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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난 작가적 역량, 황석영은 표절로 때우나
[정문순 칼럼] 표절은 단순 실수, 서사 없는 짜깁기는 소설인가?
 
정문순   기사입력  2011/06/07 [22:32]

물의를 빚은 유명 인사가 사건에 대처하는 방식 중의 하나는 입을 다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쉬운 선택이긴 하지만 유효기간이 있다. 영영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건 대중적 활동에 치명적일 수 있으므로 언젠가는, 사건의 여파가 사그라질 즈음에 작심한 듯 입을 열기는 연다. 소설 ‘강남몽’의 표절 혐의에 대한 황석영의 대처 방식이 이와 같았다.

당시 황석영은 표절 의혹을 제기한 매체를 외면한 채 다른 매체에 몇 마디 짧은 대꾸를 하고는 더 이상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곧이어 표절 논란이 자신의 대표작들로 번져가는 지경에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시간은 흘렀고 새로 소설이 나왔다. 신작 홍보를 해야 하니 기자들과 안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황석영의 신작이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이기에 작가는 중국에서 호탕하게 출간 기념 인터뷰를 했지만, 나는 그의 신작보다 아직 매듭짓지 못한 자신의 행적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하는 것이 더 궁금했다. 당연히,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이 기자들로부터 나왔다.

“일본 같은 곳은 출판사에 자료부가 다 있고 작가가 작품 쓰기 전에 자료를 지원해주는 팀 같은 게 다 있어서 논문에 달듯이 인용했던 자료 목록을 주까지 단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전례가 없었으니까, 시대물이나 역사소설도 다 그런 식으로 (자료를) 활용해왔으니까 내가 그런 것을 놓쳤다. (중략) 팩트에 대한 것이 없으면 소설 쓰기가 힘들더라. 그래서 (자료를 인용했고 그 사실을 명기하는 것을) 놓쳤다. 실수했다고 얘기도 했고…. 하지만 팩트를 소설로 전환시키는 것은 작가적인 권리다. -연합신문-

구어체로 산만하게 옮겨진 그의 답변을 몇 줄기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팩트를 가져왔는데, 한국 문단의 관행에 따라 인용을 하지 않았다. 나는 실수했다고 인정했다. 팩트를 소설에 활용하는 것까지 비난하지 마라.”

황석영은 표절 의혹이 처음 제기될 당시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옮겨 쓴 것이니 표절로 못박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던 애초의 태도와 달리, 이번에는 사실상 인정했다. 작가로서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음을 승복하기까지 그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적인 권리”까지 운운하는 황석영은 왜 이렇게 당당한가. 표절을 순순히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서 작가적 권리라는 말을 함께 달고 나온 작가에 대해 자신의 저작을 도용당한 원 저자와 그를 사랑한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그는 한국 문단의 후진적인 관행에 자신의 잘못을 돌렸다. 황석영은 자신의 표절 행위를 출처 표기를 잊어버린 실수 정도로 치부한다. 표절이 제기된 부분은 소설의 전체 5장 중 1장 전체에 해당한다. 원저작인 조성식 씨의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를 출판한 <신동아>는 원문과 ‘강남몽’을 대조해가며 두 저작의 유사성을 조목조목 파헤친 바 있다. 남의 저작을 뭉텅이로 빼내어 표현이나 문장 구조를 약간 비틀어 옮긴 잘못에 비하면 황석영의 변명은 지나치게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책장에 꽂힌 그의 저작들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충분한 성찰의 시간을 가졌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릇이 작은 변명이 아닐 수 없다.

표절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이, 황석영에게는 팩트(창작적으로 가공하지 않은 실제 사실)가 필요해서 남의 저작에서 가져오는 도중 각주 인용을 챙기지 못한 분실물 사고처럼 치부되고 있는 것은 씁쓸하다. 남의 저작을 뭉텅이로 도용한 다른 작가들도 대부분 그런 식으로 변명한다. 출처 명기를 잊었거나 관행에 따른 단순 실수라고. 아무도 황석영에게 “작가적인 권리”인 팩트의 소설화를 말리지 않았다. ‘팩트’를 가져온 방식이 원저자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도용한 것임을 지적했을 뿐이다. 그의 해명은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논점 흐리기로 보인다.

