시한 저주관계이기도 하며, 종교적 신성성에 가득 찬 의무의 카테고리이기도 하다. 어쨌든 오랫동안 인간의 경제는 그렇게 돌아갔다. 증여에도 치사 빤쓰 전략이 들어가 있는데, 상품 경제와 차이점은 등가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딱 같은 양을 서로 돌려야 하느냐, 보통은 자기가 받은 것보다 더 줘야 한다.
 
모스의 세계에서, 낮은 사람은 두목에게 뭔가 선물을 주고, 두목은 그 사람에게 그보다 더 큰 걸 주고, 그렇게 해서 원시 사회에서 재화가 유통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 얘기를 가지고 로마 시대에게 인접국가들이 바쳤던 조공을 분석해보니, 완전 무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게 폴라니의 초기 분석이었다. 그 얘기를 우리에게 가지고 오면, 우리가 중국에게 바친 조공도 무역? 게다가 우리가 바친 것보다 중국이 우리에게 준 게 더 많아? 요런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얘기가 된다.
 
주는 대로 받으리라, 그렇게 선물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사람의 관계가 수평한 것이 아니니까 등가성 원칙이 잘 움직이지는 않는다.
 
이런 모스가 생각한 증요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공짜가 어딨어, 그렇게 된다. 선물에 붙어있는 영혼은, 갚는다고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족장이 있고, 두목이 있고, 위계가 있는 사회는 증여의 관계가 그 자체로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에 선물로 인해서 추가적으로 더 자신이 위계가 내려가지는 않는다.
 
자,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다른 나라의 부자들이 재산세를 더 내겠다고 팔을 걷어부쳤다. 세금을 통한 증여인 셈인데, 사실 가난한 사람들이 비굴하지 않게 돈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국가를 통한 증여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국가에게 고마움을 느낄지는 몰라도 비굴해지지는 않는다. 만약 지원금을 전달하는 공무원이 고마움이 아니라 비굴함을 느끼게 했다면? 그럼 그건 친일파 순사 아닌가?
 
부자들은 국가를 통해서 기부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하는 게 여러 가지로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런데도 미국이나 프랑스의 부자들이, 자신들이 알아서 세금을 더 내겠다고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 것은? 바로 망하게 생겼거든.
 
한국 부자와 미국 부자의 차이점이 그 정도 아닐까 한다. 바로 망하게 생겼어도 나는 존경을 받으면서 돈을 내놓겠다는 사람들과, 그냥 망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국민경제가 더 버티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차이일 것 같다. 한국의 부자들이라는 게, 계보를 올라가보면 소수를 제외하면 나라 망해도 흥, 나라 뺏겨도 흥, 그랬던 전력이 있던 사람들 아닌가?
 
어느 나라나 부자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는 게 있다. 급식문제, 그렇게 큰 것도 아닌데, 부자들 급식 먹이면 나라 망한다고 투표율 60%에 육박하는 투표를 한 부자들, 그들은 이 나라의 부자될 자격은 있어도 존경받을 자격은 없는 사람들이다. 구한말 부자들 보는 것 같다. 급식 예산이 문제면, 그게 얼마라고 자기들이 마련해서 한 번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재단 같은 거 만들어서 해보겠다, 이게 존경받을 부자들이 할 일이지, 투표해서 대중들을 이겨 마시겠다, 이거 순 나라 망할 때 경성 부자들이 했던 거랑 뭐가 다르냐? 국채 보상운동이 괜히 나온 게 아닌가 싶다. 나라는 돈이 없어서 망하게 생겼는데, 돈 많으신 부자들은 움직일 생각을 전혀 안하니, 민초들이 결국 나선 거 아닌가? 그 때랑 지금이랑, 자기 돈 움켜쥐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신경 안 쓰겠다는 이 어처구니 없는 부자들의 행태가 뭐가 다른가?
 
그런 사람들이 돈을 받으면서, 어떻게 비굴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정몽준이 청년 창업을 위해서 돈을 좀 내놓으시겠다고 한다. 기왕 내놓을 거면 꼬리표 없이 내놓는 게 나을텐데, 창업은 자기네 당 이데올로기이면서, 동시에 돈 뿌리면서 재왕 노릇하겠다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피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몽중은, 자기가 창업 얘기할 처지도 아니지 않은가? ‘지상 최고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 자기 아닌가?
 
주는 자는 교만하지 않고, 받는 자는 비굴하지 말고,
 
말이야 좋은 말인데,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겠는가? 국가라는 장치를 통하지 않고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신의 반열에 오르고, 시민의식이 갑자기 독재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던 그리스 수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꼭 거래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그 빈틈을 채우든 혹은 시장을 선도하든, 크고 작은 우정과 선의 그리고 증여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거래는 커녕, 두 곱 장사, 투기 아니면 쳐다도 보지 않는 강부자들의 귀에, “주는 자는 교만하지 말지어다”라는 경구는 진짜로 허공의 메아리 같다.
 
어느 금융회사 회장이, 20대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같이 상의를 좀 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만날 생각이기는 한데, 무슨 고민을 같이 해볼 수 있을지 아직 머리 속에 잘 잡히지가 않는다. 20대 얘기 한참 하다가 결국은 창업 지원이다, 이러는 몽준 같은 방식은 진짜 아닌 것 같고.
 
사실 지금의 20대를 위해서 돈을 좀 풀고 싶다는 소위 독지가들은 여러 번 만났다. 잘 찾아보면, ‘주는 자는 교만하지 말고’,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부자들이 한국에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더 어려운 것은, 돈을 만들거나 모으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받는 자는 비굴하지 말고’, 이 조건을 만들어낼 것인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국가에 이 모든 것을 떠넘긴다고 해서 또 간단히 풀리는 일도 아니고, 시민사회가 전체적으로 움직이자, 그런다고 될 것도 아니다.
 
그냥 당에서 다 알아서 하면 된다는, 당 무오류의 원칙 같은 게 세상에 존재한 적이 있었는데, 결국 당간부 자식들에게 비굴하게 굴어야 하는 기묘한 결과가 나왔던 것 아닐까?
 
증여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2010년대에 우리에게 이 질문은 점점 더 커져간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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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9/02 [14:4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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