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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고인이 된 기독권사 모친이 그리웠다
지난 4월 21일 향년 85세로 별세... 사랑하는 모친의 명복을 빕니다.
 
김철관   기사입력  2011/05/11 [01:34]
▲ 지난해 7월 모친 생일날 군대간 조카 면회를 가 촬영한 사진이다.     © 김철관
5월 10일 초파일(음력 4월 8일)인 부처님오신 날(석가탄신일) 봉축 연등이 길을 따라 줄지어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수락산 내원암 쪽으로 향했다. 비가 오다 멈춘 흐릿한 날씨에 수락산을 찾는 등산객과 신도들이 어우러져 내원암을 향하는 듯했다. 매월당 김시습이 조선 세조의 왕권 찬탈에 반발해 은거한 주거지가 바로 내원암 주변이다. 내원암은 남양주 수락산의 미륵성 서쪽에 자리 잡고 있고, 내원암 쾌불도는 경기도 유형문화제 197호로 지정돼 있는 사찰이다.
 
지난 4월 21일(음력 3월 19일) 저녁 10시 53분경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2시경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사경을 헤맨 모친이 영원한 안식처인 하늘나라로 떠났다. 지난해 12월 21일 오후 3시경 서울 도봉구 한  종합병원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다시 안산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약 4개월 만에 생을 마감했다. 1927년(정묘년) 음력 5월 22일 생이니 향년 85세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경기도 안산 한 병원에서 영면한 모친을 주변 장례식장으로 모셨다. 3일장을 치러야 했지만 늦은 밤 영면한 관계로 불가피하게 4일장을 치렀다. 문상을 온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었다.
▲ 모친 권사 임직패     © 김철관

모시고 살아서인지 영원히 모친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가슴이 저 밀었다. 모친은 오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권사의 임직까지 받은 분이었다. 장례도 기독교식에 맞춰 목사님이 진행했다. 향은 피웠지만 영전에 밥숟가락 하나 못 놓고, 국화꽃 한 송이로 대신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장례식이 개운치 않기도 했다. 하지만 기독교 권사인 고인의 뜻을 받기로 했다. 부활절 주인 지난 24일 일요일 고인은 화장을 한 뒤, 안산 부곡동 하늘나라 공원 남골함에 안치됐다. 모친이 돌아가신 날은 비가 내렸고, 장례식 날은 꽃이 만발한 화창한 봄 날씨였다. 장례 후 이틀이 지난 삼우제 때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오늘 석가탄신일(5월 10일)은 모친이 돌아가신지 19일째 된 날이다. 초파일인 부처님 오신 날인 오늘은 평소 집과 병원에서 모친과 함께 지내다 혼자 집에 있으니 허전했다. 오전은 모친의 유품을 정리하다 시간을 보냈고, 낮 12시경 라면 하나를 끓여 먹고, 아무 준비 없이 무작정 집을 나섰다. 호주머니를 보니 가지고 와야 할 지갑도 없고, 오직 집 열쇠와 휴대폰뿐이었다. 유품을 보고 있노라니 모친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집주변 수락산 내원암 쪽을 향했다. 연등이 줄지어 걸려있었다.
부처님께 모친의 극락왕생을 빌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연등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등산객들과 보살님들 사이를 헤치고 한참동안 내원암을 향했다. 그 때 휴대폰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서울 신정동에 사는 맏형이었다. “오늘 광주 송정리에 구렁목 당숙이 돌아가셨다.” 모친이 별세한지 19일 만이고, 부처님오신 날, 당숙이 돌아가신 것이다. 아마 고인이 된 당숙의 자식인 누군가 광주 송정리에서 모셨던 모양이었다.
 
▲ 내원암 입구에서 바라본 가파른 계단. 작년 가을 촬영한 사진이다.     © 김철관
어릴 적, 고향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용당리 구룡 부락 내 광산 김가 씨족 사회에서의 당숙의 위치는 대단했다. 70~80년대 초만 해도 유교를 숭상했던 문중은 옛 법대로 장례와 제사, 결혼식 등을 거행했다. 삼촌 사촌 할 것 없이 김씨 문중은 함께 예의를 지키고 살아갔다. 설날 세배도 대소가를 찾아다니면서 절을 했다. 추수를 마친 가을날, 조상의 시제도 일일이 깊은 산골짜기 묘를 찾아다니면서 함께 예를 올렸다. 이런 전통을 이은 당숙도 모친과 마찬가지로 그리운 고향이 아닌 객지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너무 슬픈 일이었다.
 