풋나기 신인도 아닌 원로작가가 환경을 탓하는 태도도 예사롭지 않다. 황석영쯤 되는 인사라면 문학 환경에 휘둘려 피해를 보는 약자가 아니라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낸 사람 축에 든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황석영이 문단의 후진적인 관행에 핑계를 돌릴 수 있는 창작 활동을 해왔다고 고백한다면 그의 다른 작품들도 결코 결백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황석영은 다른 작품들에게도 제기된 표절 의혹에 대해서는 억울하다는 한마디로 넘어갔다.

황석영이 스스로 표절을 시인한 ‘강남몽’을 ‘다큐소설’이라고 강조하는 건 내게는 고갈된 창작 열정을 합리화하는 변명처럼 들린다. 도대체 다큐소설이라는 명명이 가능하기나 할까. 다큐멘터리적 사실을 소설에 끌어와도 다큐멘터리와 소설을 나란히 붙이지 않는 이상 그건 소설이지 다큐+소설이 될 수 없다. 다큐소설이라는 명명은 황석영이 소설로 육화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소설이라고 내세웠음을 고백하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강남몽'에서 친일-반공-조직폭력배-강남 부자의 연결 고리는 소설적으로 탄탄함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 연결고리가 가능했겠지만, 황석영 소설에는 접착력이 단단하지 않다. 친일 세력이 해방 공간에서 청산되지 못하고 반공을 내세우며 득세하고 군사정권과 결탁하여 강남 노른자위 땅의 주인으로 지배권력을 굳혔다는 것은 사회학적인 지식에 속한다. 이것이 소설이 되려면 객관적 사실에 녹아들어가는 작가의 상상력이나 서사적 역량이 필요하다.

지식은 만인이 공유하는 것이지만 상상력은 작가만의 소산이다. 상상력이 없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치명적이다. 그가 ‘강남몽’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은 실존인물의 실명을 바꾸고 가공인물을 몇 명 첨가한 것밖에는 없다. 독자들이 얻은 것은 빛 바랜 신문, 르포, 역사서 등 이미 있는 기존의 자료를 나란히 연대기 순으로 붙여놓은 황석영의 편집 솜씨에 불과했다. 황석영이 한 일은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과 고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오래된 자료에서 풍기는 먼지와 싸운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표절은 황석영의 변명과 달리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단순한 부주의나 실수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빈곤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작가의 필연적인 귀결점이다. 글자 하나 빚어내는 일의 고통스러움이나, 빈 원고지 칸이나 텅 빈 컴퓨터 문서 공간이 막막한 사막처럼 육박해오는 느낌을 잘 아는 작가가 저작권 개념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은 믿기 힘들다. 황석영에게 표절은 실수나 단순 불찰의 영역이 아니라 바닥을 내보인 작가적 역량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황석영에게 표절은 ‘다큐소설’이라는 해괴한 이름을 내세우며 소설이 뼈를 깎는 창작의 소산임을 부인한 태도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황석영의 왕성한 창작욕은 문단 후배들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지치지 않는 문학 열정은 높이 평가할 수도 있지만, 다산이 반드시 좋은 효과만 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왔다. 황석영의 최근작은 작품 분량도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중장편에 가깝게 짧아지고 있다. 적어도 작가가 감옥에서 세상으로 귀환한 이후의 10여년 간 문학 활동은 평단의 과찬이 무색한 범작의 연속이었다. 그런 신작이 1년에 한 편 꼴로 나오고 있다. 이 정도면 신작이 나올 때마다 최상의 미사여구로 찬사를 바치기 바빴던 문단이 더 그럴싸한 표현을 찾기 힘들어 애를 먹을 법도 하다. 그동안 쌓아올렸던 문학적 업적을 스스로 깎아먹을 수 있는 범작 100편보다 차라리 걸작 1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독자와 연재를 약속한 작품도 자신의 성에 차지 않으면 돌연 물리는 과작의 작가 조세희가 그런 경우이다.

소진된 창작적 열정에 솔직해지지 못하고 소설의 정의까지 바꾸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태도에다 명백한 도용 행위를 실수로 치부하는 작가에게서 어떤 걸작이 나올 수 있을까. 황석영에게 다큐소설과 표절은 서사화 능력 부족과 한 몸을 이루는 단어들이며, 황석영은 자신의 말과 달리 팩트를 소설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팩트의 소설화가 “작가적인 권리”라는 그의 말대로라면 황석영은 그 권리조차 스스로 지키지 못한 셈이 된다.  갈수록 작가의 서사적 역량이 중요시되지 않는 문학계에도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부분만큼은 황석영도 자신을 둘러싼 문학 환경에 일부 핑계를 댈 수도 있는 부분일지 모른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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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6/07 [22:3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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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감 2011/06/09 [00:07] 수정 | 삭제
  • 범작 100편보다 차라리 걸작 1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독자와 연재를 약속한 작품도 자신의 성에 차지 않으면 돌연 물리는 과작의 작가 조세희가 그런 경우이다.