평소 시간이 나면 자주 찾던 내원암을 향하는 마지막 가파른 계단이 보였다. 빠른 걸음을 재촉해서인지 힘이 들어 단 숨에 올라가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조금 휴식을 취했다.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였다. 내원암의 불경 소리와 은은히 목탁 소리가 들려 왔다. 합장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 때 문득 모친이 생각났다. 모친이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간 모습이 떠올랐다. 스님의 목탁소리를 들으니, 언뜻 모친이 새벽기도를 가면서 조심스레 아파트 문을 닫는 모습이 연상됐다.
 
아뿔싸, 모친의 극락왕생을 빌려왔던 내가 어리석어 보였다. 모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산 아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친은 여산 송씨 가문에서 태어나, 16살에 광신 김씨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부친과 같이 면소재지를 두고 서로 동네만 달랐다. 당시 부친의 나이는 13살이었다. 꼬마신랑과 신혼살림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찍 부친이 결혼한 이유는 부친의 형(큰 아버지)이 일본 식민지 지배 때 강제 징집돼 남양군도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슬하 아들 두 형제와 세 명의 딸이 있었다. 이외에도 갓난아기로 1~2명의 딸이 병사했다고 한다.
▲ 지난 4월 23일 조문객을 받을 때 모친의 영정이다.     © 김철관

큰 아버지가 일본군에 끌려가 사망한 후, 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를 빨리 결혼시킨 것이었다. 당시 남양군도에서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부인이 계셨는데, 혼자 살다가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에 집을 떠났다고 한다. 큰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모친에게서 난 큰아들(나에게는 맏형)을 양자로 몰래 입적시켜, 현재도 맏형은 핏줄만 형이지, 호적상은 큰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다.
 
 모친은 광산김씨 문중으로 시집와 5남 1녀를 두었다. 맏형도 몇 달 후면 어엿 노인 반열에 오른 회갑(60세)을 맞는다. 모친은 엄중한 유교주의를 숭상한 집안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어릴 적 시집와 집안일도 잘 모르는 한량인 부친(고흥군청 공무원 역임)을 남편으로 모시면서 시골 어려운 살림에 농사일까지 도맡아 했고, 6남매를 키우느라 고생도 많았다. 모친은 어려움을 기독교 새벽 기도의 힘으로 버티어 냈다.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4킬로 떨어진 교회에 새벽기도를 향했다.
 
지난 7전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로 모셨을 때부터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하루 전까지도 어김없이 새벽기도를 나갔다. 그런 모친을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됐다. 어머님 성은 宋이요. 이름이 文자 葉자(송문엽)이시여! 명복을 비나이다. 장례를 집전했던 목사님의 말대로 ‘천국에 갔을 것’이라는 말을 굳게 믿고 싶다.
▲ 화장 후 납골당 남골함으로 들어간 모친의 유골함이다.     © 김철관

모친은 평소 ‘형제간의 화목과 우애’를 강조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형제들은 모친의 유지대로 화목을 다짐했다. 또 모친은 살아생전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을 자주했다. 하지만 흘러 넘겼다. 이제 고민된 부분이다. 배타적 종교관이 가장 심한 일부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마음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선을 위해서 존재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모든 종교를 존경해 왔다. 부활절이면 교회에 가고, 석가탄신일이면 절을 가는 것이 나의 종교관이었다. 조만간 교회를 다닐 것인지의 문제도 마무리해야 할 듯하다. “어머님! 함께 지냈던 7년간의 생활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이제 이승에서의 모든 일 빨리 잊어버리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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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5/11 [01: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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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장대 2011/05/20 [14:49] 수정 | 삭제
  • 솔직한 종교에 관한 단상 왠지 가슴이 찡해져 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