    ---> 굿! 조 세휘가 진짜 작가 이름을 들을 만한 드문 작가였지!!

    과작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겠으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처럼 인기에 놀라 펜이 부러진 사람도 있고 설국의 작가나 헤밍웨이처럼 더 좋은 것을 못 내놓겠어서 자살한 사람도 있으나 (후자는 작가정신으로만 말하면 멋지다)

    난쏘공은 분명 70년대 시대와 함께 한, 시대를 고발한 한 명작이었고 지금도 난쏘공의 시대라고 조세휘가 말하는 걸 보았는데 시대가 변하지 않았는데 조세휘더러 다른 시대 걸 쓰라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

    조세휘는 황구라처럼 조 구라가 못 된다는 거겠지. ㅋㅋ

    고은도 다작이지만 다 좋다고 하는 백낙청의 말은 못 믿겠고
    정약용이 다작이면서도 빼어났던 건 통신수단이 미비했던 조선시대에 이 좁은 땅에서나마 귀양을 갈 수 있어서겠고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인지 하는 뻔한 얘기는 미국의 비평가가 한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이 초등학교 수영장 같은 좁아터진 나라에서 21세기에 얼루 귀양을 가야 작품같은 작품이 나올꼬

    언제나 이 나라에 윤동주의 서시나 셰익스피어의 잠언을 빌어 생활 속에 만나는 상황을 즐겁게 묘사하는 세상이 올꼬.

    모든 말은 죽었다. 이 나라에는 말이 없고 없느니라. 말을 찾으려면 땅 속을 파 봐야 한다. 선현이 그러지 않았나?

    링귀스트들은 분발해야 한다. 남한의 문화적 지체는 한마디로 말의 문제다. 어휘가 미국의 1/10 내지 1/100이라면 생각이 미국의 1/10~1/100라는 뜻이니 사대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는 문맹률이 낮지만 문서 가독률도 문맹률만큼 낮다. 외국인들이 보면 놀랄 정도다. 우리가 아는 어휘는 모두 합쳐봤자 아이들 술래잡기할 때 쓰는 수준이다.

    미국이 한국 지사에 직원을 파견할 때 10계명 중에 한국에 가면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하는 짓을 한국사람은 70 넘어서도 하니 V 자를 그리거나 사랑해요 둥그렇게 제스처를 하거나 동방신기 춤을 추거나 말 못하고 할 말 없는 한국인이 아이처럼 즐겨하는 제스처를 반드시 배워서 써먹어야 한다는 지시가 있다.

    미국 어느 도시의 치어리더 팀이 TV에 나왔는데 물어 볼 걸 물어보는 게 아니라 초등학교 저학년 애들 하는 치키치키칙인가 상대에게 고개 좌우로 돌리게 해서 못 맞추면 물몽둥이로 때리는 을 시키니까 이 여대생들이 무한히 경멸스러워서 심히 비웃는 걸 보았는데

    어휘 수가 주먹만 해서 생각할 게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별 수 있나?
    기계에 쓰는 어휘로 피로 성능 (Fatigue performance)이라는 게 있다. 일단 들으면 '기계는 피로한데도 성능이 좋냐?' 뭐 억지로 찾으면 모를 바는 아니지만 이런 어휘가 자기 전공과 무관하게 쓰여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 좀 합리적으로 만들고 많이들 써먹어라.

    앞으로는 문학만 안다는 놈, 경제학만 안다는 놈, 이비인후과학 빼고는 모른다는 놈 일케 제 분과 하나만 안다고 자빠지는 놈 말은 절대 듣지도 믿지도 말아라. 그 분과 내지 소분과조차도 잘 모른다는 절절한 고백이니까. (읍~~ 이하생략 생략 생략...)

    모방하는 원숭이는 지가 배운 조그만 것 외에는 담을 치고 살게 돼 있다.명견을 10년을 길러도 밥 먹을 때 건들면 주인에게 '우엉~'하며 위협한다. 내 밥 그릇이라는 거지. 사대하는 나라에서 5천만의 생존법이지. 내가 사대해서 배운 법학을 그 중에도 국제법을 누가 감히 내 밥그릇을 건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